유
有
[라]ens · [영]be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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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자, 있는 것, 문맥에 따라서는 존재 · 실존 · 존재 사물을 뜻함. 일반적으로 철학적 용어로 '유' 와 '존재 자' , 있는 것' 등은 동의어로 사용된다. 하지만 전통 철 학에서는 엄밀한 의미로 유와 존재자 사이를 구별 짓는다. [어원과 의미] 유는 그리스어의 '온' (ὀν)과 라틴어의 '엔스' (ens)이다. 라틴어로 '유' (ens)는 '있다' (esse)라는 동사의 분사형이다. 이 분사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 · 실존하는 것' 을 의미한다. '사랑하다' (amare)라는 동사의 경우 분사가 '사랑하는' (amans)· '사랑하고 있 는 을 뜻하여 현실적인 사랑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과 마 찬가지로 유는 존재의 실천(exercitium essendi) 혹은 존재 의 현실(actus essendi)을 의미한다. 이것은 여기 지금(hic et nunc) 실재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며, 분사적 유(ens participaliter sumptum)라고 한다. 이런 유는 현실적으로 있는 존재자, 있는 것에 해당된다. 또한 유는 있는 주체' (subjectum quod est)이거나 가능 적인 것을 뜻한다. 위에서 말한 사랑의 실천의 경우, 사 랑하는 현실은 그 행위의 주체를 전제한다. 이런 주체는 그 행위의 가능성이다. 그것은 사랑의 행위가 현실화되 기도 하고 현실화되지 않기도 하여 주체 안에 가능성으 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유의 개념을 명사적 유 (ens nominaliter sumptum)라 한다. 이런 것은 실재적인 것 뿐만 아니라 가능적인 것, 즉 유 전반에 해당된다. 이런 의미로 명사적 유 개념은 실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도 해당된다. 실재하지 않아도 존재 가능한 것, 혹은 순 (純) 가능적인 것도 유라 한다. 따라서 "어떤 모양으로든 존재가 수반하는 모든 것"(id cui competit aliquo modo esse) 혹은 "어느 정도 존재가 적합한 모든 것" (id cujus actus est esse)은 명사적 의미의 유이다. [개념과 원리] 유의 본질과 존재 : 사물의 작용 혹은 활동성(activitas)과 현실성(actus), 그리고 그 주체(subjectum)와 가능성(potentia) 등에서 유의 개념을 존재론적 으로 파악한다. 이런 과정에서 스콜라 철학 즉 전통 형이상학은 유의 존재론적 구조인 존재(esse)와 본질(essentia) 문제를 해명한다. 일반적으로, 분사적 유는 존재를 의미하고 본질을 함축하며(connotat), 명사적 유는 본질을 의 미하고 존재를 함축한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명사적 유는 분사적 유보다 형이상학의 더 폭 넓은 대상이 된다. 그 이유는 명사적 유는 현실적 유뿐만 아니라 순수 가능 적 유까지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사실 존재할 수 있는 것이 모두 다 실재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유 외에 가능유도 있다. 이렇게 우리 인식 작용은 유 개념의 존재 론적 분석에서 본질과 존재의 개념에 도달한다. 유 개념이 존재론적 구성 요소로서 존재와 본질을 내포하는 것은 질문 분석에서도 명시된다. 사실 우리는 질문을 할 때 존재와 본질을 명백히 구분하여 질문한다. "불사조가 무엇이냐"와 "불사조가 존재하느냐"는 본질과 존재를 명백히 구분하는 질문이다. 여기서 질문 행위는 유(있는 것, 존재)의 작용이다. 이러한 질문 행위는 한편 존재와 아는 것의 일치성(identitas)을 이끌어 내며, 다 른 한편으로는 존재와 아는 것 사이의 구별성을 제시한다. 질문자는 알며 또 알지 못하는 것이다. 질문자는 그 자신이 질문 대상에서 구별되며 자기를 넘는 존재를 만 난다. 질문 행위는 어떤 존재의 작용, 유한유(有限有) 혹 은 유한 본질유의 작용이다. 유한유는 존재의 현실성과 가능성, 다시 말해 존재와 본질로 구성되어 있다. 사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25~1274)는 유의 본질과 존재 문제를 본질(essentia)과 존재(esse)라는 명칭으로 명쾌하게 구별하여 제시한다. 따라서 전통 형이상학의 유(ens)를 존재자로 일률적으 로 번역하는 것은 그리 정확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 다. 전통 형이상학에서는 존재와 본질이 실재적으로 구별되고 대칭되는 낱말들이기 때문에, 존재가 표현되는 존재자 안에 본질을 포함시켜 쓰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될 수 없다. 본질을 무시하거나 전적으로 본질을 인정하 지 않는 경우 유를 표현하는 데 있어 존재자 일변도로 쓰 는 것은 타당할 것이다. 사실 한자 문화권인 중국 가톨릭 계에서는 유를 "존유" (存有)라 하는데, 동양 철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존(存)은 있는 것' , 그리고 유(有)는 '있 는 것' 혹은 '취하는 것' , '소유하는 것' 을 말한다. 이 경우 유는 소유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소유는 물론 소 유하는 주체를 내포한다. 이런 의미에서 중국어의 존유 (存有)는 주체인 본질과 존재를 다 같이 표현하고 있음 으로, 전통 철학의 유 개념을 잘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같은 한자 문화권인 일본 특히 가톨릭계의 권위 있는 책 들에서 유(ens)를 유(有)로 표현한다. 우리의 전통적인 표현에서도 유무(有無) · 만유(萬有) · 공유(空有) 등은 아주 오래된 표현들이며, 우리말 《철학 대사전》에서도 유(ens)를 유(有)로 표기하여 설명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철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유와 존재자가 동의어로 잘못 쓰이는 경향이 있다. 유의 정의와 인식 : 유(有) 개념은 엄밀한 의미에서 정의 내릴 수가 없다. 사물의 정의는 그 사물이 속하는 유 (類, genus)와 이런 유(genus) 개념에 실재로 내포되지 않 는 종차(種差, differentia specifica)가 합쳐져 이루어진다. 사람의 정의를 예로 든다면, '사람은 이성적 동물이다'라고 한다. 이때 동물은 유(類)이고, 이성성(理性性) 종차이다. 이런 인간의 정의에서 볼 때 동물은 유(類) 개 념이고, 이성은 동물과는 구별되는 종차 개념이며 인간을 순(純) 동물에서 구별시키는 종차 개념이다. 그런데 유(有)는 그 보다 상위 개념, 즉 유(類)를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있는 모든 것은 유(有)이며, 유 외에는 무(無) 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有)는 유 자체 안에 종차로 불릴 수 있는 것까지도 내포한다. 어떤 것이든 있는 것은 다 유이기에 종차도 유이다. 따라서 유 개념을 구별지어 줄 유밖에 성립되는 종차 개념이란 있을 수 없다. 유 개념은 일차적인 개념이어서 유 밖의 다른 개념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있는 것(ens)으로 표현되는 유 개념은 정의할 수 없으며 다만 서술될 수 있을 뿐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실체적 결합체(unio substantials)로 보았다. 그의 인식론에서는 지성 밖에 있는 사물이 지성 인식의 대상이다. 지성 자체가 대 상이 될 때에도 지성은 자체를 대상화시켜야 한다. 물체적 대상은 감관에 작용한다. 상상(imaginatio) 안에 발생 하며 감관으로 파악되는 구체적 질료적 대상을 제시하는 표상(phantasmata)은 그 자체가 구체적 대상의 표상이다. 표상은 개별 사물의 유사상(類似像)이다. 신체의 기관에 인각(印刻)되어 보존되어 있는 개별 사물의 유사상이다. 이와는 달리 인간 지성의 인식은 보편적이다. 인간 지성은 구체적인 질료적 대상에서 그 형상(形相)을 추상하여 사물을 보편적 개념으로 파악한다. 인간은 감관으로 구 체적인 인간, 구체적인 나무 등의 표상을 파악한다. 이런 표상은 항상 구체적인 것이다. 이와는 달리 지성 또는 정신은 예컨대 인간의 경우, 이런 개념을 모든 사람을 내포 하는 개념, 즉 그런 것으로서(qua talis)의 보편 개념으로 파악한다. 감관이 인간을 파악할 경우 김 군 또는 이 군 등 구체적 인간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정신은 인간을 그런 구체적 특징에서 추상한 인간,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이성적 동물로서 파악한다. 다시 말해 지성은 인간을 하성(何性, quidditas) , 무엇임, 즉 본질 개념에서 파악한다. 인간의 감각이 영혼과 육체의 작용이라 할지라도 질료적 사물 또는 표상이 이성적이며 신령한 영혼과 직접 접촉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토마스 아퀴나스는 정신의 특 수한 역할을 인정한다. 사실 개념은 순전히 수동적으로 형성될 수 없다. 개념 형성 과정에 우리는 어떤 능동적 작용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작용은 표상을 비추어 주는 작용이며, 이런 작용으로 인간 지성은 표상에서 보편적인 것, 즉 가지상(可知像, species intelligibilis)을 추상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비침' 또는 '조명' (iluuminatio)이란 말을 쓰고 있지만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Hipponensis, 354~430)와는 그 의미를 달리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능동 지성의 이런 작용을 자연적 능력에서 설명하고 위 로부터의 특별한 조명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연적 지성 능력은 표상의 가지적(可知的) 요인을 지성에 비쳐지게 한다. 즉 이런 빛은 표상 안에 형상적으로 또 가능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보편적 요인을 드러내 준다. 그러므로 능동 지성은 그 자체의 능력으로 개별적이며 구체적인 감 각 대상에서 보편적 요인을 추상하여 수동적 지성(受動 的知性, intellectus passivus) 안에 인각상(印刻像, species impressa)을 형성한다. 이와 같이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인식 능력에 능동과 수동의 두 면을 인정한다. 능동 적 · 자발적 측면을 "능동 지성"이라 하고, 수동적 · 수용 적 측면을 "가능적 지성"(inellectus posinbils)이라고 한다. 능동 지성의 규정에 대한 수동적 지성의 반응은 '정신의 말' (verbum mentis)이다. 그것은 '표현상' (表現像 species expressa)이라고도 불린다. 이런 '정신의 말' 은 완전한 의 미로 보편 개념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에서 영혼 혹은 지성은 처음에 그 위에 아무것도 쓰이지 않았으나 이제부터 쓰여져야 할 공백의 서판(tabula rasa)과 같은 것이다. 이 세상 질서에 있어서 인간 인식은 '표상에로의 전회' (conversio ad phantasmata)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렇다 고 인간 인식이 물질계 즉 감각계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며, 감각계를 넘어 유(ens)를 대상으로 한다. "지성은 유의 공통 이유에 의거하여 자기 대상을 받아들인다. 가지적 지성은 모든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신학 대전》 1, 79, 7). "지성의 고찰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유이다. 유 는 지성의 고유한 대상이다"(1, 5, 2). 그런데 존재의 근거를 자체 안에 갖지 못하고 다른 것에서 존재의 유래성 을 갖는 이 세계 내 유들은 유한유 혹은 우연유들이기 때문에, 인간 인식은 그런 존재들의 근거로서 무한유이며 필연유인 신의 존재 인식에 이른다. 이런 인식도 '표상 에로의 전회' 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인간 지성이 신을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대상이 신의 존재를 드러내 주는 한에서 신을 인식하게 되는 것을 뜻 하며, 그런 인식은 신의 본성에 대해 유비적(類比的)이 며 간접적이고 불완전한 인식을 의미한다. 이렇게 우리는 신을 원인으로, 초과를 통해(per excessum), 그리고 제 거를 통해(per remotionem) 인식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신령한 신의 본성과 속성에 대해 더 깊이 인식해 갈 수 있다. 예컨대 신이 위격적(位格的, personalis)이라 할 때 신의 위격성(personalitas)은 인간의 인격과는 다른 것이며, 신의 지혜에 대해 말할 때 그 지 혜는 인간의 지혜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차이를 토마스 아퀴나스는 '부정의 길' (via negativa)과 '긍정의 길' (via positiva)로 설명한다. '부정의 길' 이란 신의 존재 양식이 인간의 것과 같지 않다는 측면이다. 이런 경우는 예컨대 인간의 한계성이 부정되는 경우이다. '긍정의 길' 이란 신의 존재 양식이 인간의 것을 훨씬 초월한다는 '초월을 통해' 설명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탁월한 양 태로' (modo eminentiori) 신에 대해 서술되는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은 의미를 갖는 유를 고찰할 때, 유 개념은 일의적(一義的)이거나 다의적(多義的)일 수 없고 유비 적일 수밖에 없다. 유비(類比, analogia)를 통해 서술된다는 것은 어떤 비례를 통해 서술되는 것을 뜻한다. 이런 비례가 서술되는 서로 다른 사물은 어떤 공통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유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비 례 혹은 관계되는 사물들이 서로 다른 개념이어야 하지만 전혀 다른 개념이어서는 안되고 같은 명칭으로 불릴 수 있는 어떤 공통 근거를 가져야 한다. (⇨ 존재 ; 존재 자 ; → 유비 ; 형이상학) ※ 참고문헌 정의채,《형이상학》, 열린, 10판, 1997/ -, 《존재의 근거 문제》, 열린, 4판, 2000/ H. Renard, The Philsophy of Being, The Bruce Publishing Company, Milwauke, Tenth Printing, 1956/ A. Franchi · L. Pagello, 《EF》 3, Stampa Romagraf-Roma, 1979/ R.M. McInnery, 《NCE》 2, pp. 230 ~ 2321 T. Tyn, Metafisica della Sostanza, Partecipazione, Analozia Entis, Edizioni Studio Domenicano, Bologna, 1991/ P.P. Gilbert, La Semplicit del Principio, Edizioni Piemme, Roma, 1992/ A. Alessi, Metafisica, Las-Roma, 1992/ J. de Finance, Conoscenza dell'Esere, Universit Gregoriana, Roma, 1993/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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