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슬라비아

[영]Yugoslav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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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중남부 발칸 반도에 있는 나라. 공식 명칭은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Federativna Republika Jugoslavija). 북쪽으로는 헝가리, 동쪽으로는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남쪽으로는 마케도니아(Macedonia), , 남서쪽으로 알바니 아와 아드리아 해, 서쪽으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Bosnia and Herzegovina) , 북서쪽으로 크로아티아(Croatia)와 접하고 있다. 본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을 이루었던 6개 공화국 가운데 슬로베니아(Slovenia) ,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연 방이 해체된 이후에 독립하였고, 1992년 4월 27일 세르비아(보이보디나 및 코소보 자치주 포함) 공화국과 몬테네그로 공화국이 현재의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면적은 102,173k㎡이고, 인구는 8,380,000명 (2001)이며, 수도는 베오그라드(Baograd)이다. 3세기 초 이 지역에서 로마의 세력이 약화된 이후 6~ 7세기경 남(南)슬라브인들이 본격적으로 발칸 반도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627년 슬로베니아인들은 자그레 브(Zagreb)와 류블랴나(Ljubliana)를 중심으로 슬라브인 공후인 사모(Samo)에 의해 '사모 제국' 을 건설하였으나 9세기 초 프랑크 왕국이 이 지역을 흡수하였다. 10~11 세기에 크로아티아 왕국은 번성을 누렸으나 이후 헝가리 왕 칼만(Kalman)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보스니아는 오 랫동안 통일적인 연합체를 이루지 못하다가 12세기 말 전설적인 영웅 반 쿨린(Ban Kulin, ?~1204?)에 의해 처음 으로 국가가 형성되었다.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그리 스도교 연합 세력이 오스만 투르크에 패한 이후 사바 (Sava)-우나(Una)-다뉴브 강을 잇는 경계선 이남 지역 은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이 전투 이후 발칸 반도는 오스만 투르크와 오스트리아의 각축장이 되어 세르비아와 보스니아는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고,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지배를 받았다. 19세기경 남슬라브 민족은 몬테네그로를 제외하고 모두 외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 중 슬로베 니아와 크로아티아는 오스트리아의 일부로서 어느 정도 경제적인 번영을 누리고 있던 반면, 세르비아를 포함해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던 남슬라브인들은 군대와 지주들로부터 억압을 받았다.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1804년 세르비아에서 카라조지(Karadjordje)의 지도 아래 봉기가 이어져 1815년 2차 봉기가 발생하였고, 1830년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1918년 '세르비아 크로아 티아 · 슬로베니아 왕국' (1929년 유고슬라비아로 개명)이 수립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에 대한 저항 운동을 전개하였고, 1945년 11월 저항을 주도했던 사회 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연방 인민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초대 대통령이었던 티토(Josip Broz Tito, 1892~1980)는 소 련의 패권주의를 거부하고 1948년 6월부터 독자 노선을 추구하였으며, 이에 유고슬라비아는 비동맹 세력의 중심 국가로 부상하였다. 1963년 신헌법에 따라 유고슬라비 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으로 개칭되었고, 1980년 티토 사망 이후 집단 지도 체제가 되었으며, 민족 분규를 겪었다. 특히 1989년 동유럽을 휩쓴 공산 정권 붕괴의 소용 돌이에서 연방을 이루었던 6개 공화국 중 크로아티아 (1991. 6. 25), 슬로베니아(1991. 6. 25), 마케도니아(1991.11.7),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1992.3.2)가 차례로 독립 하여 연방이 사실상 해체되었다. 이에 1992년 4월 27일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신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 을 수립하였다. [교회의 역사] 세르비아 : 공식 이름은 세르비아 공화 국(Republika Srbija)이며, 수도는 베오그라드이다. 7세기 경 발칸 반도에 정착한 세르비아인들은 정치 · 군사적 지 도자인 '주판' (župan)이 통치하는 지역에 거주했고, 879 년경 주판 무티미르(Mutimir)는 동로마 제국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 또한 성 치릴로(St. Cyrillus, 827~869)와 성 메토디오(St. Methodius, 825~885)의 제자들은 모라비아에서 추방되어 발칸 반도의 슬라브인 속으로 들어가, 특히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에게 선교 활동을 펼쳤다. 10세기경 세르비아 최초의 주교좌가 라슈카 (Raska) 강 주변에 설정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 지역은 1020년경부터 오흐리드(Ohid) 관구의 관할 교구로서 알려졌다. 12세기 후반 세르비아 왕국을 통일시킨 네마냐(Nemanja) 왕국의 대(大) 주판 네마냐(S. Nemanja, ?~1200)는 1169년 동로마 제국과 싸워 세르비아의 독립을 쟁취했는데, 그는 1186년 제타 지역을 통합하고 국가와 교회 의 결속을 강화하였다. 네마냐의 장남이 죽은 뒤 통치권을 물려받은 둘째 아들 스테판은 자신의 입지를 확실히 하기 위해 교황 호노리오 3세(1216~1227)에게 자신의 대 관식을 집전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세르비아는 교황청과 연결되었으나 셋째 아들 사바 (Sabbas)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진행시킨 협상의 결과로 인해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협상의 결과 1219년 사바가 초대 대주교로 임명되면서 세르비아 정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1253년 대교구좌는 지차(Zica)에 서 페치(Pec)로 옮겨졌고 이후 페치는 세르비아 정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중세 세르비아의 가장 중요한 통치자였던 두산(S. Dusan, 1331~1355)은 1345년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면서 페치 대교구를 총대주교좌로 선포하였다. 1389년 6월 세르비아는 오스만 투르크에게 대참패를 당하였고 세르비아 정교회는 1459년 스메데로보(Smederovo) 요새의 함락과 함께 소멸되었으나, 보스니아 태생의 오스만 투 르크의 대신(grand vizier) 소콜로비치(Mehmet Sokolovic) 가 1557년 총대주교를 임명함으로써 교회는 재건되었다. 새로 탄생한 총대주교구좌의 네 명의 지도자들은 모두 소콜로비치 가문 출신이었으며, 세르비아 정교회의 영향력은 남쪽으로는 예전에 비해 많이 축소되었으나 북 쪽으로는 사바 강과 다뉴브 강까지 관할할 수 있게 되었다. 오스만 투르크의 점령 시기 동안 세르비아 정교회는 교육 활동을 전개하는 등 세르비아 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557년 폐지되었던 페치의 총대주교로 임명된 요반 2세(Jovan Ⅱ)는 세르비아인 의 봉기를 지원하였는데, 오스만 투르크인들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1594년 4월 27일 밀레쉐보(Mileševo)에 있 는 사바의 무덤을 파헤쳐 베오그라드 근처에 있는 브라 차르(Vracar)에서 태웠다. 계속되는 오스트리아와 오스만 투르크 간의 전쟁 속에서, 1689년 세르비아인들은 오스트리아인들과 연대하여 오스만 투르크에 대항하였다. 1878년 7월 베를린 회의에서 세르비아의 독립을 승 인했으며, 이듬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세르비아 정 교회를 승인하였다. 몬테네그로 : 공식 이름은 몬테네그로 공화국(Republika Crna Gora)이며, 수도는 포드고리차(Podgorica)이 다. 로마 제국 시대에 일리리아의 일부분을 이루었던 몬 테네그로 지역은 7세기 슬라브족이 정착하면서 제타 (Zeta) 주로 분리되었으며,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그리스 도교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드리안 해안을 따라 바르 (Bar) 대교구 관할의 라틴 전례를 따르는 소수의 공동체 가 존재하였다. 12세기 후반 세르비아에 합병된 이후, 1389년 세르비아가 오스만 투르크에 패하자 오스만 투 르크 · 알바니아 등의 지배에 저항하였으며, 1516년부터는 민중 의회가 선출한 주교들의 통치하에서 다소간의 자유를 획득하였다. 유고슬라비아의 설립(1918~현재) : 1920년부터 '세르 비아 · 크로아티아 · 슬로베니아 왕국' 은 베오그라드 총 대주교좌 관할이 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구조적으로는 모든 종교에 대한 자유와 평등을 인정했으나, 다방 면으로 세르비아 정교회를 선호하고 도왔다. 1922년 유 고슬라비아 정부는 정치적 이유로 교황청과 정교 협약을 맺기 위해 협상을 시작하였고 1935년 정교 협약을 체결 하였다. 유고슬라비아 의회는 동방 교회측의 의견을 수용하여 비준을 거절하였으나, 이 정교 협약을 통해 세르 비아를 관할할 베오그라드 대주교좌, 슬로베니아를 관할할 류블라냐 대주교좌, 달마치야를 관할할 스플리트 (Split) 대주교좌가 설정되는 등 가톨릭 교회는 조직화되었고, 로마-슬라브 전례가 유고슬라비아 전역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1945년 연방 인민 공화국이 설립되고 이듬해 11월 30일 종교의 자유가 승인되었지만, 정부는 때로는 은밀 하게 때로는 공개적으로 모든 종교에 대하여 박해를 가했다. 박해가 진행되는 동안 유고슬라비아의 22개 교구 중 14개 교구가 주교를 잃었으며, 약 350명의 신부들이 살해되었고, 200여 명이 투옥되었다. 또한 300여 개의 수도원 및 교회 기관들과 10개 이상의 신학교가 폐교되 었고 교회 재산은 몰수되었으며, 가톨릭 구제회 종사자들이 모두 추방되었다. 1952년 티토 정부는 교황청이 내정을 간섭했다고 비난하면서 교황청과의 외교 관계를 일방적으로 단절하였다. 그러나 1966년 6월 협정이 다시 체결되면서 정부는 국민의 신앙 생활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을 인정하였고, 주교가 교계적인 문제나 종교적 안건에 대하여 교황청과 의견을 교환하고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1971년 3월 티토는 공산 국가 원 수로서는 최초로 교황청을 방문, 교황 바오로 6세 (1963~1978)를 예방하였다. 국가가 분열되는 과정에서 가톨릭 지도자들은 평화를 위해 동방 교회, 때로는 무슬 림 지도자와 협력하였다. 200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는 자신을 방문한 유고슬라비아 주교들에게 전쟁으로 인해 많은 상처를 받은 국가의 화합과 교회의 통합을 위하 여 노력해 줄 것을 당부했으며, 교황은 정치적 상황의 변 화가 "국가 내 가톨릭 공동체가 활동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기회와 국면을 열어 주기를" 희망하였다. 2001년 현재 521,000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있으며, 대교구 2, 교구 3, 본당 261개에 대주교 4, 주교 3, 신 부 245(교구 소속 203, 수도회 소속 42), 종신 부제 3, 수사 7, 수녀 382명이 있다. 마케도니아 : 7~8세기 고대 마케도니아에 정착한 슬 라브인들은 남쪽에서 이동해 온 그리스인들에게 동화되 었으나, 데살로니카 북쪽과 서쪽의 사람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였다. 11세기 초 차르(tsar) 새뮤얼(980~ 1014)의 통치 기간은 마케도니아의 짧지만 영광스러운 시기였으며, 이후 동로마 제국, 세르비아, 터키 등의 통 치를 받았고 발칸 전쟁(1912~1913) 이후 다시 세르비아 의 통치를 받았다. 8~9세기 동안 마케도니아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 성 치릴로와 성 메토디오의 제 자들은 거의 마케도니아인이었는데, 대 모라비아에서 추방당한 뒤 고향으로 돌아온 이들은 슬라브 언어와 문화 를 발전시켰다. 그들 중에서 오흐리드의 성 글레멘스는 893년 슬라브인으로는 최초로 주교가 되었다. 콘스탄티 노플 총대주교의 관할하에 비잔틴 전례를 따르던 불가리 아 총대주교는 971년 불가리아 왕국이 쇠퇴한 뒤 마케도니아에서 은신처를 찾았으며 오흐리드에 거주하였다. 1018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바실리우스 2세(976~1025) 는 마케도니아를 침범하여 병합하였으나, 이듬해 오흐리 드 대교구장은 오흐리드 대교구가 발칸 반도 서부 지역에서 교구들을 관할하는 상급 대교구로서의 역할을 지속 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칙령을 반포했다. 이와 같은 입장은 1768년까지 지속되었으며, 터키가 침략하였을 때 오흐리드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세르비아 총대주교좌에 속하였으나 1958년 마케도니아 정교회는 독립적 지위를 획득하였다. 1859년 마케 도니아 내에서 가톨릭과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자 50,000명이 참여하였으며 이와 같은 움직임에 따라 교황청은 1883년 데살로니카 대목구를 설립하였다. 1991년 독립한 마케도니아의 공식 명칭은 마케도니 아 공화국(Republika Makedonija)이고, 수도는 스코플례 (Skopje)이다. 1969년에 설립된 스코플례-프리즈렌 (Prizren) 교구는 코소보 지역을 포함하고 있는데, 마케도니아 교회는 코소보 사태가 일어난 기간 동안 알바니아 인들을 관할하였다. 2001년 현재 총 인구는 2,010,000명이며 이 중 가톨 릭 신자수는 총 인구의 0.9%인 19,000명이다. 교구 1, 본당 30개에, 주교 1, 신부 21(교구 소속 20, 수도회 소속 1), 수녀 55명이 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보스니아인들은 크로아티아나 세르비아인과 같은 뚜렷한 민족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자연 환경으로 인해 외부 세력에 쉽게 노출되었고, 크로아티아, 헝가리, 그리고 세르비아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다. 12세기 말 반 쿨린이 보스니아에서 최초로 국가를 건설했을 당시 이 지역에는 가타리파 (Cathari)가 많이 퍼져 있었다. 발칸 지역에서 보고밀파 (Bonomili)로 알려져 있던 이 이단은 이원론적 우주관을 따르면서 철저한 금욕 생활을 유지하였다. 교황은 수 차례 사절을 파견하였고 이들에 대항하여 십자군을 조직하였으나, 보고밀파는 1463년 오스만 투르크가 이 지역을 점령할 때까지 활동하였다. 1389년 세르비아가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침략받고 점령된 후에 보스니아-해르체 고비나에는 세르비아 정교회 신자들이 정착하기 시작하 였고 교계 제도가 설립되었다. 1684~1735년까지 터키가 지배하는 동안 보스니아에는 어떠한 가톨릭 주교나 교구 성직자도 활동하지 못했고, 단지 작은 형제회만이 활동하였다. 1735년 보스니아-해르체고비나 지목구가 설립되었고, 작은 형제회에서 관할하게 되었다. 1878년 러시아오스만 투르크 전쟁 후 베를린 회의에서 오스트리아-헝 가리의 정복지로 인정되었고 1908년 10월 7일 오스트 리아-헝가리에 합병되었다. 1881년 7월 교황 레오 13세 (1878~1903)는 사라예보(Sarajevo) 대교구를 설립하였다. 1992년 독립한 보스니아-해르체고비나의 공식 명칭 은 보스니아-해르체고비나 공화국(Republika Bosna i Hercegovina)이며, 수도는 사라예보이다. 독립 후 3년 6 개월 동안 계속된 전쟁으로 약 450,000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이곳을 떠나 크로아티아 또는 남보스니아로 갔다. 2001년 현재 총 인구는 3,840,000명이며, 이 중 가톨릭 신자수는 총 인구의 12%인 454,000명이다. 대교 구 1, 교구 2, 본당 281개에, 추기경 1, 대주교 1, 주교 3, 신부 599(교구 소속 249, 수도회 소속 350), 종신 부제 1, 수사 16, 수녀 532명이 있다. (→ 슬로베니아 ; 크로아티아) ※ 참고문헌  M. Lacko, 《NCE》 14, pp. 1083~1089/ 2002 Catholic Almanac, Our Sunday Visitor Publishing Division, pp. 306, 324, 339/ Annuario Pontificio 1998, Città del Vaticano, 1998/ 《EU》 Les Chiffres du Monde, pp. 134~135, 338~339, 529~530/ 임영상 · 황영삼 공편, 《소련 과 동유럽의 종교와 민족주의》,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1996.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