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하 나시 Judah ha-Nail(135~2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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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 최초의 성문법인 미쉬나(מִשְׁנָה)를 편찬한 유대 교의 수장. [생 애] 힐렐(Hillel, 기원전 1세기 후반~서기 25년경)의 6대손이요 유대교 수장(Nasi)이며 미쉬나 법전을 편찬한 유다를 일컬어 '우리의 거룩한 스승 (Babbenu ha-Kadosh) 이라 한다. 유대교 문헌에서 아무런 수식어 없이 '랍비' (Rabbi)라고 하면, 이분을 가리킬 만큼 존경을 받는 분이 다. 그는 135년 아키바(Akiba ben Joseph, 50?~135) 율법 학 자가 순교한 날 태어났다고 한다(바빌론 탈무드 키두시 72b). 제2차 유대 독립 전쟁(132~135)에 이어서 일어난 유대교 박해가 가라앉자, 140년경 율법 학자들은 갈릴 래아 지방 우샤(Usha)에 모여 최고 의회를 재건하고, 힐 렐의 현 손자요 가믈리엘 2세(Rabban Gamliel Jabneh, 1세 기 후반~2세기 초)의 아들인 시메온(Rabban Simeon)을 수 장(Nasi)으로 뽑았다. 이 수장의 아들이 유다인데, 그는 우샤에서 율법을 공부했다. 유다는 2세기 후반에 아버지 의 뒤를 이어 유대교 수장이 된 다음 갈릴래아 지방의 우 샤에서 베트세아림(Bet She'arim)으로 옮겨 생활하였고, 다시 세포리스(Sepphoris)로 옮겨 생활하였다. 그는 217 년경 세포리스에서 죽었으며, 그의 유해는 베트세아림에 묻혔다. 1936년 히브리 대학교의 고고학 팀이 베트세아 림에서 유다 하 나시의 무덤을 발굴했다. 정치적 활동 : 로마 제국의 황실은 유다를 유대교의 수장으로 인정하고, 그에게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했다.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로부터 베트세아 림과 골란 고원의 땅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셉티 미우스 세베루스 황제(193~211)와 카라칼라 황제(198~ 217)가 이스라엘을 순방했을 때 그들을 직접 만났던 것 같다. 유다는 당시 일상적으로 통용되던 아람어 대신 조상들 의 말인 히브리어를 보급하려고 애썼다. "시리아 말(아람 어)이 이스라엘 땅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로 말하라" (바빌론 탈무드 바바 캄마 82b-83a) 그 는 유일신 신앙 고백문(Shema Israel)을 어느 나라 말로 바쳐도 무방하다는 이전의 법규를 고쳐, 오직 히브리어 로만 외우라고 명했다(토세프타 소타 7, 7). 그는 율법에 정통한 율법 학자들을 우대하고 율법에 무지한 사람들(Am ha Arez)을 차별하는 정책을 썼는데, 다음의 일화가 그 생생한 사례이다. "기근이 든 해이면 랍비(유다 하 나시)는 성서와 미쉬나와 성서 해설과 율법 과 사회를 배운 사람들을 위해서 곡식 창고를 열었다. 그 런데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요나탄 벤 암람이 확언 하기를, 자기는 그런 지식이 없다고 하였다. 랍비가 요나 탄에게 (곡식을 줄지 말지) 망설이자, 요나탄이 랍비에 게 '개와 까마귀에게 먹이를 주듯이 저를 대하십시오' 하였다. 랍비는 그렇게 하고 나서 율법에 무지한 사람 (Am ha Arez)에게 빵을 준 것이 마음에 걸려 고민했다. 그러자 랍비의 아들 시므온이 아버지에게, 요나탄은 아 버지의 제자인데 율법 지식의 영예로 이득을 취할 마음 이 없어 그렇게 처신했다고 고하였다. 그때부터 랍비는 (율법 학자, 율법에 무지한 사람 가릴 것 없이) 모두 창고로 와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렇지만 율법에 무지한 사 람들 때문에 세상에 말생이 생긴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바빌론 탈무드 바바 바트라 8a) . 그런데 유다의 가문이 세속적인 왕족처럼 권력과 부귀를 누리는 데 대한 반발도 적지 않았다. 유다 하 나시의 측근인 히야 율사의 두 아들이 유다의 초대를 받아 식사 를 했는데, 술이 좀 과했던지 유다 가문을 노골적으로 비 판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두 가문, 곧 바빌로니아에 있는 해외 수장 가문과 이스라엘 땅에 있는 총 수장 가문이 망하지 않는 한 다윗의 아들(메시 아)은 오지 않는다"(바빌론 탈무드 산헤드린 38a)고 말하였다. 미쉬나 편찬 : 유대교에서는 율법을 성서에 기록된 성 문법과 랍비들이 전해 준 구전법으로 나눈다. 135년에 순교한 아키바가 잡다한 율법들을 주제별로 분류하는 원 칙을 수립하여 메이르(A. ben Meir, 2세기경) 율법 학자에 게 전해 주었다. 그에게 배운 유다 하 나시가 200년경 우샤에서 유대교 사상 처음으로 법전을 펴냈는데, 이것이 곧 미쉬나이다. 이 법전에는 기원전 50년경부터 서기 200년경 사이에 활약한 율법 학자 150여 명의 율법 견 해가 적혀 있으며, 6부 63편 520장으로 짜여 있다. 미 쉬나 편찬에 이어 이 법전을 보충하여 편찬한 법전이 토세프타이고, 5세기 초에 주로 가이사리아 학파와 세포리 스 학파의 미쉬나 해설을 모아 편찬한 법전이 예루살렘 탈무드, 일명 팔레스티나 탈무드이다. 그리고 메소포타 미아로 이민 가서 살던 율법 학자들이 7세기 초에 주로 네하르데아 · 품베디타 · 수라 학파의 미쉬나 해설을 모 아 편찬한 법전이 바빌론 탈무드이다. 유대교가 율법 중 심의 종교라는 점에서 미쉬나는 성서과 쌍벽을 이루는 중요한 문헌이다. [평 가] 후대인들은 유대교의 출중한 수장으로서 미쉬 나 법전을 펴낸 유다를 "모세 이후 랍비(유다 하 나시)가 처음으로 학식과 현직을 한 몸에 갖추었다"(바빌론 탈무드 깃틴 59a)고 평가하였다. (→ 가믈리엘 ; 미쉬나 ; 유대교 ; 힐렐 학파) ※ 참고문헌  Jacob Neusner, The Modern Study ofthe Mishnah, Leiden, Brill, 1973/ 《EJ》 10, pp. 366~372. [鄭良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