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
敎
[라]Judaeismmus · [영]Juda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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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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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5-26장의 내용에 따른 벳스안의 회당에 있는 모자이크.
유일신(唯一神)인 야훼를 믿는 유대인들의 종교. 유대 인들의 믿음과 실천. 넓은 의미에서 유대교는 아브라함으로 시작되는 족장 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4천 년에 걸친 유대 민족의 종교 현상 전체를 뜻한다. 하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기원 전 5세기에 유대 민족이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유대교 를 재건한 때부터 지금까지 2,400년 동안 믿어 온 신앙 체계를 가르킨다. 유대인의 전통 속에서 이루어진 종교 체계가 유대교의 정통을 형성했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전통 연구를 통해 유대교를 이해할 수 있으며, 유대인의 역사 속에서 유대교의 종교 체계를 알아볼 수 있다. I . 역 사 [유대교 재건 시대(기원전 538~333)] 기원전 586 년에 바빌론으로 유배를 갔던 사람들은 왕족과 사제들, 관리 등을 포함한 지배층과 전문 직종에 종사하던 사람 들과 군인들이었다. 그리고, 남부 유다 지역에 남았던 사 람들은 대부분 무지하고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바빌론에 살던 사람들은 성전이 없는 상황에서 모세 오경의 종교 법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50여 년 후 바 빌론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조상들이 생 활했던 주거지와 토지를 되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동안 유다 지역에 남아 살았던 사람들은 그 토지의 사용 권리를 주장했고, 돌아온 사람들은 조상들의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돌아온 사람들은 페르시아의 도움으로 성전을 개축할 수 있었으며, 돌아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재건축 사업이 이루어졌다. 성전 개축뿐 아니라 모세 오 경의 율법에 따른 새로운 유대인 사회의 형성이 그들이 당면한 과제였다. 성서에 등장하는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이 당시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반면, 그 땅에 남아 살았던 사람들은 성전 제의에 대한 이해가 없었으며, 모세 오경의 율법에 관해서도 무지하 였다. 그들은 '암 하아레츠' (עַם הָאָרֶץ), 즉 "그 땅의 민 족"이라고 불렸다. 따라서 기원전 5세기 전반기에 유다 땅에서는, 돌아온 자들과 '암 하아레츠' 사이의 갈등과 반목은 극에 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돌아온 사제들과 지식층 현자들은 전통적인 성전 의식에 따르는 종교 제 의를 재정비하고, 모세 오경에 기초를 둔 사회 질서를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기원전 428년을 전후하여 페르시아 황제인 아르닥사싸 1세(기원전 464~424)의 명으로 모세 의 법전을 가지고 유다로 돌아온 에즈라가 초막절에 율 법을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느헤 8장). 그는 이방인들과 맺은 결혼을 모두 파기하여 이방인 아내들과 그들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을 모두 내보내도록 하였다(에 즈 9, 2 : 10, 2. 44). 유대인들은 그의 가르침에 따라 율법을 지키기로 맹세하였으며(느헤 10, 31-37), 십일조를 바치기로 다짐하였다(느헤 10, 38-39). 이로써 당시 이스라엘은 독립 국가는 아니었지만, 모세 오경을 생활 신조 로 삼은 율법 공동체로 다시 태어났다. 이때 만들어진 사제들과 지식층 현자들 120명의 모임을 '크네세트 하그돌라' (כְּנֶסֶת הַגְּדוֹלָה), 즉 '대회당' 또 는 '대의회' -기원전 100년경 이 제도가 개선되어 그리 스어 '산헤드린' 이라 칭하게 된다-라고 불렀다. 이 시기에 앞으로 발전되는 유대교의 종교적인 체재가 형성되었다. 바빌론 유배 전과 이후의 연속성, 즉 고대 이스라 엘 문화의 정통성을 찾는 작업이 현자들의 과제였다. 신관 : 유배 이전에는 하느님을 마치 인간처럼 묘사하 였다. 그런데 유배 이후에는 하느님의 초월성을 강조하 여 가능한 한 의인화 경향을 피했다. 예를 들어 타르굼 (תַּרְגּוּם)에 따르면, 에덴 동산을 거니신 분은 하느님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이었다고 한다(창세 3, 8). 또, "하느 님께서 삼키는 분이시다"(신명 4, 24)라는 표현을 "말씀 이 삼키는 불"이라고 고쳤다. 나아가 초월적인 하느님을 너무나 경외하여 이스라엘의 신명(神名) '야훼' 를 "아도 나이" (나의 주님)라고 읽었다. 그 밖에도 하느님 야훼를 가리키는 우회적인 표현들이 발달했다. 예를 들어, '이 름' (마태 6, 9) · '하늘'' (마태 5, 34) · '전능' (마태 26, 64) 등이다. 선민 사상 : 에즈라의 지시에 따라 이스라엘 남자들이 이방인 아내들과 그들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을 모조리 쫓아냄으로써 이스라엘은 이방인들과는 다른 선민으로 자처했다. 이스라엘 선민이 보기에 이방인들은 죄인들이다 (마태 5, 46-47 : 6, 7 : 18, 17 : 사도 2, 23). 이때부터 선민이 만민을 적대시하고 따라서 만민이 선민을 적대시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율법 : 에즈라는 이스라엘을 율법 중심의 공동체로 만 들었다. 국가 제도 · 성전 제도 등 모든 제도가 없어졌음 에도 이스라엘이 오늘날까지 존속할 수 있는 것은, 이때 율법 중심의 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율법 은 모세 오경,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규범들을 가르 킨다. 이 규범들은 바빌론 유배 이전의 것들이 많았던 까닭에 유배 이후 시대에 새롭게 적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레위인들이 옛 규범들을 시대에 맞게 풀이하였다 (느헤 9장). 이렇게 해서 미드라쉬(מִדְרָשׁ)가 생겨났다. 율법 체제가 확립됨과 동시에 예언자들이 차츰 사라진 것도 이 시대의 특징이다. [초기 유대교 분파의 기원과 발달(기원전 332~63)] 기원전 5~4세기에 대의회 현자들은 페르시아의 지배 밑에서 독자적으로 유대인들의 공동체를 이끌어갔다. 그러나 유다 지역을 포함한 지중해 연안과 페르시아 등 고대 근동 전 지역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마케도니아의 왕인 알렉산데르(기원전 356~323)가 그리스 군대를 이끌고 동방 원정을 시도하여, 기원전 332년 유다 땅을 포함한 지중해 연안과 페르시아 지역이 모두 그리스 제국의 치하에 들어갔다. 십여 년 후 알렉산데르가 갑자기 죽자 그의 부하 장군들은 그리스 제국을 이집트의 프톨레메우스 왕조와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유다 땅은 기원전 300~200년대는 프톨레메우스 왕 국의 통제를 받았으나,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국의 세 력이 팽창되자 기원전 198년부터는 시리아의 통치를 받았다. 이 시기에 많은 그리스인들이 시리아의 여러 도시로 이주해 왔으며, 도시에 그리스 군대가 상주하였고 그리 스 문화는 급속히 퍼져 나갔다. 그리스어는 국제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큰 도시에 그리스인들을 위한 학교가 설 립되었으며 지방의 부호들은 자신의 아들들을 이곳에 보내 고등 교육과 국제어를 배우게 하였다. 유다 지역에서 도 많은 유대인들이 자기 아들들을 그리스 학교에 보내 그리스 문화에 익숙하게 하였다. 자식의 이름도 그리스 어로 짓는 일은 흔했다. 예루살렘에도 이러한 학교가 세 워졌으며 유대인 사회의 상류층 사람들이 자신의 아들들을 이곳에 보냈다. 가장 큰 문제는 아들들이 그리스 학교를 다니기에 자연히 그리스 문화에 친숙하게 되었고, 그 결과 유대교 전통 문화를 멀리하며 심지어 유대교 종교 의례를 지키지 않는 사례가 빈번히 생겼다. 유대인 사회의 지도자는 대사제와 대의회의 의장이었다. 사제층이 대중을 통괄했으며 대사제직의 임명권은 점령국에 있었다. 기원전 201년 시리아의 왕 안티오쿠 스 3세(기원전 223~187)는 유대인들에게 모세 오경에 따른 율법을 지키라고 허락하였다. 그러나, 안티오쿠스 4 세(기원전 175~164)가 왕위를 계승하자, 그는 자기 자신에게 신성(神性)이 있음을 믿었으며 그의 부하들은 그를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顯現)라고 경배하였다. 그는 자신의 상(像)을 신전에 세우고 모든 민족이 절하게 했으며, 예루살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안티오쿠스 4세는 그리스 문화의 영향에 반대하던 대사제 오니아스를 폐하고, 그의 동생으로 그리스 찬양자인 야손(기원전 175~ 172)을 대사제로 임명했다. 이 결정에 불만을 품은 사제 들은 안티오쿠스에게서 대사제직을 얻기 위해 왕에게 뇌 물을 바쳤으며, 왕은 뇌물을 잘 바쳤던 사람들 가운데 사제 출신도 아닌 메넬라우스(기원전 172~162)에게 대사제 직을 넘겨 주었다. 기원전 169년 안티오쿠스는 안식일 과 유대인 명절을 지키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성전에 그 리스 최고신인 제우스 신상을 세웠으며, 부정(不淨)한 동물을 제물로 바치게 하고 유대인들의 종교 문헌을 불태워 버렸다. 이에 대사제였던 요하난의 아들 마따디아 (+기원전 167/166)는 아들들과 함께 모데인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수천명이 이에 동조하였다. 이것이 '마카베오 가 독립 전쟁' 이었다. 유대교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모인 그들을 하시딤(Hasidim) 즉 '경건자들' 이라고 불렀으 며, 마따디아가 전사한 후 그의 아들 유다(기원전 165~ 160)가 반란군을 지휘했다. 유다 마카베오는 기원전 164 년 12월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그리스인들의 신상을 제거했으며 성전을 정결히 하고 유대교 관습에 따른 제사를 거행했다. 유다가 죽고 그의 동생 요나단(기원전 160~143)이 기원전 152년에 유다 땅의 독립을 선포하고 통치권과 대사제직을 계승하였다. 그로 인해, 독립 전쟁 에 참여하였던 하시딤이 양분되었다. 요나단을 지지하던 경건자들은 바리사이파를 만들었고, 그를 반대하던 이들 은 에세네파를 만들었다. 17년 후 그가 살해당하자 형제 인 시므온(기원전 143~134)이 뒤를 이었다. 10년 후 시 므온이 죽으면서 통치권과 대사제권은 시므온의 자식들 에게 계승되었으며, 그들의 집안이 하스모네 왕가(기원 전 142~63)를 이루었다(마카베오서 상하 참조). 기원전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자 유다 땅은 로마의 통치 아래 들어갔으며, 하스모네 왕가는 끝났다. 대사제가 시민 통치권을 겸했던 유대인 사회에서 비리와 반목은 심각했으며, 초기 유대교 형성 시기에 현자들 은 반대파들이 차례로 숙청되는 여러 참변을 겪었다. 이 러한 새로운 환경에서 유대교의 전통을 바르게 지키기 위해 모세 오경, 즉 토라(תּוֹרָה)이 율법 해석이 필요했다. 이 무렵 유대인 사회에 민중의 고난을 토로하고 전통 의 고수를 주장하는 지식층이 생겼다. 이들은 토라를 상 세히 공부하여 토라에서 인용구를 찾아 일상 생활에 적용 하고 토라에 의거한 해석 방법을 개발한 율법 학자(Rabbi)들이다. 그들은 기원전 5세기 말 120명의 현자들이 세운 대의회의 전통을 계승했다고 자처하며, 토라의 바 른 해석과 응용을 연구하였다. 이들은 선생과 제자들의 관계를 돈독히 하여 그 전승을 전수하였다. 또한 토라를 배우는 학교를 건립하고 제자들을 길러 학문을 계승시켰 다. 그 결과 훌륭한 랍비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그들의 강론과 법도(法道)가 결국 유대교의 지주(支柱)가 되었 다. 기원전 1세기 말에 활동한 랍비 샴마이(Shammai haZaken, 기원전 50~서기 30)와 힐렐(Hillel)은 유대교의 정 통성을 세우기 위해 오랫동안 논박했던 두 학파의 선생 들이었다. 초기 유대교 당시 랍비들은 여러 학파로 나누어졌지만 그들은 사제층과 권력층에 대항하여 토라에 근 거한 해석을 주저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들이 신약성 서에 등장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F. Josephus, 371 38?~100?)의 기술에 의하면 유다 지역의 초기 유대교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발전된 분파는 에세네파와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였다. 추종자들의 수는 바리사이파 6,000명 · 에세네파 4,000명 · 사두가이 파 2,000명이었다고 전한다. 바이사이파는 경건한 평신도들로서 구약성서와 조상들이 구전으로 전해 준 전통도 존중했다. 이들은 성서와 구전의 계율을 다 지켰다. 또한, 섭리, 천사, 내세에서의 보상,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었다. 반면, 에세네파는 사악한 제관들이 있는 예루살렘 성전은 더렵혀졌다고 보았다. 그들은 사막에 살면서,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 사이에 종말 전쟁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쿰란에 머물렀던 이들은 정결법을 충실히 준수했고, 독신 생활을 하였다. 사두가이파는 독자적인 문헌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 특징을 다른 문헌을 통해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고위급 사제와 대지주들, 귀족들이 속한 사두 가이파는 부활을 믿지 않고, 오직 모세 오경에 기록된 내 용을 지키며 기록된 것 이상은 첨부하지도 해석하지도 않았다. 사두가이파들은 주로 사제층과 그들의 친인척 관계로 형성되었으며, 기득권층으로서 항상 외부의 지배 층(그리스 왕조나 로마 정권)과 항상 상호 도모했다. 이 시기에 팔레스티나에 살던 유대인들은 50~ 70만 명 정도였고, 시리아 · 소아시아 · 메소포타미아 · 이집트 에 살던 유대인들은 200~500만 명 정도였다. 이는 유대인의 수가 기원전 5~4세기에 비해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 그것은 이방인들을 많이 입교시켰기 때문이다. 예로, 기원전 130년 요한 히르카누스 1세(기원전 134~104) 와 103년 유다 아리스토불루스 1세(기원전 104~103)가 팔레스티나 남부 지역의 이두매아인들과 북부 지역의 이 두레아인들을 강제로 개종시켰기 때문이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이민 가서 살던 유대인들은 기 원전 3세기에 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했다. 이 역문을 《칠십인역》(Septuaginta)이라고 한다. 알렉산드리아 유대 공동체에서 배출한 가장 뛰어난 학자는 필로(기원전 20?~서기 50)이다. 그는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 철학과 유대교 신앙 사이의 융화를 시도하여 많은 저술을 남 겼다. 또한, 묵시 문학 작품들도 이 시기에 많이 쓰여졌다. 〔로마 시대(기원전 63~서기 135)] 이 시기의 유대교 는 종말론에 입각한 생활을 주장하는 에세네파와 적극적 인 사회 참여를 주장하는 바리사이파, 로마 정권과 연결 된 사두가이파, 그리고 서기 1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로마 정권에 무력으로 대항하여 메시아의 시대를 이루자 는 젤롯 당원, 예수를 그리스도로 확신하고 정치와는 상 관없이 예수를 따르는 '예수파' 등 여러 분파로 나뉘어 서로 배척하며 질시하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종교적으로도 정통과 개혁, 반란 등 서로 상반되는 입장 을 취하는 논쟁의 시기였다. 에세네파 사람들은 로마의 우상 숭배 강요에 반발하였 으며 끝내 로마 황제 네로(54~68)의 폭정에 항거하여 일 어난 과격파 유대인들의 반란에 합세하였다. 그리고, '어둠의 자식들' 이 바로 로마군이라고 선포하고, 로마군 에 무력으로 대항하여 제1차 유대 독립 전쟁(66~70)에 합류했다. 이 반란으로 로마군은 유대를 완전히 점령하고 예루살렘은 70년에 함락되고 로마군은 예루살렘 성 전 등 많은 건물을 허물어 버렸다. 이 항쟁에 참여했던 모든 반란군은 처형당했으며 더욱이 예루살렘에 살던 모 든 유대인들은 추방당했다. 이때 유대인 사제들은 다른 도시로 이주하였다. 로마 군대가 제1차 유대 독립 전쟁 을 진압하고 그 항쟁에 동조했던 에세네파의 근거지를 소탕하여 에세네파 사람들은 흩어지게 되었으며 공동체의 핵심부가 와해되었다. 한편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 항 쟁군에 동조하지 않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거주지를 예루살렘에서 야브네(Jabneh, Jamnia)로 옮겨 항쟁군과 결 별하여 로마의 진압 정책에서 피할 수 있었다. 초대 교회 는 이방 선교에 전력을 다하여 유대교에서 점차 멀어지 게 되었으며 결국 그리스도교라는 독립된 종교로 발전되 었다. 한편 야브네로 거주지를 옮긴 바리사이파들은 율 법 중심의 유대교를 재건하였다. 이때 요하난 벤 자카이(Johanan ben Zakkai, ?~?)는 90년 대 초반까지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을 거느리고 야브네 에서 유대교를 재건하였다. 그는 야브네에 율법 학당 (Bet Midrash)을 개설하여, 유대교의 관습을 지킬 수 있게 하는 법도를 체계화하였다. 그 결과 야브네는 유대교의 중심지로 발전되었다. 그의 후임자인 가믈리엘 2세(Rabban Gamliel Jabneh, 1세기 후반~2세기 초)는 최고 의회를 설립하여 유대교 최고 의결 기관으로 삼았다. 그런가 하 면, 회당에서의 예배 때마다 바치는 '18조 기도문' (שמונה עשרה) 중, 이단자를 단죄하는 제12조 기도문에 나자렛 사람들, 즉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덧붙였다. 그 결과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회당 예배에 더 이상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132년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117~138)의 강압 정책 에 반발한 강경파 유대인들은 제2차 유대 독립 전쟁 (132~135)을 일으켰다. 바르 코크바(Bar Kokhba, ?~135)를 중심으로 일어난 이 전쟁은 유대인들에게 커다란 불안을 야기시켰으며, 결국 독립 전쟁이 일어난 지 3년 만에 로 마군에 의해 진압되고 반란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처형되 었다. 이 당시 유명한 율법학자 아키바 벤 요셉(Akivaben Joseph, 50?~135)은 유대인들에게 자주 독립의 희망을 심 어 주었으며, 많은 법도와 규례 · 규범을 세웠다. 그리고, 100여 년 후에 편집된 미쉬나의 근간을 만들었다. 그는 유대인 반란을 공모한 혐의로 로마 군대에 의해 처형당했다. 로마 황제는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로마의 도시로 새롭게 건설하고, 유대인은 예루살렘에 절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이때 야브네는 위태 로워졌고 랍비들의 성서 공부 중심지를 갈릴레아 지방으 로 옮겨갔다.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지고 모든 종 교적 전례를 지켜야 할 전당(殿堂)이 없어진 상황에서 성서 공부는 심화되었고, 성서 공부가 결국 성전에 드리는 희생 제물을 대신한다는 해석으로 성서 공부가 종교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랍비니즘 시대(1~18세기) 탄나임 시대 : 서기 기원 전후에 활약한 힐렐과 샴마이 때부터 200년경 미쉬 나 편찬 때까지를 탄나임 시대라고 한다. 제2차 유대 독립 전쟁에 이어서 일어난 유대교 박해가 가라앉자, 140 년경 율법 학자들은 갈릴래아의 우샤(Usha)에 모여 최고 의회를 재건하고, 가믈리엘 2세의 아들인 시메온(Rabban Simeon)을 수장(Nasi)으로 뽑았다. 2세기 후반 아버지인 시메온의 뒤를 이어 유대교 수장이 된 유다 하 나시(Judah ha-Nasi, 135?~217?)는, 우샤에서 베트세아림(Bet She'arim) 으로 옮겨 생활하였고, 다시 세포리스(Sepphoris)로 옮겨 생활하였다. 또, 그를 따라 최고 의회도 옮겨 갔다. 그는 200년경 우샤에서 유대교 최초의 성문법인 미쉬나(נָה מִשְׁ)를 편찬하였다. 이 책에서는 유대교의 구체적인 종교 관례를 제정하고, 시민법과 생활 규범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빠진 전승들을 모아 율법집을 펴냈는데, 그것이 토세프타이다. 또한, 이 시기에는 모세 오경 주석서들인 미드라쉬도 편찬되었다. 초기의 작품들은 200년경 편집되었으며 레 위기 미드라쉬 시프라(Sifa), 출애굽기 미드라쉬 메킬타 (Mekhilta), 민수기와 신명기 미드라쉬 시프레(Sife) 등이 있다. 창세기 미드라쉬의 편집 연대는 5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아모라임 시대 : 유대교의 기본 강령인 미쉬나의 편찬과 동시에 그 율법집을 풀이하는 아모라임 (해석자들) 시 대가 시작되었다. 아모라임의 율법 해석을 집대성한 문헌이 탈무드인데,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우선 팔레스티나 탈무드, 일명 예루살렘 탈무드이다. 이는 팔레스티나에 있는 가이사리아 학파와 세포리스 학파의 해석을 모아, 5세기 초에 편찬한 것으로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쓰여졌다. 그리고, 바빌론 탈무드는 메소포타미아에 이민 가서 살던 유대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주로 네하르데아, 품베디타, 수라 학파의 해석을 모아 7세기 초에 편찬되었다. 게오님 시대 : 이슬람이 지배하던 지중해 지역에서 640~1038년까지 바빌론 학파가 활동하던 시대를 게오님(尊者들) 시대라고 한다. 바빌론 학파에 의해 바빌론 탈무드는 모든 유대 공동체에 통 용되는 보편적인 율법집이 되었다. 하지만, 이를 반대하던 이들도 있었다. 8세기에 아난 벤 다윗이 일으킨 카라 이트 운동이 대표적이다. 이 운동은 성서 중심주의에 따르면 율법 학자들의 율법은 인위적 계율이며, 메시아의 구원을 재촉하고자 팔레스티나로 돌아가야 하며, 성서를 재검토하여 율법과 교리의 진수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9세기에 카라이트 운동은 팔레스티나뿐만 아니라 북아프리카와 스페인의 유대 공동체까지 전파되었다. 중세 유럽의 유대교(950~1750) : 이 시기의 유대교는 그리스도교가 우세였던 프랑스와 독일에 정착한 아슈케 나지와 이슬람이 지배적인 남부 스페인에 정착한 세드라 펌으로 양분된다. 세드라핌은 이슬람의 정치 · 경제 · 문 화 · 사회에 융화되어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매우 폭 넓은 저술을 남겼다. 대표적인 인물은 마이모니데스(Maimonides, 1135~1204)이며,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따라 유대 교를 이해하면서 율법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 하지만 1492년 스페인에서, 그리고 1497년과 1506년 포르투 갈에서 유대인이 추방됨으로써 이 지역의 유대교는 붕괴되었다. 반면, 아슈케나지는 도시 중심부에 모여 살면서 상업에 종사하였다. 그들은 상거래가 아니면 그리스도인들과 상종하지 않고 게토 안에서 자신들의 방식으로 생활하였다. 제2차 십자군 (1147~1149) 이후 독일에서는 유대교 신비주의자들(Hasidism)이 많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고 행 · 순교 · 속죄 행위 등을 강조했다. 대표적인 인물은 솔로몬 벤 이사악으로서 그의 성서 주석과 바빌론 탈무 드 주석은 널리 인정을 받아 바빌론 탈무드 모든 판본에 함께 수록되었다. 13세기에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에서 카발라 (Kabbala)라는 신비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카발라는 '전승' 또는 '전통' 이라는 뜻이며, 초기 유대교에서는 랍비 유대교의 모든 전승 체계를 의미했다. 그러나, 점차 전승 가운데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교리를 특별히 카발라로 칭하여, 카발라 신비주의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오직 카발라 상징 세계의 신비를 터득한 사람만이 토라의 진실되 고 더 깊은 내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모세나 심지어 아담에게 계시된 하느님의 토라의 뜻을 깨닫게 하는 체계이고, 다른 이름으로 '숨겨진 지혜' 라고도 불렀다. 1280년경 스페인의 유대인 학자 시몬 데 레옹이 카발라의 전통을 편집하여 《조하르》(Zohar, 광채, 빛남)라는 책을 편찬했다. 카발라 유대교 신비주의자들에게 이 책은 히브리 성서, 탈무드와 함께 3대 경전이었 다. 《조하르》는 그노시스주의(Ginoticismus)와 신플라톤 주의(Neo-Platonism)의 영향을 많이 받은 책이다. 16세기에 카발라 신비주의자들은 티베리아 인근의 제 파트(Zefat)를 자신들의 성지로 만들었다. 이들중 대표적인 인물은 루리아(Issac Luria, 1531~1573)인데, 그는 이스라엘이 겪는 여러 가지 환난은 신성(神性)의 생기가 억 눌린 탓이라며 신성의 생기를 해방하는 신비 신학을 부르짖었다. 이 카발라 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샵베 타이 즈비(Shabbetai Zevi, 1626~1676)의 출현이었다. 그는 1665년 4월 카발라 신비주의자인 나단 벤 엘리사(Nathan ben Elisha)를 만난 후, 메시아로 행세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2월 터키 왕국에 붙잡힌 후 이슬람으로 개종 하였으며, 비교적 자유롭게 생활하였다. 그러나 카발라 메시아주의와 이슬람 이중 신앙 생활을 한다는 죄목과 방종한 성 생활을 한다는 죄목으로 유배되었다. 그의 등장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삽베타이주의는 신비주의와 메시아주의의 허구성이 분명히 드러난 사건이었다. [현대 유대교(1750~현재)] 18세기에 독일의 유대인들 중에서 은행가와 공장주 등으로 성공한 이들이 등장하면서 주변 사회와 잦은 접촉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멘델스존(M. Mendelssohn, 1729~1786) 같은 계몽 철학자가 나타났다. 그는 유대교 신앙과 계몽 사상의 융합을 시도하였다. 18~19세기에 독일에서는 유대교를 당시 사회와 사조에 적응시키려는 개혁 운동이 계속되었다. 1840 년대에 이르러 독일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여 미국 유대교 개혁자들과 뭉치면서, 1880년 미국 유대교 200 개 회당 거의 전부가 개혁 유대교가 되었다. 하지만, 서유럽의 유대인들 대다수는 조상 전래의 유대교를 열심히 지키면서, 문화적으로는 현대 사회에 적응하는 신보수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동유럽에서는 18 세기에 하시디즘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카발라 운동을 대중에게 확산시킨 것으로, 카리스마적 지도자 (rebbe)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처음에는 지도자가 민주적으로 선출되었으나 후에는 세습되었다. 19세기부터 시온주의(Sionismus) 운동이 일어났다.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 작가인 헤르출(T. Herzl, 1860~ 1904)이 팔레스티나에 유대인들의 국가를 세운다는 기치 아래 시작되었다. 1930년대와 1940년대 초에 유럽의 유대인들이 히틀러의 박해를 피해 대거 팔레스티나로 이 주함으로써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독립이 선포된 이후, 주변 아랍국들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다. II . 종교 체계 유대교에서는 믿음의 중요한 요점이 모두 포함된 어떤 신경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들 믿음은 토라와 예언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 사건과 역사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 초월적인 하느님에 근거하고 있다. 종교적인 믿음과 실천은 오직 하느님의 법을 따르는 삶과 같다고 여긴다. 그리고, 윤리적인 반성과 실천은 정확한 교의적인 형식 =과 선서보다 좀 더 중요하게 여긴다. 공식적인 의례로는 출애급 시기부터 서기 70년까지 중요한 행위로 여겨졌 던 제사, 기도와 성서 독서와 묵상, 안식일과 축제의 준 =수 등이 있다. [토 라] 유대교의 종교 체계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총 체적으로 보여 주는 "토라" (תּוֹרָה)에 있으며, 이것이 유 대교의 중심체이다. "토라" 를 한글역 성서에서는 흔히 "율법" 이라고 번역한다. 이는 "토라" 를 "법" 이라는 의미 로 70인역 성서에서 노모스' (νόμος)로, 라틴어역 성서에서 '렉스' (lex)로 번역한 사례를 따른 것이다. 초기 유 대교 전승에 의하면 토라는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 님으로부터 받은 모세 오경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으며, "하느님의 가르침" 혹은 "하느님의 계시"를 뜻하는 경우 도 흔하다. 또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지켜야 하는 법 규" . "규범" · "도리" 등을 뜻하기도 한다. 하지만 토라 는 법 조항' 뿐만 아니라 사회 규범과 종교 관습 등을 통괄하는 총칭으로,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가 르침(계시)이다. 따라서 토라를 율법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한정적이며, 히브리어 고유 명사 "토라"로 명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초기 유대교 문헌에서 토라를 인 격화하여 설명하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듯이, 유대인들의 관념에 토라는 고유 명사이다. 토라는 하느님의 계시이며, 유대교의 교리이다. 토라 는 배우고 가르치며 행하는 것이다. 유대교에서는 토라 에서 구원의 근거를 추구하며, 토라를 가르치는 선생, 즉 랍비들이 구원의 길을 열어 주는 역할을 한다. 랍비 유대 교에서는 토라를 암기하고 전통적인 토라의 해석을 배우고 반복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한다. 따라서 토라를 가르치는 선생을 구원의 길잡이라고 일컫는다. 또한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받은 토라뿐 아니라 랍비들이 가르치는 토라의 해석도 하느님의 계시로 받아들이는 것이 랍비 유대교의 특징이다. 따라서 랍비의 가르침은 토라의 범주에 속하게 되며, 토라의 인용구와 함께 이러한 가르침은 권위가 있다. [성서와 경전] 유대교에서 성서는 마소라 본문(Masoretic Text)을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모세 오경과 예 언서, 성문서 등을 포함하여 총 2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대교의 성서 분류 방법은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와 차이가 있다. 하지만 성서는 삶을 위한 기본적인 교훈과 기준을 담고 있다고 여긴다. 4~5세기에 만들어진 팔레스티나 탈무드와 바빌론 탈 무드가 큰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인정한다. 또한 구전법이 모아져 편집된 미쉬나와 이에 대한 율법 학자들의 주석이 편집된 게마라(Gemara), 성서에 대한 주석과 해설 이 모아진 미드라쉬 역시 유대교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회당과 예배] 회당 예배의 핵심적인 요소는 공적으로 성서를 읽는 것이다. 이 예식은 안식일과 축일의 아침 예 배 때와 월요일과 목요일의 아침과 안식일 오후에 거행 된다. 오경 낭독은 1년 주기의 계획표에 따라 이루어진다. 즉, 유대인들은 가을 축제 다음 안식일부터 창세기 1 장 1절을 읽기 시작하여 1년 동안 오경을 1번 통독한다. 축제일과 금식일에 읽는 본문은 각 상황에 맞는 것으로 되어 있다. 더욱이 이런 날에는 예언서들에서 발췌된 본 문들이 같이 낭독된다. 이는 공적인 예배 중에 진행되며, 특히 이 예식은 오경 두루마리를 회당 전면에 있는 성궤 (Aron ha-Kodesch)에서 꺼내어 낭독대로 가지고 가서 낭 독자가 그 날에 해당되는 본문을 낭독하는 방식으로 행 해진다. 회당 예배시에 읽는 이 본문은 안식일에는 일곱 부분으로, 주간 아침 예배시에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 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이런 각 부분들의 낭독이 시작되고 끝날 때마다 토라의 수여자인 하느님을 찬양하는 기도문을 암송한다. 회당 예배의 순서는, 예비 기도와 축원, 시편과 성서 기도문의 암송, "쉐마" (שְׁמַע)와 이에 동반되는 축복, 18 조 기도문, 죄의 고백과 앞으로의 일주일에 대한 기도, 성서 낭독, 폐회 절차 등으로 진행된다. 이와 같은 일반 적인 순서는 모든 유대 사회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지만, 세부 사항은 시대 · 지역 · 문화적 배경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적어도 10명 이상의 남자들이 참석해야 하는 공적 예배는 일반적으로 회당장이나 선창자가 주례한다. 하지만, 회당 예배를 집전할 수 있는 지식을 지닌 유대인 남자라면 누구나 주례할 수 있다. 성직자는 희생 제사 시대와 성전 시기에 중요한 종교 지도자였다. 하지만, 본래 적인 의미의 선생은 율법 학자들이다. 오늘날 이들이 기도 주재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회당은 공동체 경배의 장소이다. 회당 내부는 매우 아 름답게 장식되기도 하지만, 아주 단순한 구조를 갖고 있 다. 회당 안에 비치된 비품들로는 오경 두루마리를 보관 하는 성궤,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이 서는 곳으로 성궤를 마주 보는 곳에 위치하는 기도단, 토라가 읽혀지는 장소 로 회당의 중앙에 있는 강단뿐이다. 두루마리들은 지 역 · 문화적인 배경에 따라 여러 형태로 보관되었다. 유 럽에서는 두루마리들이 천에 싸여져 보관된 반면, 북아 프리카와 근동 지방에서는 나무나 금속으로 만든 상자 안에 보관된다. 또한, 두루마리의 양쪽 막대기 위 부분에 는 종종 탑 모양이나 왕관 모양의 은 장식이 뭍어 있기도 하며, 두루마리의 몸체와 손잡이에도 이런 장식이 붙어 있기도 한다. [개인 관련 예식과 축제] 유대인의 삶에서 중요한 일들 은 계명의 규정에 따라 이루어진다. 남자 아이는 태어난 지 8일째 되는 날 할례를 받으며, 이때 이름을 받는다. 여자 아이는 일반적으로 태어난 날부터 이어 오는 첫 번 째 안식일에 회당에서 이름을 받는다. 남자 아이는 13세, 여자 아이는 12세가 될 때, 종교적 성년에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예식이 거행된다. 이를 '바르 미츠바' (Bar Mitzvah) 또는 '바트 미츠바' (Bat Mitzvah)라고 하는데, 이를 통해 계명을 지킬 책임과 의무를 지게 된다. 결혼식은 과 거에 두 가지 예식으로 각각 다른 해에 거행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동시에 거행되어 약혼 예식으로 시작되는데, 결혼 언약문 낭독 선언과 함께 반지를 약혼자에게 끼워 준다. 이어서 일곱 개의 결혼 축하 기도문으로 이루어진 혼인 예식이 행해지는데, 이 예식은 신부의 침실을 상징하는 장막에서 거행된다. 한편, 장례식은 매우 간단하게 거행된다. 시신에는 간 단한 수의만 입혀지며, 매장은 임종 후 가장 빠른 시간 내에 행하여진다. 또한, 매장시 관을 사용하지 않는다. 안식일과 축제는 해가 저물 때 시작되어 다음날 해질 무렵까지 계속된다. 대표적인 축제로는 이집트에서의 탈 출을 기념하며 7일 간 이어지는 과월절(Pesach), , 이 축제 50일 후에 거행되며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계명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오순절(Shavuoth), 가을 추수를 기념하며 야훼 하느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신 것을 기념하는 초막절(Sukkoth)이 있다. 기원전 164년 유다 마카베오에 의해 예루살렘에 우상 을 부수고 새 제대가 봉헌된 것을 기념하는 제단 봉헌 축 제(Hanukkah)와 에스더 왕비의 노력으로 페르시아 제국 에서 유대인들이 박해를 피할 수 있었음을 기념하는 부 림절(Purim), 유대인 달력으로 새해(9~10월) 첫날에 거 행되는 신년제(Rosh Hashana)가 있으며, 이 신년제 후에 10일 동안의 대축제일(Yom Kippur) 축제가 이어진다. 그 리고 과월절 축제 후 주간에 기념되는 민족 말살 기념일 (Yom Hashoah, Holocaust Memorial Day)이 있다. Ⅲ . 유대교 입장에서 본 그리스도교
[초기 유대교와 초대 교회] 오늘날의 유대교는 미쉬나 와 탈무드를 만들어 종교의 체계를 세운 랍비 유대교 (Rabbinic Judaism)에서 발전된 종교 체계이다. 흔히 그리 스도교가 이러한 유대교에서 분리되어 나온 것으로 여기 고, 유대교가 그리스도교의 모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초대 교회와 랍비 유대교는 여러 유대교의 울타리에서 서로 각자의 길을 걸었던 종교 체계이다. 초대 교회와 랍비 유대교는 서로가 독특한 방식으로 발전되었으며, 랍비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문헌 에서 그들이 추구했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초기 랍비 유대교는 토라가 생활의 중심이었다. 토라의 가르침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신앙 생활의 기본이 었다. 서기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재건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토라가 신앙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은 타당하지만, 실상 70년 이전에 토라 중심의 신앙 생활이 랍비 유대교에서 이미 이루어졌다. 예루살렘 성전 패망 이전에 활동했던 율법 학자들도 한결같이 토라를 공부하 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토라 공부를 하는 율법 학당은 신앙 생활의 중심이었다. 《선조들 의 어록》(פרקי אבות)에는 2~3명이 모여 토라에 대하 여 말하지 않으면, 내세에 한몫을 차지하지 못한다고 전 한다. 회당은 예배를 드리는 장소이며 예배는 성인 남자 10명 이상이 모여야 진행할 수 있다. 한편 초대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공동체 이스라엘의 주(主)이 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의 길을 갈 수 있다는 신 앙을 가르치고 배운다. 이러한 초대 교회 공동체는 2~3 명이 모여 함께 기도하는 곳이 바로 예배의 장소이다. 초대 교회 문헌에서는 그리스도가 토라와 상응되는 단어라고 설명한다. 이 대화의 길을 제시한 강론이 요한 복 음서의 시작 부분에 나온다. "맨 처음 말씀이 계셨다.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니 ··· 그분은 맨 처음에 하느 님과 함께 계셨다 ··· 어둠 속에 비치고 있지만 어둠 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말씀이) 참된 빛이셨으니 그 빛이 세상에 오시어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1, 19). 하느님의 말씀(토라)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연결시 키려는 논점이다. 빛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랍비 유대 교에서도 이와 같은 세상 처음의 빛을 메시아라고 해석 한다. 이러한 빛이 메시아라고 해석하는 단락이 창세기 미드라쉬(1, 1)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빛은 그 분과 함께 머문다' (다니 2, 22)라는 것은 의로운 자들의 행위를 말한다. 이렇게 쓰여 있다. '빛은 의로운 자를 위 해 비친다' (시편 97, 11). 세루가야 출신의 랍비 아바는 말했다. '빛이 그분과 함께 머문다' 라는 것은 왕가(王 家)의 메시아를 가리킨다. 랍비 이스학은 아래 구절로 (그의 강론을) 시작했다. '당신 말씀의 처음은 진리입니다. 당신의 의로운 모든 공의는 영원합니다' (시편 119, 160). 랍비 이스학은 말했다. 세상의 창조 바로 그 시작부터 '당신 말씀의 처음은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들어 내셨다'. 이러한 랍비들의 창세기 1장 1절에 관한 성서 해석에 서 볼 수 있듯이 요한 복음서의 1장 1-9절은 초대 교회 의 신앙 고백을 랍비들의 성서 해석과 조화시키려는 노 력이다. 다윗 왕가의 메시아로 빛이 그분과 함께 머문 다' 는 주제는 요한 복음서에서 '그가 바로 진리의 빛이다' (1, 9)라는 해석이다. 창조와 함께 진리의 빛이 하느 님과 함께 머물면서 세상을 비추고 있으며, 그 빛이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한편 랍비 유대교에서는 그 메시아가 내세에 오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러한 기본적인 신앙 고백의 차이를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에서 볼 수 있다. [유대교의 예수관] 야브네 시대(70~135) 이후 유대인 들은 예수를 민족 배반자, 종교 배신자로 배척했다. 이런 관점이 계속 유지되다가 19세기 중엽 독일에서 유대교 개혁 운동이 일어나면서 예수와 그리스도인들을 긍정적 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시온주의자로 후에 히브리 대학교 교수가 된 클라우스너(J. Klausner, 1874~ 1958)는 예수를 위대한 윤리 스승이라 했다. 영국에서 유 대교 개혁 운동을 일으키고 시온주의와 발푸르 선언을 반대한 몬티피오리(C.J.G. Montefiore, 1858~1938)는 예수를 새로운 모습의 예언자라고 했다. 독일의 진보적 율법 학자인 베크(L. Baeck, 1873~1956)는 예수를 유대교의 순수하고 선한 요소를 체현한 인물이라고 하였다. 미국의 보수적 율법 학자인 슈타인버그(M. Steinberg, 1903~1950) 는 예수를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매우 아름답고 고귀한 정신이라고 하였다. 또한 비정치적 문화 시온주의를 제창한 부버(M. Buber, 1878~1965)는 예수를 큰 형님이라고 하였다. IV . 가톨릭의 유대교에 대한 입장 가톨릭과 유대교의 불편한 관계는 사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도 바오로는 유대교를 '죽음의 봉사직' (2고 린 3, 7)으로 보았다. 그는 "그분은 우리를 새로운 계약 의 봉사자들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문자의 계약이 아 니라 영의 계약입니다. 실상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2고린 3, 6)라고 하였다. 이러 한 바오로의 입장은 유대교를 통해서는 하느님의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후, 유럽에서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유대교와 유대인에 대한 적대적인 입장이 강해졌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는 성서의 내용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구세주를 알아보지 못한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와 개종 시도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공의회의 결정을 통해서도 교회의 유대교와 유대인에 대한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제2차 니체아 공 의회(787)는 유대인들이 안식일과 유대 관습을 준수하지 않는다면 교회로 받아들일 수 있다(8조)고 규정하였다. 제3차 라테란 공의회(1179)는 유대인과 사라센인에 대한 제재 규정(26조)을 정하였으며, 제4차 라테란 공의회 (1215)는 유대인과는 고리 대금 거래를 하지 말아야 한 다(68조)고 정하였다. 또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과 구별되는 복장을 해야 하고, 성주간 동안에는 외출을 삼 가하도록 했다(69조) 그리고 유대인은 그리스도인보다 높은 공직을 맡을 수 없으며(69조), 그리스도인으로 개 종한 유대인은 자신들이 지켜 오던 관례를 포기해야 한 다(70조)고 하였다. 이런 역대 공의회의 결정들과는 달리 유대교와 유대인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입장을 표현한 것은 제2차 바 티칸 공의회(1962~1965)가 처음이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 공의회는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Nostra Aetate, 1965. 10. 28)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문 4항에 유대교에 대한 교회의 입장이 표명되어 있 다. "그리스도 교회의 믿음과 불림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구세 계획대로 이미 성조들과 모세와 예언자들로부터 시 작되었음을 인정한다. 믿음에 있어서 아브라함의 후손들 인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아브라함과 함께 부르심을 받았고, 선민이 종살이 땅에서 탈출한 역사적 사실은 교회의 구원을 신비롭게 표상하는 것이라고 공언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옛 계약을 맺으신 그 백성을 통하여 교회가 구약의 계시를 이어받았고, 이방인들의 야생 올리브 가지가 접목 된 좋은 올리브 뿌리에서 교회가 자라고 있음을 잊을 수는 없다.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십 자가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화목시키고 당신 안에서 이 둘이 하나가 되게 하셨음을 교회는 믿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초석이요 기둥인 사도들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전파한 초기 제자들 대부분이 유대 백성 중 에서 태어났음을 잊지 않고 있다. 성서가 입증하는 바와 같이 예루살렘은 자기를 찾아 주시는 때를 알지 못하였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더러 오히려 복음의 전파를 방해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도 성 바오로의 말씀대로 그들이 하느님의 은혜와 부르심을 회심 없이 받았으나 조상들 때문에 그 들은 아직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유대인들의 정신적 공동 유산이 이렇듯 큰 것이므로 이 성스러운 교회 회의는 서로의 이해와 서 로의 존경을 증진시키며 권장하는 바이다. 특히 성서와 신학의 연구와 형제적 대화에서 이런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비록 유대인들의 집권층과 그 추종자들이 그리스 도의 죽음을 강요하였지만, 그리스도 수난하실 때에 저 질러진 범죄를 당시에 살고 있던 모든 유대인들에게 차 별 없이 책임지우거나 더구나 오늘의 유대인들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교회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렇 다고 해서 마치 성서상의 귀결인 듯이 유대인들을 하느님한테 버림받고 저주받은 백성으로 표현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교리를 가르치고 하느님의 말씀을 설교할 때에 복음의 진리와 그리스도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을 가르칠까 삼가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누구를 박해하든지 간에 박해라면 무엇이나 다 교회가 배격한다. 교회는 유대인들과의 공동 유산을 상기하며 정신적인 동기에서가 아니라 종교적이요 복음적인 사랑에서 유대인들에게 대한 온갖 미움과 박해와 데모 같은 것을 언제 누가 감행하든지 간에 차별 없이 통탄하는 바이다." 이 선언문은 유대인에 대한 박해와 반유대주의를 반대 하면서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을 이어주는 영적 유대 를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유대교를 종교로 평가하지 않 았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유대인에게 행한 박해에 대 한 후회와 반성 언급이 없었기에 유대인들에게 많은 실 망을 안겨 주었다. [현 교황의 입장]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부 터 가톨릭 교회와 유대교 사이의 대화를 구체적으로 발 전시키고 촉진시키기 위한 방안을 자주 제시하였다. 교 황은 1979년 6월 7일 "현대 세계의 골고타"라고 불리는 아우슈비츠에서 나치 정권에서 희생된 유대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그들을 박해했던 이들의 마음이 변화되길 기 도하였다. 이듬해 11월 17일 마인츠 유대인 공동체에서 의 연설을 통해서는, 교회와 유대교 사이의 대화 범위를 제시하였다. 즉 "첫째로 옛 계약의 민족과 새 계약의 민족들 사이의 만남, 둘째 현대의 그리스도 교회와 모세와 계약을 맺은 민족 사이의 상호 존중, 셋째 세상에서 유일 신에 대한 증거를 해야 하는 신성한 의무와 평화와 정의를 위한 일을 수행"하는 것 등이다. 또한, 1984년 3월 22일에는 "신비로운 성령은 아브라함을 통해 아브라함 안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한 하느님과 이스라엘로부터 시 작한 교회 안에서 우리를 하나로 연결해 준다" 고 말하였 다. 교황은 유대교가 가톨릭 교회와 함께 "정의와 평화를 거슬러 날로 증가하는 위협"에 대항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교황은 1986년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들이 나치 정권으로부터 겪은 아픔에 대해 자주 언급하였다. 이를 통해 교황은 유대인에 대한 유대감을 표명하면서, 그로 인해 서로에게 남긴 상처를 치유하려고 하였다. 그 래서, 20세기는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 대우와 박해로 인하여 죄악으로 가득찬 세기"였다고 평가하였다(1986. 11. 26). 교황으로서는 역사상 최초로 로마에 있는 유대 교회당을 방문(1986. 4. 13)한 요한 바오로 2세는, 유대 민족과 하느님 사이의 계약이 가톨릭 교회에 있어서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아니라고 천명하였다. 그리고 "유대 교는 우리에게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종교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다. 그래서 다른 종교가 아니라 유대교와 관련을 맺게 된다" 고 하였다. 이듬 해 8월 17일 교황은 "유대인 민족 말살(Holocaust)에 대 한 분명한 회상 없이 무관심하게 넘겨서는 안된다. 유대 인들이 지속적으로 겪는 고통은, 특히 유대인과 그리스 도인들이 분리된 상황을 무관심하게 때로는 적의를 갖고 생각하였을 때 가톨릭 교회에도 깊은 슬픔의 이유가 되었다" 고 하였다. 1991년 8월 14일 조국인 폴란드의 바 도비체(Wadowice)를 방문한 교황은, 나치에 의해 죽임을 당한 자신의 유대인 친구를 회상하면서 "폴란드 교황은 조국에서 당신과 함께 살았으므로 그 시대와 밀접한 관 련이 있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가톨릭 교회의 수위권 자인 교황 자신이 유대인이 겪은 아픔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교황 자신도 그 아픔을 겪었음을 표현하였다. 1994년 4월 10일 주바티칸 이스라엘 대사로 임명된 로페스(Aharon Lopez)를 만난 교황은 "교회는 반유대주 의, 인종 차별주의, 종교적 비관용으로 인한 모든 형태의 다툼과 인류의 삶과 권위를 위한 상호 이해와 존중을 증가시키기 위해 이스라엘 국가와 협력한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유대교와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에 반대함을 표명하였다. 1997년 4월 13일에는 "율법과 예언서에 명시되어 있는 거룩한 말 속에서 우리를 하나로 연결시켜 주는 위대한 영적 전승은 우리 모두에게 지속적으로 안전한 지침이 된다. ···우리 모두는 십계명의 증언 자이다. ···그래서 우리는 형제와 약속의 계승자로서 화 해와 상호 용서의 길을 용감하게 걸어가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교황은 과거 교회와 유대교, 그리고 유대인과의 불편했던 관계를 청산하자고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교회와 유대교의 대화 노력] 1971년 설립된 국제 가 톨릭 유대교 연락 위원회(The International Catholic-Jewish Liaison Committee, ILC)는 교황청 유대교 위원회와 국제 유대교 위원회 사이의 공식적인 연결 기구이다. 이를 통 해 상호간의 인식과 존중, 협력과 일치를 도모하고 있다. 이 위원회는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 즉, 선교와 증언(베네치아, 1977) · 종교 교육(마드 리드, 1978) · 종교 자유와 다원주의(레겐스부르크, 1979) · 종교 협력(런던, 1981) · 폭력 시대에서 인간의 고귀함(밀 라노, 1982) · 어린이와 믿음(암스테르담, 1984) · 강론과 교리에 대한 교황청의 공지문(로마, 1985) · 유대인 민족 학 살(프라하, 1990) · 교육과 사회 활동(볼티모어, 1992) · 가 족과 생태학(예루살렘, 1994) · 교육과 유대인 민족 학살 (로마, 1998) · 회개 신학(뉴욕,2001) 등이다. 교황청의 유대교 위원회는 1975년 1월 3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발표된 선언문에 따라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대화를 진행시키기 위한 제안과 지침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대화를 통한 "경험으로부터의 제안" (suggestions from experience)에 따라서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경신례 사이의 전례적인 관계, 성서 본문의 해석, 상호 이해의 증가를 위한 교육, 사회 활동의 연대에 관한 것 등이었다. 1985년 6월 24일 교황청 유대인 위원회는 "가톨릭 교회의 설교와 교리 교육에서 현재의 유대인과 유대교에 대한 지침"을 발표하였다. 이 지침은 유대인과 유대교에 대해 가르치는 과정에서 참고 자료를 제공하려는 의도에서 마련되었다. 이를 통해 교회와 유대교는 "하느님의 계명을 기초로 설립"되었기에, 유대교가 교리 교육에서 제외되어서는 안되며 교육 과정에 조직적으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유대인들이 고대하는 하느님 나라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메시아가 재림해 오실 세상을 준비해야 할 우리의 책임을 받아들이고 사회 정의와 일치를 위하여 일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나아가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에서 기원하였다고 밝히면서 유대교에는 "영적 풍부함"과 "종종 과장되기도 하지만 유일신에 대한 그들의 충실함이 표현하는 지속적인 증거"가 있다고 하였다. 1988년 11월 3일 교황청 정의 평화 평의회에서 발표 한 "교회와 인종 차별-더 나은 형제애 사회를 향하여"라는 문서는 인종 차별 현상에 대한 교회 교도권의 가르 침을 역설하였다. 이 문서에서는 "중세 시대에 종교적 기준을 토대로 사람들을 그리스도인과 유대인, 그리고 미신자로 구분하였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리스도 신앙을 거부하였던 완고한 증인들로 간주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국에서 흔히 엄청난 천대와 비난과 추방의 대상 이" 되었음을 인정하고 있다(2항). 나아가 독일의 나치 정권이 유대인들에게 전대미문의 대량 학살을 자행했음을 언급하면서, "스스로는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단순히 특정한 인종이나 민족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점진적인 멸종의 운명으로 내몰린 수백만의 인명을 살육하는 그러한 범죄에 인류는 그 책임을 져야 한 다"고 하며 유대인에 대한 학살과 박해를 비난한 교황 비오 12세(1939~1958)의 성탄절 메시지를 재차 언급하 였다(7항). 이러한 내용을 통해 가톨릭 교회가 제2차 세 계 대전 중 유대인의 학살에 침묵을 지켰다는 주장에 반 대하였다. 그러나, 교회가 오랜 역사 동안 유대인과 유대교를 배척하였던 과오에 대한 반성 표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2000년 대희년을 준비하면서 교황청 국제 신학 위원 회는 <기억과 화해 · 교회와 과거의 잘못>(Memoria e riconciliazione · La chiesa e le colpe del passato, 1999. 12)이란 문 헌을 발표하였다. 이 문헌에서는 유대교 위원회가 발표 한 '우리는 기억한다. 쇼아 대학살에 대한 성찰' (We Remember : A Reflection on the Shoah, 1998. 3. 16)의 내용을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인과 유대인의 관계를 밝혔다. " '교회와 유대인의 관계는 교회가 그밖의 다른 종교와 맺는 관계와는 다르다. 그러나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관계의 역사는 고통스러운 것이다. ···실제로 지난 2000 여 년 동안 이들의 관계는 꽤 부정적인 것이었다.' 그 동안에 있었던 유대인에 대한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적대 행위나 불신은 가슴 아픈 역사적 사실이며,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깊은 자책의 이유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이셨으며, 동정 마리아와 사도들도 유대인이었다. 교회는 이방인의 야생 올리브 나뭇가지와 접붙여진 참올리브 나무 뿌리에 서 양분을 얻는다(로마 11, 17-24 참조). 유대인은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들이며,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형 들이다.' (중략) '일부 그리스도인의 정신과 마음에 깊 이 박혀 있는 유대인에 대한 편견 때문에 나치의 유대인 박해가 더 쉬웠던 것은 아니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할 것 이다.···그리스도인들은 박해받는 사람들, 특히 박해받 는 유대인들에게 가능한 모든 도움을 주었는가? 물론 목숨을 걸면서까지 유대인 이웃들을 구해주고 도와주었던 그리스도인들도 많았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용기 있는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영적 저항이나 구체적인 행동을 보여 주 지 못한 그리스도인들도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호소하여 '회개의 행위' (테슈 바)를 요구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려는' (로마 12, 2) 노 력을 증대시키는 자극제가 되며, 유대인에게 입힌 상처 에 대한 '도덕적 종교적 기억' 을 간직하게 한다. 이 부분 에서 이미 많은 것이 이루어졌지만, 이를 확인하고 더욱 심화해야 한다." 이 문헌에서는 교회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유대인 과 유대교에 대한 교회의 잘못에 대한 반성을 찾아볼 수 있다. 이에 근거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0년 3 월 12일에 거행한 용서의 날 행사에서 이스라엘 민족에 게 지은 죄에 대한 고백과 기도를 하였다. 이때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계약과 축복의 백성에게 저지른 죄를 인정하자"고 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를 청하면서 교회가 "계약의 백성과 함께 참된 형제애의 길 로 매진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 가믈리 엘 ; 과월절 ; 구약성서 ; 랍비 문학 ; 마카베오가 독립 전쟁 ; 무교절 ; 묵시 문학 ; 미드라쉬 ; 미쉬나 ; 민족 말살 ; 바르 코크바 ; 바리사이파 ; 반유대주의 ; 부림절 ; 부버, 마르틴 ; 사두가이파 ; 산헤드린 ; 삼마이 학파 ; 샵베타이 즈비 ; 시온주의 ; 에세네파 ; 유대인 ; 율법 ; 율법 학자 ; 오순절 ; 요하난 벤 자카이 ; 유다 하 나시 ; 이스라엘 ; 젤롯당 ; 축제 ; 타르굼 ; 탈무드 ; 하시디즘 ; 할례 ; 회당 ; 힐렐 학파) ※ 참고문헌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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