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 왕국

王國

[라]Regnum Iuda · [영]Kingdom of Jud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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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왕국의 왕궁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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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왕국의 왕궁 유적.


고대 이스라엘 분열 왕국 시대의 남쪽 왕국. 유다 지파 를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수도는 예루살렘이었다. [기 원] 사울이 기원전 1010년에 죽은 후, 유다 지파 출신의 다윗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재통합하여 강력 한 왕권을 세웠다. 유능한 전략가이자 정치가였던 다윗은 기원전 1000년경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주변 약 소국들을 정복하면서, 이스라엘을 서부 아시아의 강국으로 만들었다. 다윗의 왕위를 계승한 아들 솔로몬은 예루 살렘 성전과 궁전을 짓고, 고대 근동의 강국들과 국제 교 류를 활발히 하면서 학문과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의 아들 르호보암(기원전 933~916)이 왕위를 계승한 직후, 유다 지파의 북쪽에 있던 열 개의 지파는 왕권에 반기를 들고 독립을 선언하면서 북이스라엘 왕국을 세웠 다(기원전 933). 다윗이 세운 통일 왕국이 남북으로 분열되었던 것이다. 북쪽 지파들이 왕권에 불만을 품고 반기를 든 직접적인 이유는 르호보암 왕의 어리석은 판단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유대 왕국이 세워지게 된 직접적인 요인이기도 하다. 르호보암은 북쪽 지파 대표들이 강제 노역과 과중 한 세금 등 솔로몬의 강압 정책을 유지하지 말 것을 요구하자 신하들과 의논하였다(1열왕 12, 1-19). 이때 원로들 은 백성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유화 정책을 쓸 것을 권 고했지만, 르호보암은 자신과 함께 자란 젊은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더욱 강력한 억압 정책을 채택했다. 자신들의 요구가 묵살되자 북쪽 지파 대표들은 여로보암(기원 전 933~911)을 왕으로 삼고 독립을 선언했다. 르호보암과 함께 남은 지파는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일부뿐이었다. 이들은 다윗 왕조의 전통을 계승했는데, 이것이 유대 왕국의 시작이었다. 왕국 분열의 직접적인 원인은 르호보암의 어리석은 판단이었지만, 분열의 요인은 다윗이 통일 왕국을 세울 때 부터 잠재해 있었다. 우선 역사적으로 다윗은 사울 왕조가 약해지자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나라를 세웠는데(2사 무 2. 1-4), 이때 사울 왕실과 매우 심각한 갈등 관계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2사무 3, 1). 그리고 사울 왕조가 지속할 수 없게 되자, 북쪽 지파의 대표자들은 다윗을 자신 들의 왕으로 추대했다(2사무 5, 1-5). 이것은 다윗이 사울 왕조에 속해 있던 북쪽 지파를 흡수하여 통일 왕국을 세 웠으며, 북쪽 지파는 통일 이후에도 하나의 단위로 뭉쳐 있었음을 의미한다. 북쪽 지파가 다윗 왕조에 불만이 있 을 때 함께 대응했고(2사무 20, 1-2 : 1열왕 11, 26-39), 르호보암이 북쪽 지파로부터 왕으로 추대되기 위하여 세 겜으로 간 것(1열왕 12, 1)은 이에 대한 증거이다. 둘째로, 다윗과 솔로몬 왕국은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정치를 펼쳤는데, 이는 분열의 주요 요인이었다. 즉 유다 지파 지향의 지역 편중 정치는 왕조를 더욱 강화하고 북쪽 지파를 견제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유다 지파의 독주와 북쪽 지파의 봉신화를 야기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북쪽 지파의 반발을 가져왔던 것이다. 셋째로, 신학적 차이이다. 다윗과 솔로몬 왕조는 다윗 계약 신학(2사무 7, 1-16)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왕국 분열 이후 북이 스라엘의 종교 정책과 예언자들의 신학에서 볼 수 있듯 이, 북쪽 지파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시나이 산 계약 신학을 지키고자 했다. 다윗과 솔로몬의 통일 왕국 시대에 도 북쪽 지파는 자신들의 전통적인 신학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분열 요소들은 다윗에 의한 통일 국가 형성이 인위적이었으며, 통일 왕국이 남북의 이질적 인 요소들을 해소하는 데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유대 왕국이 비록 르호보암 왕 때부터 시작되었지만,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이끌어졌던 다윗과 솔로몬 왕국에 뿌리를 두고 있었음을 뜻한다. [일반적 상황] 유대 왕국의 영토는 매우 작았다. 예루 살렘이 있는 베냐민 지파의 일부와 유다 지파가 전부였는데, 북이스라엘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영토의 대부분도 광야 내지는 사막으로 경작할 수 없었는데, 경작할 수 있는 땅은 북이스라엘에 비하여 사분의 일도 안되었다. 인구는 약 30만 명 정도로 북이스라엘의 절반 정도였다. 비록 유대 왕국이 북이스라엘 왕국에 비해 경제적 · 군사 적으로 열세에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다윗과 솔로몬에 의해서 다져진 왕국의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 안정을 이루었다. 그래서 빈번하게 정변이 일어나 왕권이 자주 바뀌는 북이스라엘과는 달리, 유대 왕국은 다윗 왕조 신학 덕분에 혈통을 계승하며 왕조를 이어갔다. 또한, 왕조에 힘이 있을 때는 사해 남부에 있는 에돔 등 주변국들에 대해 종주권을 주장하며 조공을 받았다. 종교적으로는 솔 로몬 왕 때에 세운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야훼 종교 가 지속되었고, 레위 계열의 제사장직과 전통적인 제사 의식이 이어졌다. 하지만 바알 종교 등과의 혼합주의가 심각할 때도 있었다. 유대 왕국은 주요 도시들을 중심으 로 이루어진 국가였는데, 가장 강력한 도시였던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라기스 · 헤브론 · 브엘세바 · 드고아 · 베 들레헴 · 아나도스 · 미스바 등이 있었다. [역 사] 유대 왕국의 역사는 북이스라엘 · 아시리아 · 바빌론 등 주변국들의 흥망 성쇠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문헌적으로는 구약성서의 열왕기와 역대기에 주로 언급되어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유다의 역사를 주변 국들과의 관계에 따라 시기를 구분하고, 구약성서에 나타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분열 왕국 초기의 유대 왕국 : 북쪽 지파가 떨어져 나 간 후 르호보암은 왕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의 힘은 매우 약했다. 그는 자신에게 반역한 북쪽 지파를 굴복시킬 힘이 없었고, 다윗 왕 때에 굴복한 불레셋 · 모 압 · 암몬 등 주변 속국들의 독립을 막을 수도 없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영토에 있는 도시들을 요 새화하면서(2역대 11, 5-12),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과 승산이 없는 지루한 전쟁을 계속했다(1열왕 14, 30). 르 호보암 왕 재임 시기에 유대 왕국의 최대 위기는 아마도 이집트 왕 시삭(Shishak)의 침입일 것이다. 리비아의 귀족이자 이집트 제22 왕조의 설립자였던 시삭은 아시아에 대한 이집트의 영향력을 회복하고자 팔레스티나 지역을 침입했는데, 이때 유대 왕국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과 궁전을 약탈했고, 다른 도시들도 침공했다. 구약성서에는 그가 예루살렘 성전과 궁전만을 약탈한 것으로 간단히 묘사되어 있지만(1열왕 14, 25-28 : 2역대 12, 2-12), 카르나크(Karnak) 신전에 있는 비문에는 남부 유다와 북이스라엘을 포함한 팔레스티나 전 지역을 침략했다고 언급한다. 르호보암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비얌(기원전 915~ 913)이 왕위를 계승했지만, 북이스라엘과의 갈등은 계속 되었다(1열왕 15, 7). 그리고 그의 아들 아사 왕(기원전 912~871) 때에 그 갈등은 매우 심각하여 외세를 끌어들 이는 전쟁을 하게 되었다. 이 전쟁은 북이스라엘의 바아 사 왕(기원전 910~887)이 유대 왕국 북부에 있는 라마를 차지하고 자신의 요새로 만들려고 하였기 때문에 일어났 다(1열왕 15, 16-22). 라마는 예루살렘에서 약 8km 정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바아사의 라마 정복은 아사에게 군사적 · 전략적으로 매우 큰 위협이었다. 그래서 아사는 당시 북이스라엘과 동맹 관계에 있던 아람 왕 벤하닷 1 세에게 선물을 보내어 북이스라엘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자신을 도와주도록 요청했다. 벤하닷 1세가 아사와 동맹 을 맺고 북이스라엘 북부를 공격하자, 바아사는 라마에 서 철수하였다. 아사 왕은 바아사가 라마를 보수하기 위하여 사용했던 건축 자재들을 모아 베냐민 지파 지역에 있던 게바와 미스바를 보수하였다. 이것은 북이스라엘과의 접경 지대에 있던 도시들을 요새화하는 것이었다. 다 른 한편, 아사 왕 때에 구스 사람 제라가 침공한 일이 있었지만,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2역대 14, 9-15). 구약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아사 왕의 업적 중 하나는 그의 종교 개혁이다(1열왕 15, 11-15). 그는 야훼 종교와 가나안 종교의 혼합화 현상을 없애기 위하여 남창 제도 를 없애고 우상들을 타파했으며 예루살렘 성전을 단장했다. 또한 백성들에게 야훼의 법과 계명을 실천하며 살 것을 명령했다(2역대 14, 4). 북이스라엘 오므리 왕조 시대의 유대 왕국 : 분열 왕국 초기의 약 50년 동안 유대 왕국은 북이스라엘과 접경 지 대에서 국지전을 계속했다. 하지만 여호사밧(기원전 870~846)이 왕위에 오르고 북이스라엘에 오므리 왕조가 들어서자 남북 분열로 야기된 갈등은 끝났다. 여호사밧 은 자신의 아들 여호람(기원전 848~841)을 아합의 딸과 결혼시켜 북이스라엘과 동맹을 맺고 평화 관계를 유지했으며(2역대 18, 1), 북이스라엘을 지원하기 위하여 시리 아(2역대 18, 2-34), 모압(2열왕 3, 1-27) 등과의 전쟁에 참여하였다. 북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는 바알 종교를 옹호하였기 때문에, 여호사밧은 예언자들로부터 불의한 자들과 함께 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바알 종교에 빠져들지는 않았다(2역대 19, 2). 그는 선왕이었던 아사의 정책을 지속하여, 야훼 종교의 갱신과 진흥에 힘쓰고 도시들을 요새화하였으며 군사력을 강화시켰다. 이때 유대 왕국의 힘이 강해지자 리브나(2열왕 8, 22) · 불레셋 · 에돔 · 아랍 족 등 주변 민족들을 통제할 수 있었고(2역대 17, 11), 에돔에 수비대를 둘 수 있었다(1열왕 22, 47). 그러나 여호사밧은 솔로몬 때처럼 에시욘게벨에 선단(船 團)을 두고, 오빌 등과 무역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1열왕 22, 48-49).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왕위에 오르자, 여호사밧 때 북이스라엘과 맺었던 결혼 동맹의 부정적인 영향이 유대 왕국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호람은 종교적으로 선왕의 길을 걷지 않고, "아합 왕조가 하던 대로 이스라엘 왕들의 전철을 밟아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게 되었다"(2열왕 8, 18). 아마도 이세벨이 북이스라엘에서 바알 종교를 후원했던 것처럼, 아합의 딸이자 남부 유다 의 왕비였던 아달리야도 유대 왕국에서 종교적인 영향력 을 행사했던 것 같다. 여호람 왕 때에 유대 왕국은 세력이 약화되어 에돔과 리브나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했고, 불레셋과 아랍인들에 의해 예루살렘이 약탈당하기도 했 다(2역대 21, 15-17). 여호람은 백성들로부터 지지를 얻 지 못했는데(2역대 21, 19-20), 아달리야가 그의 아내였고 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형제들과 장군들을 죽인 것이 주요 요인이었던 것 같다(2역대 21, 4). 여호람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하지야(841)가 왕이 되었지만,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은 왕조에 심각한 위기 를 가져왔다. 그는 시리아와의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외 삼촌 요람 왕(852~841)을 문병하러 북이스라엘로 갔다가 예후 혁명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아들의 죽음과 친정인 오므리 왕조의 멸망에 충격을 받은 아달리야는 왕권을 찬탈했다(2열왕 11, 1-3). 그리고 자신의 왕권을 견고히 하기 위하여 왕족을 처형하고 바알 종교를 장려했다. 북이스라엘 예후 왕조 시대의 유대 왕국 : 아달리야가 권력을 잡은지 7년째 되던 해에 사제 여호야다가 반란을 일으켜 자신이 보호하고 있던 유일한 왕자이자 조카로 일곱 살인 요아스(기원전 835~796)를 왕으로 옹립했다. 그리고 아달리야에 의해서 짓밟힌 야훼 종교를 개혁했다. 그러나 여호야다 사제가 죽자 요아스는 남부 유다 고관들의 견해를 반영하면서 바알 종교를 장려하고, 이 를 문제시한 여호야다의 아들 즈가리야 사제를 죽였다(2 역대 24, 20-22). 그는 통치 말기에 시리아군이 예루살렘 을 침공하자 이를 무마하기 위하여 성전과 궁전의 보물 을 시리아에게 준 일이 있었다. 이것은 유다의 정치적 불 안을 야기하였고, 그에게 불만을 품어왔던 여호야다 계 열의 신하들로 하여금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요아스는 결국이 반란으로 인하여 살해되었다. 요아스를 계승한 그의 아들 아마지야(기원전 796~782) 는 자신의 왕권이 확고해지자 부왕을 살해한 자들을 처 형했다. 야훼 종교를 유지하고자 했던 여호야다 계열의 신하들을 죽인 것이다. 또한, 아마지야는 에돔과 전쟁하 여 이긴 후 북이스라엘에게도 전쟁을 걸었다. 그러자 이스라엘 왕 여호아스(기원전 803~787)는 유다를 침략하여 아마지야를 사로잡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여 약탈하고 성벽을 허물었으며 포로들을 잡아갔다. 아마지야의 왕권이 약화되자 반란이 일어났다. 그는 라기스로 도망했으나 그곳에서 반란군에게 잡혀 살해되고 그의 아들 우찌야(기원전 781~740)가 왕으로 옹립되었다. 아자리야로도 불리는 우찌야 왕 때 유다는 안정과 번 영을 누렸다. 그는 농사를 장려하고 군사력을 강화시켰 으며 불레셋, 구르바알, 암몬 등 주변 세력들을 정복했다. 또한, 남방 무역의 중계지인 에시욘게벨을 재건하고 유다에 귀속시켰다(2역대 26, 2). 그러나 그가 나병에 걸려 격리 생활을 하자 그의 아들 요담(기원전 740~735)이 왕권을 행사했는데, 나라의 안정과 번영은 지속되었다. 우찌야와 요담 때에 여로보암 2세(기원전 787~747)가 통치했던 북이스라엘도 번영을 누렸는데, 이때 남북의 관 계는 매우 원만했다. 아시리아 영향기의 유대 왕국 : 기원전 8세기 후반에 고대 근동의 강자로 부상한 아시리아는 서부 아시아의 나라들을 위협했다. 그래서 시리아의 르신과 이스라엘의 베가(기원전 735~732)는 반아시리아 동맹을 맺고, 유다 에게도 참여를 요청했다. 요담의 뒤를 이어 유다를 통치하던 그의 아들 아하즈(기원전 735~716?) 왕이 이를 거절하자 르신과 베가는 유다를 침공했는데, 특히 시리아는 에시욘게벨을 차지했다. 또한,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 에돔과 불레셋도 유다를 침입하여 약탈하고 변방 지역을 점령하였다. 비록 예루살렘은 함락을 모면했지만, 위기에 처한 아하즈는 이사야 예언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사 7, 1-8, 15), 아시리아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때 불이라고도 불리는 디글랏빌레셀 3세(기원전 747~727)가 아시리아 군대를 이끌고 원정을 하여 다마스커스를 점령하고, 북이스라엘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아하즈는 다마스커스로 가서 아시리아 왕을 만나고 조공을 바치며 충 성을 맹세했다. 또한, 아시리아 종교를 받아들여 예루살 렘 성전에 아시리아의 신들을 위한 제단을 쌓게 하였다. 아하즈 시대에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의 샬마네세르 5 세(기원전 726~722)에 의해 멸망했다(기원전 722) . 아하즈의 아들 히즈키야(기원전 716~687) 왕은 민족주의자들의 영향으로 아시리아로부터 정치적 · 종교적으로 독립하고자 노력했다. 이를 위하여 그는 종교 개혁을 추진하고 아시리아 종교를 포함한 이교적인 요소들을 제거 했으며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야훼 종교를 강화시켰다. 그는 이 종교 정책에 북이스라엘 지역 사람들도 참여 하게 했는데, 여기에는 다윗 시대의 국토를 회복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가 담겨져 있었다(2역대 30, 1 ; 이사 9, 17). 또한, 그는 기원전 705년 바빌론의 므로닥발라단 등과 연계하면서 아시리아의 산헤립(기원전 704~681)에게 반기를 들고 독립을 선언했다(2열왕 18, 7 ; 20, 12-19). 그는 이사야 예언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친이집트파 신 하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이집트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 다(이사 30, 1-7 : 31, 1-3). 아시리아에 반기를 든 것은 유대 왕국만이 아니었다. 서부 아시아 대부분의 약소국 들도 그러했다. 기원전 701년 아시리아의 산헤립은 서부 아시아 지역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출동하여 대부분을 굴복시켰지만, 예루살렘 · 아스칼론 · 에크론 등 몇 몇 도시들은 정복하지 못했다. 이때 기대했던 이집트로 부터의 실제적인 도움은 없었다. 아시리아는 유대 왕국의 대부분을 짓밟고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히즈키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2열왕 18, 13-16). 그러나 다행히도 아 시리아 군대는 국내 문제와 전염병 등으로 예루살렘 정복을 포기하고 후퇴했다(2열왕 19, 35-37). 히즈키야의 통치 기간 동안 유다는 독립을 겨우 유지했지만,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히즈키야를 계승한 그의 아들 므나세(기원전 687~642) 왕은 부왕과는 달리, 친아시리아 정책을 펴면서 할아버지인 아하즈의 정책을 답습했다. 이것은 유다가 아시리아의 봉신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아시리아 종 교를 끌어들이고, 이교적인 제의와 관습을 장려했다. 므 나쎄 시대에 유다가 아시리아에 완전히 종속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시리아의 강력함 때문이었다. 에사르하 돈(기원전 680~669)과 아슈르바니팔(기원전 668~627)이 이끄는 아시리아 군대는 이집트를 정복하는 등 맹위를 떨쳤는데, 이때 유다도 침공을 당했다(2역대 33, 11). 므 나쎄의 뒤를 이은 아몬 왕(기원전 642~640) 역시 부왕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했다. 아시리아의 세력이 약해지자 유다에서는 반아시리아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고 아몬 왕 을 살해했다. 그러나 이 세력에 반대하는 지방민들이 힘 을 규합하여 이들을 제거하고 요시아(기원전 640~609)를 왕으로 옹립했다(2역대 33, 23-25). 이때 요시아의 나이 는 8세였기 때문에 옹립한 자들의 섭정이 있었다. 요시아 왕 시대에 유다는 아시리아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는 아시리아 종교를 제거하고 산당을 폐쇄했으며 이교 에 물든 사제들을 처형했다. 그의 통치 18년에 성전 수 리 중 발견된 법전은 이러한 종교 개혁에 박차를 가하게 했고(2열왕 22, 1-23, 25 : 2역대 34, 1-35, 19), 야훼 종 교를 예루살렘으로 집중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는 데, 오늘날 신명기의 일부로 여겨진다. 요시아의 이러한 종교 정책은 유대 왕국의 독립을 견고하게 했고, 사회를 개혁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요시아 시대인 기원전 612 년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가 바빌론과 메데의 연합군에 게 함락되고, 아시리아 정부는 하란으로 망명했다. 이때 이집트의 느고 2세(기원전 610~595)가 아시리아를 돕기 위해 출전했는데, 이때 요시아는 므깃도에서 이집트 군대의 원정을 제지하다 전사하였다. 이집트는 가르그미스 전투에서 바빌론에게 패했지만, 팔레스티나와 유다를 포 함한 유프라테스 강 서부 지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바빌론 제국 영향기의 유대 왕국 : 이집트의 느고는 돌 아가는 길에 요시아의 뒤를 이어 왕이 된 그의 아들 여호 아하즈(기원전 609)를 3개월 만에 폐위시키고 볼모로 잡아갔다. 그리고 요시아의 또 다른 아들 엘리아킴의 이름 을 여호야킴(기원전 609~598)으로 바꾸고 왕으로 세웠 다. 이것은 유다가 이집트의 봉신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 했다. 여호야킴은 이집트에게 막대한 조공을 주고, 이를 충당하기 위하여 세금을 과중하게 부과했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도 왕궁을 새로 지어 백성들의 원성을 샀으며 예레미야 예언자의 지탄을 받기도 했다. 여호야킴 시대인 기원전 605년경 바빌론의 느부갓네 살(기원전 605~562)이 팔레스티나로 진격하자 유다는 바 빌론의 봉신이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601년 이집트와 바빌론의 전투에서 쌍방이 손해만 입고 무승부가 되자, 여호야킴은 바빌론에 반기를 들었다. 이에 느부갓네살은 유다로 진격했는데, 이때 여호야킴은 죽었다. 그의 죽음 이 암살인지 자연사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바빌론의 침공에 불안을 느낀 백성들에 의하여 암살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예레 22, 18-30 ; 36, 30). 여호야킴의 아들 여호야긴이 18세에 왕위를 계승했지만, 왕위에 오른 지 3개월 만에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의해 함락되었다 (기원전 597). 바빌론은 왕과 기술자 관리 · 왕족 등을 포로로 잡아갔는데, 여호야긴은 바빌론에서 37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 풀려났다(2열왕 25, 27-30). 한편, 바빌론은 여호야긴의 삼촌인 시드키야(기원전 597~587)를 왕위에 앉혔다. 그러나 백성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간 여호야 긴을 합법적인 왕으로 간주했으며, 바빌론의 역사서도 그를 "유다의 왕"이라 칭했다. 시드키야는 바빌론에 굴복하라는 예레미야의 충고에도 불구하고(예레 27-29장), 이집트를 의지하면서 바빌론 에 반기를 들었다(2열왕 25, 1). 그러자 바빌론의 느부갓 네살은 기원전 588년 유대 왕국을 침공하여 예루살렘을 일 년 반 동안 포위하고 함락시켰다(기원전 587). 이때 시 드키야는 성밖으로 도망가다가 잡혀 두 눈이 뽑혀진 뒤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바빌론은 예루살렘을 포함한 전 유대 왕국을 황폐화시키고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리고 이때 유대 땅에는 가난한 농부 등 하층민들만 주로 남게 되었는데 이들 중 일부는 이집트로 내려가서 살기도 했다(예레 43, 1-7).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유대 왕 국이 종말을 맞은 것이다(예레 25, 1-11). 이후 유대 왕국 은 다시 회복되지 못했다. (→ 바빌론 유배 ; 이스라엘) ※ 참고문헌  J. Bright, A History of Israel,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0/ -, A History of Israel, Philadelphia, Westerminster, 1971/ 김윤주 역, 《이스라엘의 역사》, 상 · 하권, 분도 출판사, 1979/ J.M. Miller · J.H. Hayes, A History of Ancient Israel and Judah,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86/ H. Jagersma, A History of Israel in the Old Testament Period, Philadelphia : Fortress Press, 1983/ 정중 호, 《이스라엘 역사》, 대한기독교서회, 1994. 〔千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