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몽인 (1559~1623)
柳夢寅
글자 크기
9권
조선 중기 선조 · 광해군 연간의 개혁적 관료이자 실학 의 선구자. 《어우야담》(於于談)의 저자. 호는 어우(於 于), 묵호자(默好子), 자(字)는 응문(應文)이다. 본관은 전라도 고흥(高興). [생 애] 서울 명례방(明禮坊)에서 제용주부(濟用注簿) 를 지낸 당(檔)과 어머니 민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4세 때 시를 지을 만큼 총명했다. 9세 때 부친을 여의고 10세 때 모친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선유(先 儒)의 주석이나 학설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의 이해 방 식을 강조했다 한다. 15세에 결혼하였고, 이후 성혼(成 渾)에게 성리학을, 신호(申護)에게 고문과 고시(古詩)를, 송익필(宋翼弼)에게서 예학을 배웠다. 당시 그의 벗들은 이항복(李恒福) , 이정구(李廷龜) 등이었다. 31세 때 과거에 합격했을 때, 백 년 이래의 명문' 이 라는 칭찬을 들었으며, 이후 북인 계열의 관료로 활약하 였다. 34세 때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후 전란 극복과 관련된 활동을 하였다. 특히 왕세자 광해군이 이끄는 분조(分朝)에서 활동하였으며, 주로 명군에게 공급할 군량 조달을 담당 하였다. 전란 상황인데도 수령들이 백성들에게 끼치는 폐단이 크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시정하려 노력하였다. 유몽인은 당시 복잡한 명과의 관계를 원활히 하기 위해 외교 문서를 작성함으로써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래서 1593년(선조 26)에는 조선 주둔 명군의 최고 지휘관 송 응창 막하에서 <대학> 등을 강론했다. 당시 송응창은 조 선의 학인들이 주자주(朱子註)에만 얽매여 있다고 비판 하고, 양명학을 수용하라고 종용했다고 한다. 유몽인은 왜란 극복을 위해 노력한 공로가 인정되어 영양군(瀛陽 君)에 봉해졌다. 이후 유몽인의 학문적 관심은 성리학뿐만 아니라 천 문 · 지리 · 상서(象胥) · 언어 등에까지 이르렀다. 41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향리에서 쉬다가 43세에 다시 조정 에 나왔지만, 붕당 사이의 갈등에 큰 염증을 느끼고 물러 나 은거하기도 했다. 50세가 되던 1608년에는 도승지로서 선조의 임종 때에 이른바 '칠신유교(七臣遺敎)' 를 목 도했다. 선조가 어린 영창군(永昌君)을 7명의 원로 신하 들에게 부탁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유교는 광해군과 대북파에게는 '눈엣가시' 였으므로, 이때부터 대북파로 부터 '기피 인물' 로 간주되었다. 당시 서인들은 그를 중북파라고 불렀다. 51세 때 광해군 즉위(1609)를 맞아 성 절사 겸 사은사로 명에 다녀왔고, 52세에는 남산에 은거 하여 문필 작업에 몰두하면서 주로 고문(古文)을 연찬하 였다. 56세 이후 이조 참판을 거쳐 홍문관 제학에 이르렀다. 1617년, 그의 나이 59세 때 이른바 폐모 논의가 일어 나자, 북인에게 무조건적인 찬성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유몽인은 이를 회피하려 하였기에, 대북파는 그를 죽여 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남록청은개가사잉부추국청> (南麓聽銀介歌辭仍赴推鞫廳)이란 풍자의 글을 지어 대 북파의 폐모 논의를 비난했지만, 결국 폐모 정청에 참여 하고 말았다. 이후 정치 현실에 염증을 느껴 60세 이후 서강(西江) 의 와우산에 은거하면서 문학에 몰두하여, 62세 때(1620) 《어우야담》을 완성했다. 조선 시대의 야사집 가운데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 책은 주로 그가 살았던 선조 ~광해군 연간의 인물과 관련된 사건들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특히 대북파에게 밀려 정치적으로 힘을 잃었던 상황에서 그들의 정치 행태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통해 세 사(世事)를 포폄하려는 그의 의지가 담겨져 있다. 《어우 야담》은 이수광의 《지봉유설》(芝蜂說)과 같은 유서(類書)이다. 65세 때인 1623년 인조 반정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 고 철원에 잠시 내려왔다가 광해군 복위를 도모한 역모에 관련됐다는 혐의를 받고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뚜렷한 '반혁명' 행위를 하지 않았지만 그가 당시 <상부>(孀 婦)라는 시를 짓는 등 광해군에 대한 충성을 다짐했던 것 등이 문제가 되었다. 유몽인에게는 죽은 뒤에도 계속 '역적' 이라는 오명이 붙어 다니다가, 정조 대에 가서야 신원되었다. 정조는 그를 김시습(金時習)과 백이, 숙제에 비유하였고, 《신간어 우당유집》(新刊於于堂遺集跋)이 간행되자 정조 자신이 직 접 쓴 신설문(伸雪文)을 싣기도 했다. [학문과 평가] 유몽인의 학문은 어느 하나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는 문학, 경학뿐 아니라 여러 가지 잡학들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의 문장을 모범으로 삼았고, "옛날 주 · 한 아래의 서책에는 눈도 대지 않았다" 고 회고한 바 있으므로, 기본적으로는 육경고학(六經古學)을 옹호하는 학자였다. 유몽인의 문집인 《어우집》(於于集)에 실린 각종의 경 세론(經世論)은 내용이 다양하고 수준이 뛰어나다. 특히 임진왜란 직후의 피폐한 조선 사회의 현실을 염두에 두고, '처방전' 으로 제시한 논설인 〈안변삼십이책〉(安邊三 十二策)은 이후 시기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만주에서 누르하치의 건주여진(建州女眞)이 강 성해지는 것에 대처하기 위한 방책으로 제시된 것이 <안 변삼십이책>이었다. 곧 왜란 이후 급변하고 있던 국제 질서와 조선의 사회 · 경제적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개 혁 구상' 이었다. 이 속에는 노비의 양민화 등의 안민책 (安民策), 둔전 설치 등의 군비 강화책(軍備强化策)뿐만 아니라, 은광과 철광을 개발하고, 선박과 수레를 만들며 벽돌을 사용하고, 상설 점포를 만들어 상인을 육성하고 화폐를 유통시키며 대외 무역을 활성화하자는 등의 중 상적(重商的) 개혁론' 이 제시되어 있다. 유몽인의 학문 경향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그가 당시 이단으로 여겨지던 학문들에 대해서 상당히 포용적인 자세를 지녔던 점이다. 곧 유몽인은 17세기의 대표적인 삼교회통(三敎會通)의 사상가였다. 그는 기본적으로 주자 성리학을 공부했지만, 선교(仙敎) · 도교 · 불교 등에 대한 관심도 각별했다. 특히 《어우야담》 권2에 〈서 교>(西敎)조를 두어 세계를 돌아보고 세계 지도를 만들 어 세계인들을 소개한 리치(M. Ricci, 1552~1610)를 이인 (異人)이라고 평가하면서도, 교황을 위시한 유럽의 천주 교에 대해서는 이단이라는 입장에서 소개하였다. 천주교에 비판적이었던 것은, 조선 침략의 선봉장이었던 고니 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600) 같은 일본인이 천주교를 믿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당연히 허균(許 筠)이 천주교 교리가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본 사실도 강하게 비판하였다. 1603년에 상하 8권으로 간행된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읽은 후에 한 이 비판적 서술은, 당시 《천주실의》가 간행된 지 불과 10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볼 때 대단히 빠른 문화적 대응이었다. ※ 참고문헌 《朝鮮王朝實錄》 柳夢寅, 《於于集》 -, 《於于夜 譚》/ -, 《燃藜室記述》/ 韓明基, <柳夢寅의 경세론 연구>, 《韓國學 報》 67, 1992. [朴光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