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태 (1789/1794~1828)
劉泰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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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정해박해(丁亥迫害) 때의 순교자. 세례명은 라우렌시 오. 일명 순지. 충청북도 단양(丹陽)의 깁근골[깊은골의 오기인 듯함. 현재 단양군 내 대강면(大崗面) 신구리(新邱里)와 어상천면(魚上川面) 임현리(任縣里)에 깊은골이라 불리는 마을 이 있음]에서 살았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경상 도에 살던 친척과 그 도에 살던 신자 여럿이 그의 집으로 피신해 왔다. 그러던 중 이해 5월에 그의 외교인 친구의 밀고로 그의 집에 모여 있던 친척, 교우 20여 명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단양 관아(官衙)에서 혹형과 고문으로 함께 체포된 사람들이 모두 배교했으나, 그는 홀로 신앙 을 굳게 지켰다. 그러자 관장이 유성태가 배교하지 않으면 아무도 놓아 주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모든 사람 들이 그를 원망하며 배교하기를 간청함에 따라 하는 수 없이 그도 배교한다는 말을 하여 모두 석방되었다. 그는 함께 풀려 난 사람들을 각각 제 갈 곳으로 안전하게 보낸 뒤 혼자 다시 단양 관아를 찾아가 배교를 취소하였다. 이 에 따라 그는 더욱더 가혹한 형벌을 받게 되었으나 꿋꿋하게 참아 견디어 충주 진영(忠州鎭營)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유성태는 충주 진영으로 이송된 뒤 나약함을 드러내 끝내 배교하고 함경북도 무산(茂山)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 잘못에 대한 죗값을 치르기라도 하듯 다시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그는 유배 생활 중에 드러내 놓고 수계 (守誡)를 하였고, 그에게 가까이 오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전교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그곳 관장과 그 부하들 의 미움을 많이사 얼마 후 어떤 집에 연금당해 식사를 제공받지 못하게 되어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구전에 의하면 그의 순교일은 1827년 12월(음), 혹은 1828년 3월(음)이라고 하며 나이에 대해서도 35세 또는 40세라 는 두 가지 설이 있다. (→ 정해박해)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中, pp. 181~183/ 李晚采 編, 《闢衛編》 〈丁亥三道治邪〉, 열화당, 1791, p. 391. 〔孫淑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