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철 (1918~1977)
柳秀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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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서울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도미니코. 1918년 1월 12일 경기도 용인군(龍仁郡) 모현면 (慕賢面) 오산리(吳山里) 44번지에서 전주에 본관을 둔 유옥균(柳玉均, 요한)과 오발발라 (吳發發羅, 바르바라)의 열두 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외가쪽으로 모친을 비롯하여 조모 · 증조모 고조모들이 모두 세례명으로 호적에 등재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의 가문은 순교자를 냈을 법한 오랜 신앙 내력을 가진 듯하다. 고향에서 신갈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동성상업학교 을 조(소신학교)를 거쳐 예수성심신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1943년 12월 5일 종현(현 명동) 본당에서 노기남(盧基 南, 바오로) 주교의 주례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약현 본 당 보좌로 첫 사목 활동을 시작하여 1944년 11월 인천 답동 본당 보좌로 전임되었고, 1946년 2월부터 6년 간 소신학교에서 라틴어를 가르쳤다. 한국 전쟁으로 피난 갔다 돌아오면서 서정동 본당 3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9 년 간(1952. 7~1961. 1) 재임하며, 공민학교를 세운 후 이 를 발전시켜 효명중학교와 효명공업고등학교(현 효명중 종합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1961년 서울로 전임되어 서대문 본당 2대 주임(1961. 1~1962. 9)을 거쳐 혜화동 본 당 9대 주임(1962. 9~1968. 6)으로 부임하였다. 부임 후 본당 조직을 혁신하고, 아울러 내실화에 사목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본당 신자인 이해남(李海南, 요셉) 한양대학교 교수의 건의로 1965년부터 크리스천 성가정 운동 (C.F.M.)을 국내에서 전개하였다. 또한 1967년 5월 4일 부터 4일 동안 성수동 본당에서 주한 필리핀 꾸르실리스 타의 주최로 열렸던 제1차 꾸르실료(Coursillo)에 참가하 여 꾸르실료 운동의 한국인 시조의 한 사람이 되었다. 같 은 해 8월 24일 유수철 신부의 지도하에 이해남이 회장 을 맡아, 정동 명도원에서 최초로 우리말 꾸르실료가 실시되었다. 한편 교구 평의원(1967.4)으로 상서 국장을 겸임하였고(1967. 11), 1968년 3월부터는 가톨릭대학 의학 부장과 가톨릭 중앙 의료원 원장직을 겸임하였다. 그 해 6월부터는 가톨릭 중앙 의료원 원장으로만 봉직하면서 당시 병원 경영 및 노사 문제를 둘러싼 병원 분규를 수습하였다. 1972년 스페인의 마요르카 섬에서 열린 꾸르실 료 세계 지도자 회의에 문창준(文昌俊, 마티아), 박정훈 (朴定勳, 요한)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 1973년 11월 신 당동 본당 7대 주임으로 부임한 후 이듬해 6월 21일부 터 7월 12일까지의 기간 동안 저명한 학자 · 신부들을 초청하여 특별 강연회를 개최하였고, 1977년 7월 17일 부터 1주일 간 제1회 청년 신앙 강좌를 여는 등 평신도 재교육에 진력하였다. 1977년 7월 지병인 폐암이 재발 하여 성모병원에 입원한 후 한 달 만인 8월 29일 저녁 9 시 30분 향년 60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8월 31일 명 동 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 집전으로 영결 미사를 거행 한 후 유해는 용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 꾸르 실료 ; 신당동 본당 ; 혜화동 본당) ※ 참고문헌 《신당동 본당 40년사》(1948~1988), 천주교 신당동 교회, 1988/ 《경향잡지》 64호(1972. 7), pp. 8~10/ <한국 가톨릭 교회의 꾸르실료 운동>, 《한국 가톨릭 문화 활동과 교회사》, 한국교회사연 구소, 1991/ 《가톨릭 사전》 백동 70년사 편찬위원회 편, 《백동 70년 사》, 천주교 서울대교구 혜화동 교회, 1997. [白秉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