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티니아누스 법전
法典
[라]Codex Justinianus · [영]Code of Justin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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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신하들과 함께한 《시민법 대전》의 후원자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us I , 527~565)의 후원으로 편찬된 법전. 정식 명칭은 《시 민법 대전》(Corpus Juris Civilis)이다. [제정 배경]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동로마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에 문화적 특성을 뚜렷하 게 발휘하게 되었다. 비록 그의 업적이 시대에 따라 달리 평가되지만,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역사의 새 방향을 설 정하는 중요한 결정을 한 황제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아름답고 과감한 왕비 테오도라(Theodora, 500?~548)의 현명한 자문을 받아 적절한 정책 결정을 하였다. 그의 목표는 옛 로마 제국의 서쪽 영토를 회복하고 토목 사업을 일으키는 한편, 로마법을 정비하는 것이었 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벨리사리우스(Belisarius)와 나르 세스(Narses) 등 유능한 장군들에게 페르시아와 싸워 동 쪽 국경을 확정하고, 반달 족을 멸망시켜 북아프리카에 있는 옛 로마 영토를 회복하였다. 또한 동고트 족을 정복하여 이탈리아를 회복했으며, 서고트 족으로부터 이베리아 반도 남부를 빼앗았다. 이리하여 그는 브리타니아(오 늘의 영국), 갈리아,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제외한 로 마 제국의 핵심 부분을 다시 통치하게 되었다. 각 지역 주민에게 무거운 과세와 그리스 정교를 믿도록 강요하였 으며, 콘스탄티노플에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 대성전과 같은 거대한 건축물을 축조하였다. 이 대성전은 단 순하고 평탄한 로마의 바실리카 양식이 아니라 시리아 지방에서 발달된 양식으로 설계된 넓고 큰 돔형의 건축 이었다. 그의 여러 업적 중 가장 커다란 문화사적 의의를 갖는 것은 로마법의 법전화 작업이다. 6세기에 이르러 법률의 법전화는 필요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3~6세기에 이르는 기간에 로마 제국의 법률과 법령의 양은 엄청나게 증 가하여 결과적으로 상충되거나, 사문화(死文化)된 부분이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로마 제국 말기에 그리 스도교를 국교로 정한 것과 같은 로마의 체제적 변화는 낡은 법적 원리를 더 이상 현실적으로 적용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527년에 즉위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지난 천 년 간 중복되고 복잡한 기존의 로마법을 일관성 있는 법전으로 체계화하여 새로운 시대 상황에 적합한 통치 근거를 마련하려고 하였다. 이를 통해 초기 로마 제 국 통치와의 연속성을 강조할 뿐 아니라, 동로마 제국의 정치적 정통성 및 유스티니아누스 1세 자신의 절대 권력을 제고하기 위한 시도였다. [내 용] 528년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는 트리보 니아누스(Tribonianus, ?~545)를 비롯한 법률 전문가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 위원회는 《시민법 대 전》을 완성하여 과거의 수많은 입법과 황제 칙령으로 규 정된 로마법의 실질적 내용을 요약했을 뿐만 아니라, 그 법의 근거가 된 원칙에 대해 정의를 내린 법률가들의 견 해들을 모아 편집하였다. 이 법전은 로마법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하였을 뿐 아니라, 고도로 중앙 집권이 이루어진 절대주의적 체제를 합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시민법 대전》은 <유스티니아누스 법전>(Codex Justinianus) · 〈신법집〉(新法集, Novellae) · <요강>(要綱, Digest 또 는 Pandects) · <법학 통론>(Institutes) 등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위원회가 생긴 후 2년 만에 제일 먼저 <유스티니 아누스 법전>이 나왔다. 이는 하드리아누스 황제(117~ 138)부터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에 이르기까지 공포된 모든 법령을 체계적으로 개정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534년 이후 공포된 입법을 모두 편입했으며, 미비점은 후에 <신법집>으로 보완되었다. 위대한 법률가들의 저술을 요약한 <요강>은 532년에 완성되었다. 3년 정도 소요된 <요강>에는 2,000권의 책 들과 권위자 39명의 견해가 소개되었다. 이는 법제사(法 制史)에서 보기 드문 가장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마지막으로 나온 <법학 통론>은 〈요 강>과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에 수록되어 있는 개정된 법률 원칙들을 정리한 것으로, 법과 학생들의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의 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로마 최후의 황제이며 동로마 최초의 황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고대 로 마 제국에서 중세 동로마 제국으로 전환되는 과도기의 위대한 황제였다. 이 사실에 걸맞게 《시민법 대전》은 처 음에는 라틴어로 쓰여졌으나, 편찬 후 즉시 그리스어로 된 요약판이 나왔다. 《시민법 대전》은 법학의 기념비적 업적으로써 유럽 내 지 세계의 법률 발전과 정치 제도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대전은 중세 유럽으로 전해져 가톨릭 교회법 의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11세기 서유럽에서 다시 연구 되기 시작하여 중세 대학 특히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 법학 연구의 기초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시민법 대전》이 19세기 이후의 근대 법 체계에 미친 영향도 매우 크다.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반영한 나폴레옹 법전이 《시민법 대전》을 바탕으로 제정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현대의 서방 국가들 대부분,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들 및 그 밖의 나라에서는 로마법 원리에 기반을 둔 법제를 채택하고 있다. 비록 영국과 미국(루이지애나 제외)은 게르만법에 기원한 중세 잉글랜드의 판례(判例)에 근거한 영 미법(commmolaw)을 따르고 있으나, 영미법 자체도 로마 법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예컨대 잉글랜드와 미국과 같은 식민지의 상법(商法)은 로 마법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 시민법 대전의 기본 특성 중 하나는 단순성과 일반 화라는 자연법 개념에 입각해 있다는 점이다. 이 법전은 간결함, 조화로움 및 알기 쉬운 점 등을 법 체계의 특징으로 삼고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로마법을 기존의 모양으로 유지하면서도 법 체계의 정비를 통한 사회 개 혁을 지향하였다. 그렇기에 지역적 특수성을 감안한 실 정법을 충분히 인식하면서도 인류 공통의 법이라 할 자 연법의 일반 원리도 반영하였다.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시민법 대전》이 후세의 전제적 절대주의의 기반을 마련 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군주가 하고자 원하는 것은 법의 힘을 갖는다' 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말은 제국의 주권자에게 무한한 권력을 부여하였고 뒷날 유럽 전제 군주들에게 흔히 인용되는 경구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민법 대전에는 지배자와 피지 배자의 관계에 대한 현대적 관념 즉, 입헌주의 정신이 드러나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법전에서 주권자는 본래 그 권력을 신으로부터가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얻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황제라 해도 법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국가는 추상적인 공공 실체라는 시민 법전의 주장은 중세의 일부 견해에서와 같은 지배자 개인의 재산 이라는 관점과 판이한 현대적 관념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시민법 대전》은 고대 로마의 법 제도와 사상 에 관해 가장 방대하고 가장 풍부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는 데 그 역사적 중요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교회법전》) ※ 참고문헌 R. Browning, The Byzantine Empire, 1980/ Henry Sumner Maine, Ancient Lawl C. Mango, Byzantium : The Empire ofNew Rome, 1980/ J. Moorehead, Justinian, 1994/ D. Obolensky, The Byzantine Commomwealth : Eastern Europe 500~1453, 1971/G. Ostrogorski, History ofthe Byzantine State, tr. Joan Hussey (Paperbacks). [車河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