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근 (1906~1950?)

兪榮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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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곡 본당 재임기의 유영근 신부(맨 왼쪽)

감곡 본당 재임기의 유영근 신부(맨 왼쪽)


서울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요한. 일명 한주(漢柱) . 1906년 12월 7일 충청남도 아산군 인주면 공세리에서 태어나 당진군 신평면 매산리에서 성장하였다. 1932년 12월 17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후에 1933년 1월 12일 황해도 장연 본당의 보좌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수원(현 북수동) 본당 3대 보좌 (1933. 6~1936. 5), 춘천(현 죽림동 주교좌) 본당 5대 주임 (1936. 5~1938. 10), 원주(현 원동 주교좌) 본당 10대 주임 (1939. 1~7), 서울 소신학교(동성상업학교 을조) 교사를 역 임하였고, 장호원(현 감곡) 본당 3대 주임(1943~1945. 11) 으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 유영근 신부의 사목 활동 중에 서 특기할 만한 것은 우리 시조 100수를 담은 카드 놀이를 어린이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일본 경찰의 감시를 교묘 히 피하고 동시에 어린이들에게 우리말과 글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으며, 복자 축일 제등 행렬이나 성체 거동 때 자신이 직접 만든 <오묘하다> · <만송가> · <천주의 모친> 등의 노래말을 가르쳐 부르도록 하였다고 한다. 유영근 신부는 광복을 맞이한 1945년 11월 충주(현 교현동) 본 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가 1950년 3월 서울교구 경리 신부로 전임되었다. 그는 그 해 6월에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 피란을 가지 않고 명동 성당을 지켰으며, 주한 교황 대사 번(Byrne, 方) 주교가 공산군에게 끌려가 서울 소공동 삼화 빌딩에 다른 외국인 성직자 · 수도자들 과 함께 감금되자 이들에게 음식을 날라다 주었다. 1950년 7월 17일 유영근 신부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긴 인민군이 누구냐고 묻자 당당하게 '천주교 신부' 라고 밝혔는데, 그 자리에서 납치되어 다른 외국인 성직자들과 함께 감금되었다가 행방 불명되었다. 유영근 신부는 교회사 연구에 많은 기여를 하였는데, 소신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동안 김대건 신부의 생애를 연구하여 《수선 탁덕 김대건》(首先鐸德 金大建)을 1942 년 2월에 간행하였다. 이 책은 1942년 곧 서울교구가 한국인 주교 교구로 변모되고 김대건 신학생이 마카오 유학을 마치고 고국으로 향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에 간행되었고, 한국어로 발간된 최초의 김대건 신부 전기였다. 한편 유 신부는 장호원 본당에 부임하기 직전인 1944년 1월 12일에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가 신학 생 시절을 보냈던 만주의 장춘 북쪽에 위치한 소팔가자 (小八家子)를 찾았는데, 그 내용을 《경향잡지》에 <박갸 서(팔가자) 행로의 일화(逸話)〉라는 수기 형식의 글로 연재하기도 하였다. 장호원 본당에 부임해서는 공소 순방과 사목 활동 중에도 틈틈이 한국 천주교회사와 관련 된 연구를 계속하였다. 특히 장호원에서 멀지 않은 진천 (鎭川)의 배티 사적지를 자주 드나들면서 인근의 교우촌 을 조사하였으며, 땅속에서 아주 오래된 성물을 발견하 여 교우들에게 공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배티 사적지를 중심으로 사목 활동을 한 적이 있는 두 번째 한국인 성직자 최양업 신부의 행적을 현양하기 위해 노력하며 자료들을 수집하여 "최 토마스 신부 전기"를 집필하였고, 1949년에 최양업 신부의 사제 수품 100주년 기념물 로 출판하기 위해 《경향잡지》 1949년 4월호부터 연재하 던 중 한국 전쟁으로 인해 중단되고 말았다. (→ 《수선탁덕 김대건》) ※ 참고문헌  <평화신문> 2000. 7. 23, 8면/ 천주교 청주교구 감곡 본당 100년사 편찬위원회 편, 《감곡(매괴의 성모) 본당 100년사 · 화 보집》, 감곡 본당, 1999/ 천주교 수원 교구, 《수원교구 30년사》, 1993.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