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모(1890~1981)

柳永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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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사상가. 호는 다석(多夕). 1890년 3월 13일 서울에서 유명근(柳明根)의 아들로 태어난 유영모는 1905년 YMCA 총무 김정식(金貞植)의 인도로 연동 교회(蓮洞敎會)를 다니게 되었다. 1907년 경신학교(儆新學校)를 졸업한 후 1909년 양평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10년 이승훈(李昇薰)의 초빙으로 평북 정주 오산학교(五山學校)에서 2년 간 교사로 재직 했다. 1912년 오산학교에 재직하던 중 톨스토이의 영향 을 받아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이후 기성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1912년 동경 물리학교에서 1년 간 공부하던 시 기에 무교회주의자인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강연 을 들었으며, 1915년 김효정과 결혼하고, 1918년부터 는 자신이 태어나서 살아온 날 수를 세기 시작하였다. 1921년 조만식(曺晩植)의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1년 간 재직하며 함석헌(咸錫憲)에게 큰 영향 을 끼쳤다. 1928년 YMCA 간사 현동완(玄東完)의 요청으로 YMCA 연경반(성경 연구 모임)의 지도를 맡아 1963년까지 35년 간 강의하였다. 그리고 무교회주의자 인 김교신(金敎臣)이 펴낸 《성서 조선》(聖書朝鮮)에 기 고하였다. 1935년 종로 적선동 솜 공장을 처분하고 경 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현 종로구 구기동)로 옮겨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1941년 2월 17일부터 하루에 저녁 한 끼만 먹고, 이튿날엔 부부간의 성생활을 단념한다 는 뜻으로 해혼(解婚)을 선언하였다. 1942년 1월 4일에 하느님과 예수님을 깊이 체험하고 신앙 시편들을 지어 《성서 조선》에 기고하였다(1942년 2~3월호). 1955년 4월 26일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1975년 1월 1일까 지 계속하였는데, 《다석 일지》(多夕日誌)가 그것이다. 1980년부터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 해 7월 31일 부인이 88세로, 이듬해 2월 3일 그가 구기동 집에서 91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33 200일을 살았고, 2월 5일 벽제 공원 묘지의 부인 곁에 묻혔다. 유영모의 신관(神觀)은 하느님을 "없이 계시는 분"이라 일컬었으며, "있이 없는" 인간이 "없이 계시는 분"을 만나는 길은 자기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길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의 신관은 선불교의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 人心見性成佛)과 통하였으며, 실제로 그는 하느님을 일 컬어 공(空)이라고도 하였다. 유영모는 예수를 가장 위대한 스승으로 받드나, 신으로 섬기지는 않는다고 단언 하였다. 그는 예수를 더없이 위대한 선각자로 받들되 하느님으로 섬기지는 않았으며, 석가 · 공자 · 노자 · 장자 등 동방의 성현들도 구원의 중개자로 보는 통합적 종교 사상을 폈다. 그는 많은 책을 읽지는 않았으나, 성경의 핵심을 꿰뚫은 다음 마침내 성경과 동양 고전을 접목시 키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여겨진다. (→ 김교신 ; 무교회주의) ※ 참고문헌  《성서 조선》 157호(1942. 2) · 158호(1942. 3)/ 《다석 일지》 1~4, 홍익재, 1990/ 김흥호 풀이, 《다석 일지 해설 · 다석 유영 모 명상록》, 1~3, 성천문화재단, 1998/ 김흥호 풀이, 《다석 일지 공 부》 1~7, 솔, 2001/ 박영호 편, 《씨알의 메아리 · 다석 어록 · 죽음에 생명을 절망에 희망을》, 홍익재, 1993/ 박영호 편, 《동방의 성인 다석 유영모》, 무애, 1993/ 박영호, 《다석 류영모의 생애와 사상》, 문화일 보사, 1996/ 정 양모, <다석 유영모의 신앙>, 《종교 신학 연구》 6, 1993/ 이기상, <다석 류영모에게서의 팅 빔과 성스러움>, 《철학과 현 상학》 16, 2001. 〔鄭良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