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옥 (1898~1950)
劉載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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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유재옥 신부.
서울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본관은 강릉 (江陵). 1898년 1월 19일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오산리 (吳山里) 사기막골에서 태어났다. 일설에는 유재옥 신부가 경기도 화성군 봉담면 왕림동(旺林洞)에서 태어나 어 릴 때 부모를 따라 용인으로 이사하였다고도 한다. 유재옥 신부는 향리에서 서당에 다니다가 용산 예수성 심신학교에 입학하여 철학 · 신학 공부를 마치고 1925년 6월 6일에 사제 서품을 받은 뒤 개성(開城) 본당 보좌로 부임하였다. 1927년 5월, 강원도 양양(襄陽) 본당 2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양양면 성내리에 1,147평의 대지를 매입하여 성당 신축 사업을 전개하였다. 1939년 겸이포 (송림) 본당 초대 주임으로 전임되었는데, 겸이포는 그때 까지 사리원(沙里院) 본당의 공소였다가 제철소가 세워 지자 인구가 증가하여 본당으로 승격된 곳이었다. 유재옥 신부는 1940년에 황마산 아래에 83평의 벽돌 성당과 21평의 사제관과 19평의 부속 건물을 준공하여, 그 해 12월 3일 라리보(Larribeau, 元亨根)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고 주보를 예수 성심으로 삼았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난 이후 평양교구의 메리놀회 미국인 신부들과 내통하여 군수공장으로 지정된 겸이포 제철소의 기밀을 탐지했다는 혐의로 겸이포 경찰서에 연행되었다가 이듬해 4월 18일 본당 신자들이 그의 석방을 기원하는 9일 기도를 마치던 날, 138일 만에 본당으로 돌아왔다. 옥고로 쇠약 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유 신부는 제철소 노동자와 농촌 공소 신자들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헌신적인 사목 활동을 하였다. 1950년 6월 24일 밤 11시부터 이튿날 새벽 2시 사이에 북한의 성직자들이 일제히 검거될 때 유재옥 신부도 비밀리에 정치보위부원들에게 납치되어 토굴 감 옥에 수감되었다가 해주(海州) 형무소로 이감되어 10월 5일 동해주(東海州) 백사장에 생매장당하였다. 유재옥 신부가 사망한 지 25년이 지난 1975년 6월 6일 수원 서둔동 본당에서 흩어졌던 겸이포 본당 신자들이 모여 그를 추모하기도 하였다. ※ 참고문헌 徐相堯, <유재옥 신부>, 《교회와 역사》 86호(1982. 9), 한국교회사연구소. 〔金志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