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률 (1837~1866)

劉正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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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교자들의 매를 맞고 숨진 성 유정률 베드로( 탁희성 작) .

배교자들의 매를 맞고 숨진 성 유정률 베드로( 탁희성 작) .


성인(聖人).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은 베드로. 평안 남도 대동군(大同郡) 율리면(栗里面) 답현리(沓峴里, 일 명 논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짚신 을 팔아 겨우 살아갔다. 그의 나이 30여 세인 1864년경 에 천주교를 알게 되면서 즉시 서울로 올라와 베르뇌 (Berneux, 張敬一)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고 베드로라는 본명을 얻었다. 그 후 고향에 돌아와 지난날의 방탕하고 난폭했던 생활을 반성하고 속죄하기 위해 신 꼬리를 고 편(苦鞭) 삼아 자신의 몸을 심하게 매질하며 극기와 인 내의 신앙 생활을 하였다. 이와 같이 영세한 뒤에 아주 딴사람으로 변한 남편에게 감동하여 그의 아내도 남편의 모범을 따라 입교하였다. 그는 항상 "나는 세상에 태어 나 지금까지 내 몸뚱이를 길러 가죽이 두껍고 기골이 장대하나 쓰일 바를 알지 못하였다. 이에 봉교한 뒤에는 진실로 쓰일 곳을 알아 한 번 어느 때에나 이 천한 몸을 내는 일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우리 주 예수가 (우리 를) 구속해 준 큰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는 길 이다" 라고 하였다. 유정률은 1866년 2월 16일 설 때가 되어 친척들을 찾 아 세배를 마치고 "안녕히들 계십시오.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라고 작별 인사를 한 다음 이웃 마을인 고둔이 공소로 갔다. 그날 저녁 그 곳 교우들과 함께 성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포졸들이 갑 자기 습격하여 그와 집주인 정 빈천시오 회장, 우세영 (禹世英, 알렉시오) 등 5명의 교우를 체포하여 평양 감영으로 끌고 갔다. 이 무렵 평양 감영으로 잡혀 온 교우 수는 100명이 넘었다. 그러나 혹형과 고문으로 거의 다 배교하고 유정률만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순중군(巡中軍) 정지용(鄭志鎔)이 배교한 교우들을 시켜 그를 죽을 때까지 때리게 하였다. 그는 한 사람으로부 터 세 대씩, 100여 명의 교우들에게 도합 300여 대를 맞고 체포된 다음날인 2월 17일 숨을 거두었다. 배교한 교우들이 정지용의 명령에 따라 그의 시체를 대동강에 던졌으나, 그의 아내가 관장에게 돈을 주고 남편의 시체를 거두어 고향인 논재에 안장하였다. 이러한 유정률의 순교 사실은 1876년 순중군 정지용의 천주교 탄압을 치하하기 위해 부벽루 영명사(永明寺)에 세운 '척사기적비' (斥邪紀蹟碑)에 잘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50여 년이 지난 1923년 초 한국 교회에서 그를 복자품에 올리기 위해 실시한 조사 활동을 통하여 그의 무덤도 확인이 되었다. 그 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 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 일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 논재)| ※ 참고문헌  <치명일기> 858/ <병인 순교 복자 분묘 조사기-평 안 논재 유정률>, 《교회와 역사》 30(1978. 3)/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145 · 202, 한국교회사연구 소, 1987/ 柳洪烈, 《高宗治下 西學受難의 研究究》, 乙酉文化史, 1962, pp. 114~115. [孫淑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