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길 (1791~1839)

劉進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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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와 아들 성 유대철 베드로.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와 아들 성 유대철 베드로.


성인(聖人).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 일명 용선. 본관은 한양. 성인 유대철(劉大喆, 베드 로)의 아버지로, 서울의 유명한 역관(譯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열심히 공부하였고, 특히 인간과 세상의 기원 및 종말을 분명히 알고자 10여 년 동안 불교와 도교를 연구하였다. 하지만 '만 권 의 책과 동서고금의 학문이 가슴에 가득한 사람' 이라는 세인(世人)의 칭찬과는 달리 진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였다. 그러던 중 1822년(순조 22) 우연히 《천주실의》(天主 實義)의 일부분을 접하고는 천주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하고자, 교우를 수소문하여 교리를 배운 후 입교하였다. 당시 한국 교회는 1801년(순조 1)의 신유박해(辛酉迫 害)로 단 한 명의 성직자이던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 부를 잃었다. 그리하여 성직자 없는 교회, 미사 성제 없 는 상태의 교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좌절과 비탄의 시 간을 보내던 천주교 신자들은 다시 성직자를 모셔 와 사 도 전승(使徒傳承)의 완전한 교회의 위치로 한국 교회를 올려 놓기 위해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1823년(순조 23) 유진길은 정하상(丁夏祥, 바오로)을 만 나 역관의 신분을 이용하여 북경 교회와의 연락 및 성직 자 영입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천주교에 입교 한 이듬해인 1824년(순조 24)에 사신 행차의 일행인 역 관의 자격으로 북경에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정하상과 함께 주교와 신부들을 찾아보고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 런 다음 조선 천주교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며 조선 교회의 신부 영입에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의 천주교인들은 1816년(순조 16)부터 15년 간을 두고 쇄국의 국금(國禁)을 어겨 가면서 오로지 성직자를 영입하려는 일념에서 북경 주교관을 아홉 차례나 두드리며 청원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북경 교회 내 성직자 부족 현상으로 단 한 사람의 성직자도 할애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유진길은 정하상과 상의하여 천주교회의 수위권자(首位權者)인 로마 교황에게 직접 청원하기로 결심하고 1825년(순조 25) 한문으로 쓴 청원서를 발송하였다. 이리하여 평신도 지도자인 유진길 · 정하상까지 청 원서를 발송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 교회에 대한 영속적인 교회 정책의 대책에 대해서도 요청하였다. 이들의 로마 교황에 대한 청원서는 협력적이었던 북경 주교의 손을 거쳐 로마로 이송되기 위하여 마카오 주재 포교성성(布敎聖省, 현 인류 복음화성) 경리국장 움피에레 스(Umpierres) 신부에게 전해졌다. 움피에레스 신부는 한 문으로 된 청원서를 1826년(순조 26) 말에 선교 수도회원 라미오(L.Lamiot) 신부의 도움을 얻어 라틴어로 번역하여 자신의 의견서를 첨부한 뒤 교황청으로 발송하였다. 유진 길 · 정하상 등의 청원서는 발송한 지 2년 후인 1827년(순 조 27)에야 로마 교황청에 접수되었다. 그 결과 1831년(순 조 31) 9월 9일자로 조선 대목구가 설정되었고,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인 '갑사' (Capsa)의 명의 주교(名義主敎)요, 시암(Siam) 교구의 보좌 주교인 브뤼기에르(B. Bruguière, 蘇) 주교가 대목구를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1833년(순조 33) 중국인 유 파치피코(본명 余恒德) 신부, 1836년(헌조 2) 모방(P.P. Manbant, 羅伯多祿) 신부, 1837년(헌종 3) 샤 스탕(J.H. Chastan, 鄭牙各伯) 신부와 앵베르(L.-J.-M. Imbert, 范世亨) 주교가 각각 입국하게 되었다. 1839년(헌종 5)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일어나자 박해 초에는 정3품 당상 역관(堂上譯官)이라는 높은 지위와 대왕 대비의 오빠인 김황산(金黃山)과의 친분으로 그는 체포되지 않았다. 하지만 김황산이 병으로 죽자, 곧 체포 되어 끌려갔다. 포도청에서 서양 신부를 체포하려고 혈 안이 된 관헌들에게 매우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말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 서양 신부들이 체 포되자 함께 의금부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사형 선고를 받아 9월 22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 했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 기해박해 ; 서소문 밖 ; 성직자 영입 운동 ;유대철 ; 정하상) ※ 참고문헌  《기해일기》 《承政院 日 記》 < 日 省錄》 <달레 교회 사》 中/李元淳, 《韓國天主教會史研究) 한국교회사연구소, 1986. [孫淑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