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파치피코 Pacifus(1795~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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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파치피코 신부의 한문본 서한.

유 파치피코 신부의 한문본 서한.


우리 나라에 두 번째로 입국한 중국인 신부. 세례명은 파치피코(Pacificus). 우리 나라에서는 유방제(劉方濟)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의 본래 이름은 여항덕(余恒德)이 다. 1834년 초부터 1836년 말까지 약 3년 간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한 유 파치피코 신부는 1795년 중국의 섬 서(陝西)에서 태어났다. 유 신부는 24세 되던 해, 즉 1821년 9월 1일에 산서(山西) 출신인 3명의 성소자들, 첸 레오(Leone Cien), 찬 바오로(Paolo Cian), 방 베드로 (Pietro Vam) 등과 함께 이탈리아의 나폴리로 가서 1732 년 4월 7일 리파(MatteoRipa)에 의하여 설립된 예수 그리 스도의 성가정 신학교(Collegio S. Famiglia di Ges Cristo) 에 입학하였다. 당시 중국의 산서, 섬서 대목구의 주교가 지원자들을 선발해 나폴리로 보내면 이 신학교에서 양성하도록 했는데, 이 신학교는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 복 음화성)의 직속 관할 신학교였다. 그들이 나폴리의 신학교에서 7년 간 신학과 수사학, 철학 등을 공부하고 있을 때, 당시 신학교 교장인 갈라톨 라(Galatola) 신부가 포교성성에 보낸 서신에서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그 서신의 일부분을 인용해 보면, "저는 위에서 언급한 중국 신학생들 중에 '파치피코 유' 라는 학생의 결심에 대해서 존경하올 추기경님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학생은 여기에 도착한 이후로 끊임없이 자신 의 강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장상들이 원하 고 또 허락만 된다면 조선에 선교를 지원하는 것입니다. 그는 나에게 부탁하기를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포교성성 추기경님께도 개인적으로 알려 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4년은 더 공부해야 자신의 학업이 끝나기에 그때 가서 자기 결심이 성취되도록 추기경님의 동의를 받아 내려고 합니다" 라고 되어 있다. 또 갈라톨라 신부가 1830년 12월 30일 중국의 산서, 섬서 대목구 주교에게 보낸 서신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타나고 있다. 즉 "여기 파치피코 유 신부는 이 신학교 에 도착한 첫해부터 자신의 확고한 의지를 나에게 표명 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합법적인 장상들이 승인한다면 조선에 선교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나는 로마 포교성성의 추기경에게 서신으로 소개했는데 추기경님도 사적으로 그 학생을 관찰해 보고 또 이야기도 듣기를 원하십니다. 또 서기관 몬시놀에게도 알렸는 데,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승인했습니다. 그리고 중국뿐 아니라 조선에 대해서도 선교 사도직 신임장을 그에게 보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교황좌가 공석 중인 시기에는 이를 실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 몬시놀은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유 신부에게 일시적으로 조선을 담당하고 있는 북경교구의 실질 행정관으로부터 필요한 모든 직무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려 왔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유 파치피코 신부가 성가정 신학교에 들어간 해부터 그토록 조선 선교를 열망하게 된 이유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다만 유 신부와 3명의 중국 청년들이 1821년 나폴리 신학교에 들어가던 해에 조선인들의 선교사 청원 서신을 포교성성 장관에게 제출한 사실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그들은 중국에서 올 때부터 그 조선 인들의 서신을 지니고 왔던 것 같다. 그들은 그 서신에 들어 있는 구체적인 조선의 교회 상황과 선교사를 청하 는 간절한 호소 내용도 아울러 읽었을 것이고, 이를 계기 로 조선 선교를 위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무튼 유 파치피코 신부는 10년 간 나폴리 성가정 신 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후, 1830년 12월 5일에 사제로 서품되어 자신의 고향인 중국을 향해 1831년 1월 27일 나폴리를 출발해서 큰 어려움 없이 같은 해 7월 31일 마 카오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유 신부는 포교 경리 담당인 움피에레스 신부로부터 포교성성의 지침에 따라 조선 선 교를 위한 적절한 교육을 받았으며, 또 당시 북경교구를 관리하고 있던 피레스 페레이라(G. Pirés Pereira) 남경 주교로부터 조선 선교에 필요한 모든 직무와 자금 및 기타 필요한 도구들을 제공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12일 이전에 유 신부는 북경을 향해 출발했다. 유 신부가 마카오를 언제 출발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 만, 포교성성의 한 문서(Acta CP. vol. 21 f. 715)에 들어 있는 움피에레스 신부의 1831년 11월 12일자 서신에 보면, 유 신부가 이미 마카오를 떠나 북경으로 향하였던 사실이 나타나 있다. 유 파치피코 신부는 1832년 12월 25일에 북경에 도착했다. 유 신부는 마카오에서 북경을 오는 동안 자신의 고향을 보름쯤 방문했다. 북경에 머물면서 유 신부는 1833년 초에 조선인 한 사람(丁夏祥, 바오로)을 만나 다 음해 초에 국경 근처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조선 입국을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조선 교회의 상황을 묻자 신자수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고 박해 상황은 아주 잠 잠하여 평온함을 누리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1833년 4 월 10일 그는 북경을 출발해 만주로 향했다. 그 해 말에 그는 압록강 근교 국경 변방에서 조선인 신자 정하상과 남이관(南履灌, 세바스티아노)을 만나서 그들의 안내를 받아 1834년 1월 3일 조선 입국에 성공하고 1월 16일에 한양에 도착했다. 그런데 1836년 초(1월 13일)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였다. 그러나 모방 신부와 유 신부와의 관계는 아주 좋지 않았다. 하지만 모방 신부는 1835년 말에 사망한 브뤼기에르 (Bruguière, 蘇) 주교로부터 총대리의 자격으로 조선 대목 구에 대한 관할권을 위임받은 상태였으므로 사실은 유 파치피코 신부의 상급자였다. 결국은 둘의 관계가 악화 되면서 모방 신부는 유 신부의 사목 활동 태도와 사생활 에 대한 고발을 통해 성무 집행 정지를 내리게 되었고, 유 신부는 1836년 12월 3일 조선 신자 정하상 조신철 (趙信喆, 가롤로) · 이광렬(李光烈, 요한) 등과 함께 당시 모방 신부가 선발한 3명의 성소자들, 즉 김대건(金大 建, 안드레아) ·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 최양업 (崔良業, 토마스) 등을 데리고 조선을 떠나게 되었다. 이 소년들은 처음에는 말레이 반도에 있는 파리 외방전 교회의 페낭 신학교로 데려갈 계획이었으나 마카오로 가서 수학하게 되었다. 유 신부는 조선에서 만 3년 간(1834 년 1월 16일~1836년 말) 활동을 하고 조선을 떠나 당시 살베티(Gioacchino Salvetti) 주교가 대목으로 활동하고 있 던 섬서 대목구로 돌아가 사제직 수행을 계속하고 1854 년에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 유방제 ; → 모방, 피에 르 필리베르 ; 브뤼기에르, 바르텔레미 ; 성직자 영입 운동 ; 유진길 ; 정하상 ; 조신철) ※ 참고문헌  金基協, 劉方濟 神父 역할의 재조명>, 《교회사 연 구》 10집, 1995/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성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업 적》,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p. 51/ 全壽洪, 劉方濟 신부의 조선 선 교와 그 문제점>, 《역사와 사회》, 현암사, 1997/ 李榮春, <중국에서의 포르투갈 '선교 보호권' 문제 및 조선 대목구 설정에 관한 연구>, 《민족사와 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Documenti conservati nell archivio dell Istituto Orientale di Napoli(AIN), Cartella la, Lettera di P. Galatola(1830. 12. 30). S.C. vol. 7 ff. 520r~521v/ 1833년 3월 28일 북경에 서 로마 포교성성 담당 대주교에게 보낸 서한. SOCP. vol. 75. f. 6471~649v/ Lettera del A.Galatola al Congregazione Propaganda di Fidei(1828년 8월 23일). SOCP. vol. 76. f. 315/ Estretto di una lettera di Pacipico ad Umpierres de 18. Marzo 1833. [全壽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