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문 (1848~1888)

尹鳳文

글자 크기
9
순교자 윤봉문 요셉의 묘소.

순교자 윤봉문 요셉의 묘소.


순교자. 세례명은 요셉. 본관은 파평. 윤봉문의 선대 (先代)는 경북 영일군 기계면 지가리 치동에서 살았다. 이후 그의 조부 때 양산군 대청 용당 마을로, 이어 동래 안락동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동래 이주 후 동래 안락동 에서 태어났다. 그의 천주교 입교는 증조모 홍(洪) 씨가 외아들이 병으로 죽자 그 슬픔으로 이리저리 다니다 천 주학을 들으니 마음이 평화스러워지고 재미가 있어 열심 히 배운 후 집으로 돌아와 전교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윤 봉문 집안은 비록 선대에 양반 가문이기는 했으나 거주 지를 계속 옮긴 결과 동래 지역에 정착할 당시에는 이렇 다 할 기반이나 연고가 없었다. 그의 부친인 윤사우(尹 士佑, 1827~1883)가 필묵 장사를 생계 수단으로 삼고 또 글을 가르치는 입장에 있었다는 사실이 구전으로 전해진다. 1868년(고종 5) 무진박해(戊辰迫害)를 맞아 동래 지 역에서는 천주교 신자 8명이 사형당하는 사건이 일어난 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윤봉문 집안은 박해를 피해 동래 지역을 탈출하여 영도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거제도로 이주하였다. 박해 이후 거제도로 이주하여 천주교 신앙 생활이 비교적 자유로운 대마도로 건너갈 생각을 한 것이다. 윤봉문과 그의 가족은 거제도로 건너가 버드내[柳洞 內, 현재 柳湖里〕, 박개[外浦], 덕개[德浦] 등지를 거쳐 진목정(眞木亭, 현 거제군 장승포읍 옥포리 국산)에 정착하 였다. 윤봉문은 부친인 윤사우가 전교하여 거제도의 첫 신자가 된 서당 접장(接長)인 진진보(陳進寶, ?~1886)의 딸 진순악(陳順岳, 아네스)과 결혼하였다. 그는 자신이 거주하는 진목정을 중심으로 거제도에 천 주교를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이 지역 천주교의 회장으 로 활약하면서 스스로 수계(守誡)하는 한편, 사도 역할도 적극적으로 하였다. 그가 비신자들을 모아 천주교를 가르친 결과 신자들이 점점 늘어나, 윤봉문 가족이 거제 도로 이주한 지 10여 년 정도 되었을 때인 1887년(고종 24)에는 그의 전교 활동으로 거제도에 이미 많은 신자들 이 생겼다. 당시 거제도에는 첫 영세자가 15명이나 되고, 예비 신자도 40명이나 될 정도로 교세가 성장해 있 었다. 천주교 신앙과 관련 없는 거제도에 10년 동안 이 정도의 신자를 확보한 것은 윤봉문 개인의 노력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로베르(A.P. Robert, 金保祿) 신부 는 윤봉문이 신앙 생활과 전교에 매우 열성적이어서 자신을 돕는 복사로 삼으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로베르 신부가 거제도를 방문하고 떠난 몇 달 뒤 1888년(고종 25) 봄에 진목정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진목정에서 상피(相避) 사건 이 발생하였는데, 이 사건의 주모자가 화(禍)를 피하기 위해 이웃의 천주교 신자들을 고발한 것이다. 이때 체포된 사람들은 천주교 신자 3명과 비신자 1명 등 모두 4명 이었다. 윤봉문은 한인두(韓仁斗, 타데오)와 동반하여 로베르 신부를 만나러 대구로 가던 중이었다. 이때 우연 한 병에 걸려 고성에 사는 한인두의 재종제(再宗弟)되는 한경량(韓景良)의 집에서 3일 간 체류하다가 대구 가는 것을 포기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집으로 돌아온 다음날 포졸들이 교우들을 잡아 문초를 시작하였다. 이때 윤봉 문이 나타나 "죄 없는 교우들을 풀어 주고 회장인 나를 잡아가라" 고 하였다. 그리고 "천주를 믿는 마음 변치 말 자"라고 가족들 앞에서 혈서를 쓴 다음, "교우들이여 나 는 이제 주님 앞으로 나아간다. 이는 오직 내 고장 거제 를 위해서이다" 라고 하직 인사를 나누고는 스스로 체포 당하였다고 한다. 체포된 천주교 신자 가운데서 윤봉문은 이 지역 천주 교회의 회장이므로 특별히 지목되어 통영으로 압송되었 다. 그는 여러 차례 고문을 당하였으나 배교와 교우들에 대한 밀고를 계속 거절하였다. 그를 배교시키려고 하였 던 지방관은 그의 완강한 태도에 당황하여 이 일을 대구 감사(監司)에게 보고하여 처리하고자 하였다. 이때 감사 는 윤봉문을 진주 병영(兵營)으로 보내어 처형하라고 지 시하였다. 진주 병영으로 이송된 윤봉문은 병사(兵使)의 질문에 다만 천주 십계(天主十誡)와 성교 사규(聖敎四 規)만을 큰소리로 외쳤다. 사형이 이미 선고되어 있었으므로 병사는 그를 가둔 후 그날 밤으로 교수(絞首)하라 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그는 1888년(고종 25) 봄 진주 병영에서 순교하였다. (→ 거제 본당 ; 마산교구) ※ 참고문헌  崔奭祐, <開化期의 天主敎會〉, 《韓國天主敎會의 歷 史》, 韓國敎會史研究所, 1982/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1888년도 보 고서>, 《서울敎區年報》 I, 천주교 명동 교회, 1984/ 尹義道 편, 《伊 鳳文殉教 100週年 記念 特集》, 1988/ 閔善姬 . 孫淑景 . 李勛相 編 著, 《朝鮮後期 東萊 地域社會의 엘리트와 天主教 受容者들 그리고 이에 관한 古文書》, 부산교회사연구소, 1995/ 孫淑景, 開港期 지방 사회의 천주교 순교자와 그 성격>,《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 한국 교회사연구소, 2000. [孫淑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