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예원 (1886~1969)
尹禮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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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신부들 및 청년들과 함께(왼쪽에서 두 번째) .
대전교구 신부. 세례명은 토마스. 1886년 충남 홍산 (鴻山) 땅 쇠양이(금양, 쇠양)에서 윤정두(尹正斗, 바르톨 로메오)와 이씨(안나)의 5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금사리 공소를 방문한 공주 본당의 기낭(Guinand, 陳 普安) 신부가 부친을 설득하여 13세에 용산 예수성심신 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14년 3월 7일 명동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황해도 은율 본당에서 사목 활동을 시 작하였다. 이곳에서 청년 신자들에게 독립 사상을 심어 주고 동료 신부들과 신자들에게 독립 운동에 협력할 것을 권유하며 상해 임시 정부의 군자금을 모았다. 그러나 당시 교회 당국은 독립 운동의 관여를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는 윤 신부를 질책하고 경기도 하우현 본당(1920~1927.9)으로 전임시켰다. 하우 현 본당에서는 4년제 초등 과정의 애경 강습소를 열어 교장으로서 자신이 직접 수신(修身, 주로 종교 교육)과 음 악을 가르쳤다. 이후 충북 옥천 본당(1928. 9~1931. 5)을 거쳐 강원도 대화 본당(1931.5~1953)으로 전임되었는데, 1942년 5월부터는 충북 제천(현 원주교구 남천동) 본당의 주임을 겸임하다 강원도 주문진 본당(1953. 3~1957. 6)으 로 부임하였다. 이후 동래의 가르멜 수녀회 지도 신부로 전임되어 부산 온천 본당(1958. 5~1961. 12)과 경남 함양 본당(1961~1963. 1)의 주임을 겸하다가 구포 본당(1963. 1~1965. 12)으로 전임되었다. 윤 신부는 사목했던 거의 모든 본당에서 성당을 건축하였는데, 하우현 본당 재임 기에는 부여에 있는 자신의 땅을 팔아서 성당 아래에 학교를 지었고, 대화 본당에서는 상대화에 있던 성당이 불 에 타자 하대화에 있는 학교를 사서 성당으로 개조하기도 하였다. 그는 음악적 자질도 뛰어나 직접 풍금 반주를 하였고, 〈텬쥬의 모친>이란 성가를 작사 · 작곡하기도 하였다. 또 한 검소하고 청빈한 생활을 하여 저축한 돈으로 성당을 짓고 고아 20여 명을 부양하였다. 1964년 구포 본당에 서 사제 수품 50주년을 맞았으며, 1968년 은퇴한 뒤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에서 요양하다가 1969년 5월 7 일 대전 성모병원에서 위암으로 선종하여 대전교구 성직자 묘지에 묻혔다. ※ 참고문헌 徐相堯, <윤예원 신부>, 《교회와 역사》 95호(1983. 5), 한국교회사연구소/ <평화신문>, 1994. 3. 27 , 13면 ; 4. 3, 13면. 〔金志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