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하 (1922 ~ 1965)

尹龍河

글자 크기
9

작곡가. 세례명은 요 셉. 1922년 3월 16일 황해도 은율군 일도면 농림리에서 3대째 천주교를 신봉하던 윤상근 (尹相根, 가롤로)과 이 마리아의 장남으로 출생. 4세 때에 평북 의주군 비현면(枇峴面) 채 마동으로 이주하여 보 통학교 5학년을 마치고, 생활고로 12세 때 에 다시 만주 봉천(奉天)으로 옮겨 석탑(石塔)보통학교 를 졸업하였다. 프랑스인 신부의 추천으로 음악을 전공하는 신부로 양성될 기회가 있었으나 부모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이후 독학으로 음악 공부를 하며 봉 천 십간방(十間房) 성당 성가대의 지휘자로 활동하였다. 19세에 만주 작곡가 협회 회원, 봉천 조선인 합창단 단장, 신경(新京, 현 장춘) 가톨릭 성가대 지휘자 등으로 크게 활동하며 자작곡 합창 발표회를 여러 차례 갖기도 하여 음악의 신동이라고 불렸다. 1945년 징병으로 징집되자 훈련 도중 탈출하였으며, 광복 직후 용정(龍井) 사범 학교 음악 강사로 일하며 최옥엽(崔玉葉)과 결혼하였고, 함흥 영생(永生) 여학교에서도 교편을 잡았으나 1946년 여름 월남하였다. 서울에 와서 교향곡 〈투쟁과 승리> · <농촌 풍경>과 교성곡 <조국의 영광> 등을 작곡, 지휘하였다. 한국 전쟁 중에는 종군 작가로 군가를 작곡하였으며, 대한 어린이 음악단을 조직하고 가톨릭 음악가 협회 부회장, 한국 작곡가 협회 사무국 국장(1954~1961)을 역임하였다. 또한 동북고등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재임하였으며, 구산(鳩山) 후생학교 음악 강사로 출강하는 한편, 신당동 본당과 인천 답동 본당 성가대 등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가난과 잦은 음주로 건강을 크게 상하여 1965년 7월 23일 간장염과 영양 실조로 사망하여, 금곡 가톨릭 묘지에 안장되었다. 봉천과 신경에서부터 음악가 오현명(吳銥明) · 김대현 (金大賢) · 김성태(金聖泰) · 김동진(金東振) 등과 가깝 게 지냈으며, 시인 박화목(朴和穆) · 이석현(李錫鉉), 음 악가 이상만(李相萬) 등과 교유하였다. 윤용하의 대표작 으로는 국민 가요 <민족의 노래> · <광복절의 노래> 등과 가곡 <보리밭> · <동백꽃> · <고독> 등이 있고, 미완성 오페라 <견우 직녀>, 오페레타 <해바라기 노래>, 교향곡 <개선> 등이 있다. 특히 그는 동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방송국 어린이 프로와 동요 작곡 발표회 등을 통하여 동요 보급에 진력한 바 있다. 1963년 '동요 100곡 발표 축하 음악회' 가 명동 국립 극장에서 열린 바 있으며, <4 뭇잎 배> · <노래는 즐겁다> · <도라지 꽃> 등의 동요를 작곡하였다. 작곡집 《보리밭》(세광출판사, 1972)이 사후에 출간되었다. 독학으로 천재성을 발휘하였지만 가난과 음주로 일생을 보낸 그는 가톨릭 신자로서의 신앙과 순수성을 지켜 나가면서, 서정적인 작품을 많이 남겼다. ※ 참고문헌  尹龍河, '音樂家가 된 동기와 이유' , <世界日報〉 1959. 2. 31 이석현, '지금은 천상 가락을' , <가톨릭신문> 1965. 8. 8/ 李 富榮, 〈尹龍河傳〉, 《新東亞》 1974년 7월호/ 이석현, <윤용하 요셉>, 《경 향잡지》 1991년 12월호/ 尹龍河氏의 作品(歌曲) 發表會 〈天主 敎會報〉 1951. 10. 1/ 박화목, <윤용하와 나>, 《윤용하 작곡 모음》, 캠 브리지음악회, 1985/ 오현명, <윤용하의 만주 시절>, 《윤용하 작곡 모음》 이상만, <윤용하, 그 맑고 다정한 노래>, 《윤용하 작곡 모음》. 〔崔起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