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헌 尹持憲(1764~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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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초기 교회의 신자.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윤지충(尹持 忠, 바오로)의 동생. 1764년 전주부 양양소면(良梁所 面)에서 아버지 윤경(尹憬)과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를 따라 진산군 장구동(현 금산군 복수면 구례리)으로 이주했다가, 1791년 신해박해 이후 고산현(高山縣) 운동면(雲東面, 현 완주군 운주면 저구리) 으로 이사하여 매약(賣藥)으로 생계하였다. 그는 1789 년 윤지충을 통해 입교하였으며, 1791년 윤지충이 조상 제사 문제로 순교한 뒤에는 한동안 교우들과의 왕래를 끊었고, 거처도 고산으로 옮긴 듯하다. 박해 후 다시 신앙 생활을 시작한 윤지헌은, 1795년 주문모(周文謨, 야 고보) 신부가 전라도를 방문했을 때 세례를 받았고, 1795년 7월에는 북경 밀사로 황심(黃沁, 토마스)을 천거하는 등 교회 일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한 그는 1800 년 봄, 과거를 보기 위해 상경했다가 강완숙(姜完淑, 골 롬바)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를 만났고, 11월에는 다시 상경하여 고종 사촌인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를 만나기도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로 체포된 윤지헌은 황심을 북경 밀 사로 천거한 사실과 이우집(李宇集)의 폭로로 알려진 대박청래(大舶請來) 사실을 자백하였다. 이에 그는 국사범으로 취급되어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 · 유관 검(柳觀儉) 등과 함께 전주에서 서울로 압송되었고, 10 월에 능지처참의 판결을 받은 뒤 다시 전주로 이송되어 10월 24일 풍남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아내 유종항(柳宗恒)은 종이 되어 흑산도로 유배 되었고, 15세 된 아들 종원(鍾遠)은 제주도로, 13세 된 아들 종근(鍾近)은 거제도로, 4세 된 종득(鍾得)은 해남 현의 노비로 유배되었으며, 딸 영일(英日)은 경흥으로, 성애(成愛)는 벽동군의 노비로 유배되었다. ※ 참고문헌 《邪學懲義》 《闢衛編》/ 《推案及勒案》 《달레 교회 사》 上. 〔河聲來〕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