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아 빌리아르 Julia Billiart(1751~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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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성녀. 나무르(Namur)의 노틀담 수녀회 설립자. 축일은 4월 8일. 〔생애와 활동〕 1751년 7월 12일 프랑스 피카르디(Picardie) 지방의 보베(Beauvais) 교구에 속한 퀴비이(Cuvilly) 라는 작은 마을에서 아버지 장 프랑수아(Jean Frangois Billiart)와 어머니 마리 루이즈 앙투아네트(Marie Louise Antoinette Debraine) 사이의 일곱 자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그녀는 매우 신앙심이 깊고 지적으로 뛰어나 7세에 교리를 깨쳤으며, 친구들을 모아 교리를 암송하게 하고 그 내용을 설명해 주곤 하였다. 어린 시절 그녀가 받은 교육은 삼촌인 티보 길베르(Thibault Guilbert)가 운영 하던 시골 초등학교에서 배운 것이 전부였다. 그녀의 영 적인 진보가 매우 빨랐기에 본당 주임인 당지쿠르(Dangicourt) 신부는 9세인 율리아에게 첫 영성체를 허락하고 견진성사를 받도록 해주었다. 14세 때 그녀는 동정 서 원을 하였다. 소매상을 운영하던 율리아의 부 모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자, 16세 때에는 들에서 추수하는 일을 하여 부모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이러한 지극한 효심과 신심으로 사람 들의 칭찬과 존경을 받았다. 1774년 23세 때 신경 조직이 마비되는 증 세가 나타났고, 1782 년에는 의사의 부주의로 회복 불가능한 전신 마비가 되 어 이후 누워 지내야 하였다. 매일 침대에 누워서 생활하 면서도, 그녀는 봉성체를 받아 모시면서 신앙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녀는 특별한 기도의 은사를 받아 4~5시간 씩 관상 상태에 빠지기도 하였으며, 나머지 시간에는 제 대보를 만들거나 동네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으며, 특히 첫 영성체를 준비하는 아이들을 보살피기도 하였다. 노틀담 수녀회 설립과 확장 :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 율리아는 보두앵(Bandouin) 남작 부인과 함께 아 미앵(Amiens)으로 피난을 갔다. 아미앵에서 3년 반 동안 다섯 번이나 거처를 옮기며 지내던 그녀는, 그곳에서 제 쟁쿠르(Gézaincourt)의 자작 부인 프랑수아즈(Françoise Blin de Bourdon)를 만났다. 이 부인은 자선 방문 목적으 로 율리아를 찾아왔던 것이다. 자작 부인이 율리아를 만 났을 당시 38세였으며, 경건한 신앙 생활과 자선 사업을 해 오던 사람이었다. 자작 부인은 공포 정치 기간 동안 가족과 함께 옥에 갇혀 지냈으며, 로베스피에르(M.F.M.-I. de Robespierre, 1758~1794)의 실각을 틈타 죽음을 모면하고 간신히 탈출하였다. 부인은 처음에 거의 말도 없 고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율리아에게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율리아의 아름다운 영혼을 보고 감동하였 다. 점차 율리아를 중심으로 자작 부인의 친구들인 귀족 출신 젊은 여성들의 모임이 형성되었다. 율리아는 그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관대하게 돌보면서 하느님을 만나 는 내적인 삶을 영위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들은 활발 한 공동체 생활을 하고 싶어했지만, 그에 필요한 몇 가지 부분들 때문에 모두 포기하였고 자작 부인만 남았다. 1804년에 자작 부인(후에 수도명을 요셉이라 함)과 율리 아는 아미앵 교구장의 후원을 받아 노틀담 수녀회를 설 립하였다. 이 회의 첫째 목표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어린 이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몇몇 젊은 여성들이 부인과 율 리아를 도와 활동하며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였으며, 이 들은 '신앙의 사제회' 원장 신부인 바랭(R.P. Varin)의 지 도를 받았다. 또한 수녀회가 설립된 해에, 율리아는 병이 완쾌되는 기적의 은혜를 체험하고 이후 더욱 선교에 힘 쓰게 되었다. 1806년 6월 19일 노틀담 수녀회는 국가의 승인을 받았는데 이때 회원은 30명이었다. 그 후 프랑스와 벨기에의 여러 도시에 수녀원이 설립되었다. 그중에서 게헨(Gehen)과 나무르의 수녀원이 중심이었는데, 자 작 부인이었던 요셉 수녀가 나무르 수녀원의 초대 원장이 되었다. 그런데 수녀회가 아미앵 교구를 벗어나 확장되어 감에 따라서 율리아는 일생에서 가장 큰 슬픔을 겪게 되었다. 그것은 수녀회의 고해 신부인 바랭이 아미앵에 없는 동안 삼부시(Sambucy de St. Estève) 아빠스가 이 새 수녀회 의 규칙과 회헌을 바꾸어 옛 형태의 수도원과 조화를 이 루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이를 위해 드멍돌(Demandolx) 주교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결국 율리아가 아미앵 교구를 떠나도록 만들었다. 율리아는 자신을 초대한 피자니(Pisani de la Gaude) 주교 관할의 나무르로 떠났다. 회원들 중에 두 사람만 제외하고 모두 그녀를 따라감으로써 나무르의 수녀원은 이후 노틀담 수녀회의 본원이 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드멍돌 주교가 그녀 에게 아미앵으로 돌아와 수녀원을 재건해 달라고 청하였다. 율리아는 이 요청을 받고 아미앵으로 돌아가 회원들 을 모으고 활동을 재개하려고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나무르로 되돌아갔다. 이후 남은 여생을 수녀들의 굳센 내적 신심과 정신을 양성하기 위해 매진하였다. 과로와 노환으로 율리아는 1816년 4월 8일 나무르 본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공경과 시성〕 게헨의 주교 드 브로질(DeBrogile)은 율 리아가 외적인 사도직보다 내적인 하느님과의 일치를 통 해 더 많은 영혼들을 구했다고 말하였다. 위기와 곤경의 시기에 많은 초자연적인 은혜를 받았던 율리아는, 1804~1816년까지 12년 간 15개의 수녀원을 세웠다. 그녀는 이를 위해서 120번의 길고 힘든 여행을 했으며, 수녀들과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1815년에 나폴레옹 전쟁의 전쟁터가 된 벨기에에서 몇몇 수녀원들이 군대가 지나가는 길목에 있어 많은 걱정을 했지만, 큰 해를 입지 는 않았다. 율리아의 성덕에 대한 소문은 널리 퍼져 나갔으며, 그녀로 인해 여러 가지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881년에 시작된 성인의 시성 과정은 1906년 종결되어 그 해 5월 13일에 교황 비오 10세(1903~1914)에 의해 복자로 선언되었으며, 1969년 6월 22일에는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에 의해 시성되었다. (→ 노틀담 수녀회) ※ 참고문헌 G. Marsot, 《Cath》 Ⅵ, pp. 1224~1225/ Les Bénédictins de Ramsgate réd., Dix Mille Saints Dictionnaire hagiographique, Brepols, Belgique, 1991, p. 294. 〔宋炯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