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아나 Juliana(?~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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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4세기 초의 동정 순교자. 축일은 2월 16일. 〔생애 및 전설〕 수난기에 따르면, 소아시아의 니코메디아(Nicomediaia) 출신인 율리아나는 어린 소녀였을 때, 아버지 아프리카누스(Africanus)의 일방적인 뜻으로 이교도 청년인 에빌라수스(Eviasus)와 결혼하도록 약속되었다. 하지만 율리아나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에 원한을 품은 에빌라수스는 그 마을의 집정관으로 부임하게 된 것을 계기로 율리아나를 체포하여 여러 가지 형벌을 가하고, 마침내는 그녀를 참수시켰다. 이 이야기 외에도 또 다른 전설이 전해지는데, 즉 율리아나가 아버지와 청혼자의 뜻에 따라 결혼하도록 설득시키려는 악마와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는 것이다. 《로마 순교록》(Martyrologium Romanum, 1970)에서는 율리아나가 니코메디아에서 순교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니코메디아의 율리아나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탈리아 남부의 쿠마(Cuma)라는 마을에서 순교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유해 이전 및 공경〕 율리아나가 순교한 지 얼마 후 소 피아(Sophia) 혹은 세포니아(Sephonia)라는 귀족 신자가 그녀의 유해를 나폴리 근처 푸졸레스(Pouzzoles)로 옮겨 갔다. 568년에는 사람들이 롬바르드 족으로부터 유해를 지키기 위해 쿠마로 다시 옮겼다. 《예로니모 순교록》(Martyrologium Hieronymus)의 엡테르나흐(Epternach) 사본에는, 쿠마에 사는 사람들이 6세기경에 율리아나의 성덕을 기리며 공경하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In Campania Cumas natale sanctae Iulianae : Delehaye, Comment. in martyrol. hieron., 99~100).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는 나폴리의 주교 포르투나토(Fortunatus)에게 그곳의 한 처녀가 율리아나를 공 경하기 위해 만든 기도소를 율리아나를 공경하는 성역 (sanctuaria)으로 조성하라고 촉구하였다. 교황의 서한에는 성 에라스모와 막시모, 율리아나에게 봉헌된 수도원에 대해 언급한 것이 있으며, 또 다른 서한에는 교황이 나폴리 주교에게 순교자 율리아나의 성역을 허가하도록 촉구한 글이 있다(Registr, Ⅸ, 170, 181). 1207년 2월 25일에 율리아나의 유해는 나폴리로 장엄한 예식을 통해 이전되었고, 이후부터 율리아나의 공경이 나폴리 왕국 전체와 이탈리아 · 스페인 · 프랑스의 일부 지역으로 확산 되었다. 율리아나 공경의 오랜 전통과 역사성은 나폴리의 전례 력과 《젤라시오 성무집 전서》(Sacramentarium Gelasianum) 에 의해서 증명된다. 그리고 영국에서도 율리아나의 공경이 이루어졌음이 730년 《베다의 순교록》(Martyrologium Bedae)과 사룸 전례(ritus Sarum)를 통해 증명되고 있다. ※ 참고문헌  Ph. Rouillard, O.S.B., 《Cath》 Ⅵ , pp. 1247~1248/ Les Bénédictins de Ramsgate réd., Dix Mille Saints Dictionaire hagiographique, Brepols, Belgique, 1991, p. 296/ David Hugh Farmer, The Oxford dictionary of Saints, Oxford Univ. Press, 1987, p. 244.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