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오 Julius
글자 크기
9권

1 / 2
율리오 1세 교황.
① 율리오 1세(?~352) : 성인. 교황(337~352). 축일 은 4월 12일. 교황 율리오 1세의 생애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많지 않다. 특히 그가 교황이 되기 전의 이력과 활동에 대해서는 더 더욱 없다. 그의 교황 재임 시기에 가장 뛰어난 업적은 아리우스주의 논쟁의 해결을 통해 로마의 위상을 높인 것이다. 이것은 매우 큰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선임자였던 실베스테르 1세(314~335)가 이 이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아무런 성 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콘스탄틴 대제(306~337)를 계승한 콘스탄티누스 2세 황제(337~340)는 트리어(Trier)로 추방되었던 아타나시오 (Athanasius Alexanctinus, 295?~373)를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나 아리우스주의자들은 339 년에 안티오키아에서 교회 회의를 열고 가빠도기아의 그레고리오(+345)를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내세웠다. 그 해 3월 18일 알렉산드리아를 떠난 아타나시오는 로마에 머물면서 교황에게 도움을 청했다. 교황은 이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교회 회의를 개최하면서 동방 교회의 주교 들에게도 초청장을 보냈다. 하지만, 아리우스주의자인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Eusbius Nicomediae, +342)를 따르는 주교들은 초정을 거부했다. 340년과 341년에 걸 쳐 개최된 로마 교회 회의에서 아타나시오의 복권이 최종 결정되었고, 교황은 이 내용을 동방의 주교들에게 서한을 보내 자세히 알렸다. 이 편지를 통해 아타나시오를 위한 중재를 시도하였으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결국, 콘스탄티누스 2세를 계승한 콘스탄스 황제(337~350) 는 교황과 서방 주교들의 요청으로 아리우스주의자들로 부터 핍박을 받은 주교들의 복권을 위해 중재에 나섰다. 이때 동방의 황제로 콘스탄스의 형제인 콘스탄티우스 2 세(337~361)는 이에 동의하여 342~343년에 사르디카 (Sardica)에서 교회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 교황은 2명의 대리인을 파견하였다. 그 결과 주교들의 재판에 관한 절차가 마련되었고, 또한 이에 대한 교황의 결정권이 확립되었다. 이를 통해 로마 교황의 권위는 강화되었다. 그러나 동방 교회의 주교들은 별도의 회의를 통해 아 타나시오를 단죄하였고 이것은 결국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비록 사르디카 교회 회의의 결정으로 아타나시오의 무죄가 인정되었지만, 즉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경쟁자였던 그레고리오가 사망한 후에야 아타나 시오는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때에 교황은 알렉산드리아의 성직자와 신자들에게 아타나시오의 복권을 환영할 것을 권하였다. 이는 교황의 주교에 대한 우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일이 되었다. 또한, 아리우 스주의자라는 이유로 추방되었던 우르사치오(Ursacins) 와 발렌스(Valens)는 이단에 물들었던 것을 반성하고, 교 황에게 복권을 청하였다. 이에 교황은 이들을 로마로 불러 바른 신앙으로 돌아왔다는 증명을 받아 낸 후 복권시 켰다. 이 또한 교황의 권위를 높이는 상징적인 일이었다. 이는 당시에 여전히 강력한 발언권을 가진 동방 교회의 주교들에게는 반가운 일이 아니었고, 동방과 서방 교회 간의 틈은 메울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그 외에 교황 율리오 1세의 재임 기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자세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분명한 것은 그 의 재임 기간 중에 로마의 신자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는 점이다. 또한, 여러 개의 성당들이 건축되었다. 특히, 산 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Santa Maria in Trastevere) 성당 과 현재 산티 아포스톨리(Santi Apostoli) 성당이라고 불리는 율리오 대성전(Julian Basilica)이 그의 재임 기간 중에 건축되었다. 교황의 편지들은 아타나시오의 《아리우스주 의자들을 반박하는 호교론》(Apologia contra arianos, 357)에 수록되어 있다. 교황 율리오 1세는 352년 4월 12일에 선종하였고, 아우렐리아가(Via Aurelia)에 있는 칼레포디우스(Calepodius)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이름은 354년부터 로 마 전례력에 수록되어 성인으로 공경을 받았다. 이로써 교황 율리오 1세는 생전에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 아리우스주의 ; 아타나시오, 알렉산 드리아의) ※ 참고문헌 S. Fleischmann, Daten der Weltgeschichte, Bassermann, 1992/ J. Chapin, 8, p. 51/ R. Bäumer, 《LThK》 5, p. 1203/ H. Böhmer, 《PRE》 9, pp. 619~621/ R. Kottje, 李文 Ökumenische Kirchengeschichte, Bd. 1, Matthias Griinewald Verlag, 1993/ H.-U. Rosenbaum, Biographisch-Bibliographische Kirchenlexikon, Bd. Ⅲ , Verlag Traugott Bautz, 1992/ 2000 Jahre Christentum, Karl Miiller Verlag, 1989/ É. Amann, 《DTC》 8, pp. 1914~1917. 〔李種凡〕 ② 율리오 2세 (⇨ 르네상스 교황) ③ 율리오 3세(1487~1555) : 교황(1550~1555) . 본명은 조반니 마리아 치오키 델 몬테(Giovanni Maria Ciocchi del Monte). 반종교 개혁을 위한 공의회의 장소를 트리엔트로 옮겨 개최한 인물. 〔초기 생애〕 조반니는 1487년 9월 10일 로마의 명문 판사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페루지아와 시에나에서 교회법과 사회법을 공부하였으며, 교황 율리오 2세(1503~ 1513)의 집사 일을 하였다. 1511년에 삼촌인 안토니오 (Antonio del Monte) 추기경을 계승하여 시폰타(Siponto)의 대주교가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26세에 불과하였다. 1520년에는 파비아의 주교가 되었으며, 교황 글레멘스 7세(1523~1534) 때에는 두 번이나 로마의 총독을 역임하였다. 1534년에 교황 바오로 3세(1534~1549)는 그를 볼 로냐의 부(副) 교황 사절로 임명하였고, 1536년 12월에 는 그를 사제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1543년 10월에는 팔레스티나의 주교 추기경으로 임명되었으며, 1545년 12월 13일 트리엔트에서 개최된 공의회의 공동 의장이 되었다. 이렇게 그가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은 인맥뿐 아니 라 법률과 조직 관리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추기경단의 최고 연장자로서 체르비니(Marcelllo Cervini, 후에 교황 마르철로 2세로 21일 간 재임)와 영국의 헨리 8세와 맞서다 피난 온 폴(Reginald Pole, 1500~1558) 과 더불어 공의회 의장단을 구성하여 회의를 이끌었다. 교황의 비밀 지시에 따라 그는 신성 로마 제국 카를 5세 (1516~1556) 황제의 의견과 달리 공의회를 이끌었다. 황제는 독일의 프로테스탄트도 이 공의회에 참석할 수 있 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회의의 내용도 교회 의 질서와 종교 개혁 문제만을 다루기를 원했다. 신앙 교 리와 교회 개혁 문제를 동시에 다루는 것은 황제가 보기에는 교회의 분열을 회복하는 데 장애가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이 공의회에서 황제측의 주장은 반영 되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는 공의회 개최 장소를 트리엔트에서 볼로냐로 옮기는 것을 관철하였다. 이 와중에 1549년 11월 10일 교황 바오로 3세가 선종하자 새 교황 선출을 위한 회의가 시작되었다. 48명의 추기경이 모인 이 회의가 2개월이나 걸린 이유는 합스부르크 왕가와 프랑스가 공의회를 지속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둘러싸고 의견이 대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황제파, 프랑스파 그리고 파네세(O.Farnese) 추기경파 등 으로 나뉘어 대립하였기 때문에 논의가 더욱 길어질 수 밖에 없었다. 황제파와 파네세 추기경파가 연합하여 폴과 후안 데 톨레도(JiandeToleo)를 후보로 내세웠다. 그러나 소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강력한 프랑스파의 반대로 관철되지 못했다. 파네세 추기경파는 프랑스파와 연합해서 델 몬테 추기경을 추천하여 황제가 강력히 반발함에도 불구하고 1550년 2월 8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교황으로서의 활동〕 교황 율리오 3세는 즉위 직후 파 네세 추기경에게 파르마(Parma) 교구를 다시 찾아 주었 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어 그가 황제와 맞서기 위해 프랑스와 연합하자 교황은 황제와 연합하여 파네세 추기경과 대립하였다. 교황은 자신의 조카인 감바티스타(Gambattista del Monte)를 사령관으로 하고 밀라노의 곤자가 공작(Duke Gonzaga)과 협공하여 파네세 추기경의 세력의 본거지인 파르마를 공략하도록 했다. 트리엔트 공의회 : 교황은 1550년 11월 14일 칙서 <쿰 앗 톨렌다)(Cum ad Tollenda)를 발표하여 공의회의 장 소를 볼로냐에서 트리엔트로 다시 옮기도록 하였다. 그리고 1551년 5월 1일 공의회를 재개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프랑스측의 주교들이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를 5세 황제는 프랑스의 공격을 피해 오스트리아의 인 스부르크에서 이미 도망간 후였다. 북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군이 승리를 거두자 교황도 프랑스와 평화 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파네세 추기경은 여전히 파 르마를 자신의 영지로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교황은 황제와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 다. 그러나 독일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프랑스와 연합하 였기 때문에 교황은 어려움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교황은 서로 반목하고 있는 카를 5세와 프랑스의 앙리 2세(1547~1559)를 중재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실패하였다. 그래서 공의회의 참석자는 이탈리아, 스페 인 그리고 독일에서 온 주교와 영주들뿐이었다. 독일에 서는 이때 공의회에 처음 참석하였는데 마인츠, 트리어, 그리고 쾰른에서 왔다. 1551년 11월에는 독일의 프로테 스탄트 대표들도 뷔르템베르크(Württemberg) , 스트라스 부르(Strassburg) 작센(Sachsen) 그리고 브란덴부르크 (Brandenburg)에서 트리엔트로 왔다. 그러나 이들이 내세 운 주장들은 다른 공의회 참석자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미 통과된 법전, 교령 등을 프로테스 탄트의 기준에 따라 다시 논의하고, 교황에 대한 모든 주교들의 충성 맹세를 무효화하고 교황이 원칙적으로 공 의회에 관여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런데 독일의 몇몇 제후들이 황제에게 반기를 드는 사건이 일어나자 공의회에 참석한 독일 대표들은 서둘러 귀국했 고, 이 때문에 공의회는 1552년 4월 28일에 중단되었 다. 사실 공의회를 지속하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겨 왔던 교황에게는 매우 반가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교황이 교 회 내부적인 개혁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교황은 공의 회 기간 동안 작성된 개혁안들을 칙서 형식으로 정리하 도록 추기경 특별위원회를 설립하여 명령하였다. 이것은 발표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문서를 바탕으로 신학교에서 교육이 이루어져서 후일 교회 내부적인 개혁에 큰 역 할을 하는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교회 개혁에 커다란 공헌을 한 예수회를 교황은 전폭적으로 지원하였다. 족벌주의 정책 : 교황은 교황 선출시에 문서로 맹세한 친인척의 교황청 등용 척결을 무시하고, 교황이 된 직후 자신의 친인척들에게 커다란 혜택을 베풀기 시작하였다. 교황이 사람들을 더욱 실망시킨 것은 한 아이에 대한 편 애였다. 추기경 특사 시절에 교황은 파르마의 거리에 떠 돌던 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자신의 원숭이를 돌보는 일 을 시켰다. 그 아이를 자신의 조카로 입양하여 이름을 인 노첸조(Innocenzo del Monte)라 하였다. 그리고 교황에 선출되자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17세에 불과한 이 소년을 교황청으로 데리고 가서 추기경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모든 고위 성직을 거치게 한 후 교황청 장관 에까지 임명하였다. 이 밖에도 자신의 친인척들을 고위 성직에 임명하여 더욱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모습 은 스페인 주교들이 교황의 재산과 권위를 찬탈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하는 구실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이러한 공격을 최대한 방어하였다. 기타 업적 :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예수회 를 적극적으로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1552년에는 독일 신학원(Collegium Germanicum)을 세워 독일 교회 지원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영국에 가톨릭 교회가 다시 들어서는 데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에드워드 6 세(1547~1553)의 뒤를 이어 1553년 왕위에 오른 메리 여왕(1553~1558)의 치하에서 영국의 가톨릭 교회가 잠시 재건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교황은 영국의 가톨릭 교회 재건을 위해 폴 추기경을 단장으로 하는 사제들을 영국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영국 의회는 1555년 교황에게 무조건 복종할 것을 서약하는 문서를 보냈다. 그러나 교 황은 이 문서를 받아 보지 못하고 1555년 3월 23일 선종하였다. 〔평 가〕 교황 율리오 3세는 선임 교황인 바오로 3세와 마찬가지로 매우 세속적인 경향을 지닌 인물이었다. 하 지만 즉위 초기에 매우 열정적으로 교회 내부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의도로 트리엔트 공의회를 재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임기 말기에는 심한 병에 시달려 교회의 개혁을 마지막까지 관철시키지 못하였다. (→ 영국 ; 트리엔트 공의회) ※ 참고문헌 H. Immenkotter, Biogruphickh-Bibliographisched Kirchenlexikon, Bd. II, Verlag Traugott Bautz, 1992/ M. Ott,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 II, Kevin Knight, 2000/ 2000 Jahre Christentum, Karl Miiller Verlag, 1989/ L. von Ranke, Die Pajpste, Biichergilde Gunterberg, 1962/ G. Schwaiger, 《LTnK》 5, pp. 1205~106/ E.D. McShane, 《NCE》 8, pp. 54~55/ G. Mollat, 《DTC》 8, pp. 1920~1923/ G.B. Picotti, 《EC) 6, pp. 758~760. 〔李種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