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 恩寵

〔라〕gratia · 〔영〕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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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총으로 가능하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총으로 가능하다.


"하느님의 자녀(요한 1, 12-18), 입양 자녀(로마 8, 1417), 신성(神性)과 영원한 생명(2베드 1, 3-4)을 나누어 받는 사람이 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호의이며 거저 주시는 도움" (《가톨릭 교회 교리서》 1996항). 하느님의 구원 경륜 안에서 그분의 사랑을 통해 끊임없이 지속되는 놀라운 구원 사건이다. I . 의 미 〔성서에서의 용어와 의미〕 어원 : 성서에서 '은총' 을 의미하는 단어는 그리스어 "카리스" (χάρις)인데 라틴어 로는 '그라시아' (gratia)로 번역된다. 어원학적으로 보면, "카리스"의 어근은 "카르"(χάρι)로서 번쩍이거나 빛을 발하는 어떤 것과 관련이 있는데, 이로부터 즐거워하거나 매혹하고 기쁨을 주는 의미가 파생되었다. 따라서 "카르"는 객관적으로는 기쁨을 드러내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의미하며, 주관적으로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근 거로 "카리스"의 세 가지 기본 의미가 드러난다. 첫 번째 의미는 기쁨을 가져다주는 매력 · 호감 · 아름다움 · 우아 함이고, 두 번째 의미는 어떤 사람에 대한 사랑 · 호의 · 보살핌이다. 능동적으로는 어떤 주권자가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며, 수동적으로는 타인으로부터 받 는 선물이나 호의로 이해할 수 있다. "카리스"는 또 다른 "카리스"를 유발하는데, 이는 "카리스"의 세 번째 의미로써 이미 받은 "카리스"의 증여자에게 보답하는 행위로 친절을 베푼 자에게 대한 감사의 응답이다. "카리스"에 대한 이러한 의미가 그리스 문화권에서 충분히 활용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로마 제국 시기에는 더욱더 발전된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카리스"는 어떤 고위 통치권자에 의한 어떤 사람의 승진이나 혜택 부여를 나타내는 통상적인 표현이 되며, 종교적인 의미 로 "카리스"는 위로부터 몇몇 소수에게 베풀어진 저승의 능력(δύναμις)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카리스"의 어원적인 의미는 신약성서 안에서도 발견 된다(루가 4, 22 ; 골로 4, 6).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어원적 의미에 근거하여, 신약성서는 "카리스"의 의미를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경륜 안에서 은총의 의미를 발전시켰다(로마 5, 2 ; 6, 14 ; 갈라 2, 21 ; 5, 4). 특히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무상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 느님의 은총은 거의 예외적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집중되어 있다. 비록 그 강조점이 다르게 나타날지라도, 은총에 대한 성서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예수가 바로 하느님의 은총이며 은총 사건이다. 은총의 가장 위대한 표징이 예수의 전적인 사랑이기 때문이다(로마 5, 9-11 ; 1고린 15, 2 이하 ; 히브 10, 29 ; 1베드 2, 21). "그분(하느님)은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 모두를 위해 그분을 넘겨 주셨는데 어찌 그 아드님과 더불어 또한 모든 것을 우리 에게 은혜로 베풀어 주시지 않겠습니까(χαρίσεται)?" (로마 8, 32) 성서 개념의 유래와 정착 : 칠십인역 성서에서 "카리스로 번역되는 무상의 선물인 '은총' 을 의미하는 히브 리어 용어들은 원칙적으로 "헨" (חֶן, 호의)과 항상 그리 스어의 "엘레오스" (ἔλεος)로 번역되는 "헤셋" (חֶסֶד, 자 비)이 있다. "헨" 은 자의적인 의미로 '어떤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 을 뜻하고, 일반적인 의미로는 '호의를 나타내는 것' 을 뜻한다. 따라서 이 용어는 보통 '어떤 사람의 총애를 받는다' 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노아가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고 할 때,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 반면 "헤셋"은 '신뢰 · 진실' 을 의미하는 용어 "에메트" (אֱמֶת)를 자주 동반하는데, 이는 신뢰로 서로 동참하며 가까이 지내는 사람의 충실성을 표명한다. 하느님은 "자 비롭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חֶסֶד) 와 진실(אֱמֶת)이 충만한"(출애 34, 6) 분으로 찬양받으신 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당신 백성과 영원한 계약을 맺으시기 때문이다(신명 5, 10 ; 7. 9. 12). "계약을 맺을 때 계 약자들은 희생 짐승을 반으로 갈라 그 사이를 지나간다. 약속을 어긴 자는 이 짐승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야훼께서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셨다면 이런 계약을 맺으신 것이다(예레 34, 8-18). 야훼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완전히 희생할 각오를 하며 인간과 계약을 맺은 것이다. '나는 너희의 하느님, 너희는 나의 백성' 이 파괴되면 야훼 자신도 이런 죽임을 당하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는 자신을 저주하는 계약이다"(이제민, 《우리 아버지》,p. 58). 이렇게 하느님의 자비(חֶסֶד)와 진실(אֱמֶת) 로 자기 헌신을 각오하는 백성을 향한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총 사건' 을 향하고 있다. 하느님의 무상 적 은총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히브리 용어 "헨" (동사 형은 חָנַן) "헤셋"의 활용 의미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 다. '하난' (חָנַן)은 백성을 위한 하느님의 친절한 현존과 관심을 강조하는데 특히 약한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과의 하느님의 유대를 강조한다. '헤셋' 은 의무를 초월한 사랑 곧 풍부히 넘쳐흐르며 무상의 사랑을 강조한다. 먼저 인간을 사랑한 하느님께 드리는 인간의 응답은 의로움과 이웃 사랑 안에서 표명되어야 한다" (Stephen J. Duffy, Dynamics of Grace, p. 23). 칠십인역 성서 이후 유대교와 그리스적 유대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게 될 '은총' 에 대한 발전적 의미의 성서적 토양을 마련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Philo, 기원전 15/10~서기 45/50)는 "모두가 은총이며 모두가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에게 부여되는 카리스" 라는 사상 을 자신의 저서 여러 곳에서 피력하였다. "하느님의 은 총은 의지를 포함해서 모든 것을 선행한다. 간택이 창조 이전에 현존한다" (에녹 81, 5). "번개가 치면 천둥이 울리듯이, 겸손한 사람에게는 은총이 선행한다" (집회 32, 10).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업신여기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다"(잠언 3, 34).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율법(Torah)을 통한 구원과 대립시켰다. 이스라엘의 선택이 그리스도인의 선택으로 완성되었다고 본 바오로의 관점은 은총 교 리에 대한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베풀어진 하느님의 예언적인 은총이었다. 당시 유대교는 신앙에 의한 의화와 율법에 의한 의화를 구별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유대교에서 "카리스"의 핵심은 율법 안 에서 이행된 하느님 계시 안에서의 신앙이었기 때문이다. 바오로는 구약의 여러 영웅들 즉 어떤 개인적인 행업 에 의존하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을 입었던 노아 · 멜키세 덱 · 아브라함 · 이사악 · 야곱(로마 4장 ; 9, 20-22 ; 히브 11장)을 상기하면서 은총 개념을 수용하였다. 그러나 바 오로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을 대신하였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은 은 총이며, 인간은 이 은총에 감사로이 응답하도록 초대되었다(로마 7, 24-25). 이렇게 성서적인 용어로 발전된 '은총' 즉 "카리스"라 는 말은 신약성서 전체에서 바오로에 의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101회). 이 용어는 바오로의 신학적 관점과 더불어 다른 여러 주제들과 관련성을 지니고 나타났다. '은총' 이라는 용어는 적어도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Hiipponensis, 354~430) 이전까지는 신학적 주제가 되지 못하였다. 바오로의 '은총' 개념은 어떤 신학적 개념 정립에 서 기인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신앙 체험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따라서 바오로가 사용하는 "카리스"는 "구원 의 다양한 가치를 표명하는 표징 용어"의 상태에 머물고 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은총' 의 포괄적인 의미는 특 히 행위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친절' · '호의' 를 뜻하 는데 거의 하느님의 자비 행위를 뜻한다. 이 배경에는 히 브리 용어 "헨"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카리스"를 정규적으로 사용하던 칠십인역의 활용 의미가 강하게 깔려 있다. 유대인들의 인식에서 하느님의 호의는 하느님과 계 약 백성 사이의 유대감으로 이해되었다. 바로 하느님 선택의 자비로운 호의가 상호 공감과 인식과 현존을 창출 한다(출애 33, 12-23). 〔신학적 의미〕 은총이란 용어는 가톨릭이나 프로테스 탄트에서 신학 용어로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일상적 용 어로는 현재 통용되고 있지 않다. 신학적인 용어로 사용되기 이전의 의미는 그리스 시대 당시 "카리스"의 발전 과정과 유사하다. 한국 천주교회에서 예전에 사용했던 '성총' (聖寵)이라는 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임금의 사랑"을 의미하는 '성총' 이 하느님(天主)의 은혜 혹은 사랑에 적용된 것이다. 그런데, 한자어의 본래 자전적인 의미를 헤아려 본다면, '은총' (恩寵)에는 '사랑' 이라는 의미가 기본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따라서 '은총' 이라는 용어가 "카리스"나 "그라시 아의 번역어로 적합할 뿐 아니라 신학적 용어로 적용되기에 합당하다. 반면, '성총' 이라는 한자어를 풀이하면 '거룩한 사랑' 이라는 뜻이다. 신학적으로 볼 때 '거룩하다' 는 말은 하느님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속성이다. 따라서 '은총' 이라는 신학적 용어도 발전 과정에서 볼 때 '성총' 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은총' 은 자연스럽게 "거룩한 사랑" 혹은 "하느님의 사랑" 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은총' 을 "하느님 의 사랑" 으로 풀이한다면 이것 또한 은총에 대한 훌륭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은 성서와 신학의 핵심 주제이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시어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하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이마 다 모두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요한 3, 16). 요한 복음에 의하면 '말씀' (Logos)의 파견은 하느님의 구원 경륜의 절정이며 하느님의 자기 통교로 표현되는 하느님의 구원 사랑의 정점이다. 하느님이 당신 스스로 세상과 인간을 위해서 스스 로 '선물' 이 되고 '은총' 이 된다. 라너 (K. Rahner, 1904~1984)가 "하느님 자신이야말로 바로 은총"이라고 말한 것이 이런 의미에서이다. 따라서 은총에 대한 의미론적 맥락에서 볼 때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찬가' (1요한 4, 7-21)는 '은총에 대한 찬가' 라고 할 수 있다. 버크(M. Burke)에 따르면, "성서 신학과 신학 역사의 보다 더 심오한 탐구 결과를 보면, '은총' 이란 개인적인 은혜일 뿐만 아니라 구원 경륜 전체로 보인다. 이러한 관 점에서 역사적인 개별 상황들의 결과로 강조된 다양한 측면들은 부수적이며 이차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그래서 은총은 오히려 인간과 함께 하는 하느님 구원 행위의 전체 역사로 이해된다. 본질적으로 은총이란 사랑의 경륜 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간에게 자유로이 스스로를 내어 주며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통해 인간이 자유로이 응답 하도록 초대하는 아버지, 아들, 성령의 거룩한 삼위 일체를 의미한다. 그것은 동시에 만남의 절정 순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이는 다시 성사들과 그분의 몸인 교회 안에서 구현된다." II . 구 분 은총의 구분은 은총의 효과에 따라 편의상 붙여진 이름들이다. 따라서 은총의 구분은 은총의 분리가 아니라 오히려 은총의 작용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신학의 결과이다. 서로 다르게 붙여진 은총의 이름들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은총의 구분을 통하여 은총의 개념화에 치우쳤던 스콜라 신학의 사고 방식을 뛰어넘을 필요가 있다. 〔창조되지 않은 은총과 창조된 은총〕 이러한 용어 사 용과 구별은 13세기 초 이후 서방 가톨릭 신학에서 현저 하게 드러났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은총은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사랑 자체이며 하느님의 자기 통교 혹은 자기 증여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은총 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창조되지 않은 은총' 과 '창조된 은총' 이 무엇이며 또한 그 관계는 어떠 한가를 살펴볼 수 있다. '창조되지 않은 은총' (gratia increata)은 당신의 사랑으 로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스스로 통교하시는 아버지, 아 들, 성령을 의미한다. 이렇게 '창조되지 않은 은총' 은 예 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선사된 하느님의 사랑인 성령과 동일하게 이해된다. '창조된 은총' (gratia creata)은 '창조되지 않은 은총' 과 상호적인 하느님의 자기 통교의 효과이다. 다시 말해서 '창조되지 않은 은총' 의 작용인 하느님의 사랑을 통한 인간의 내적 변형을 '창조된 은총' 이라 말한다. 이로써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새로운 삶에 입문한다. 이때 '창조된 은총' 은 인간 안에서 효과를 드러내는 하느님의 지속적인 영향력이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교부들은 '창조된 은총' 이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피하면서 '주입된 은총' 이라는 표현을 선호하였다. 루터(M. Luther, 1483~1546)를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이 '창조된 은총' 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 문이다. 그레사케(G. Greshake)의 표현에 의하면, "창조 된 은총의 원형(prototype)은 인간성 안에서의 예수 그리 스도 자신이라는 점부터 나아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창조되지 않은 은총(그분의 극단적 사랑) 이 피조물의 차원에서 구체적이고 표징적으로 작용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자신의 인간적 실재에 매개된다." 스콜라 신학의 경향이 '창조 된 은총' 에 강조점을 두었다면 현대 신학의 경향은 '창조되지 않은 은총' 에 강조점을 둔다. 〔성화 은총과 조력 은총〕 성화 은총(聖化恩寵, gratia sanctificans)은 하느님의 사랑을 통하여 이루어진 지속적 인 내적 처지를 뜻하며, "하느님과 함께 살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영혼 자체를 완전하게 하는 상존 은총(常存恩寵, gratia habitualis)이며, 지속적이 고 초자연적인 성향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2000항)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이 은총을 "신화(神化) 은총"이 라고도 부른다. 이 은총을 통해 인간은 실재로 "새로운 창조물"(2고린 5, 17)이 되며 참으로 "새로 태어난다"(요 한 3, 5). '상존 은총' 이라는 표현은 이 은총의 실재적이 고 지속적인 상태(habitus)를 지칭하기 위해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통용된 '성화 은총' 의 다른 표현이다. 이 은총 에 대칭되는 개념으로 '조력 은총' (gratia actualis, 助力恩 寵, 도움의 은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조력 은총' 은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이에 응답할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하고 개방시키도록, 하느님이 인간의 자유의 편에서 힘이 되어 주는 '현실적' (actualis) 도움의 은총이다. 이 은총은 인간의 자유와 함께 작용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성화 은총을 받아들이도록 한다. 이 은총은 회개의 시작이나 성화의 과정에서 하느님의 개입을 지칭하는 은총이다. 인간의 자유를 도우면서 함께 작용하는 은총이라는 의미로 후대에 가서 '협력 은총' (gratia COoperans)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성사 은총〕 '성사 은총' (聖事恩寵, gratia sacramentalis) 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우선 은총의 교회적 차원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교회가 구원의 성사인 동시에 '전형적인 은총' 이기 때문이다. 은총의 경륜은 모든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인 교회 안으로 인간을 모아들인다. 이때 교회는 하느님 구원 계획의 실현 현장이다. "성부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몸소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 자 안에서 성화된 백성을 불러 모으셨다"(교회 2항). 은총 을 통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하느님과 결합된 이 백성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의 몸' 인 교회를 이룬다. 은총의 이러한 교회적인 차원은 교회의 전례 안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교회의 전례 행위는 교회 안에서 은총의 최상 표현이다. 특히 성체성사 안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전례 10항 참조). 성사는 '하느님과의 만남' 이다. 믿는 이들이 전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재적으로 하느님과의 친교를 체험한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볼 수 있는 성사 적 행위의 틀 안에서 구현된다. 또한 성사적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행위이기도 하다. 성사 은총은 각 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을 고유한 방법으로 만나게 하는 구원의 은총이다. 이 은총은 교회와 교회 안의 구성원 들이 처한 특수 상황에 따라 특별하게 작용하며 인간의 개별 상황도 각별히 고려된다. 인간들은 이러한 성사 은총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구체적인가를 아울 러 체험한다. 성사 은총은 성화 은총의 특수 양식이며 조력 은총이 구현되는 현장이다. 성사의 사효성(事效性, ex opere operato)은 은총에 대한 하느님의 절대 주도권을 잘 설명해 준다. 성사는 예수 그 리스도의 행위이기 때문에 성사 집행자의 성덕에 관계없 이 그 자체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 안에서 베풀 어지는 무상 은총이다. 그러나 성사는 '하느님과의 만 남' 이기 때문에 성사 수령자의 맞갖은 동의나 자유로운 응답을 배제하지 않는다. 〔내적 은총과 외적 은총〕 은총을 받는 주체의 상황에 따라 '내적 은총' 과 '외적 은총' 으로 구분한다. 은총받 는 주체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초자연적 선물을 '내적 은총' 이라고 한다. '외적 은총' 은 이 은총을 불러일으키 는 외적 요인으로써 은총을 받는 주체의 외부에서 작용한다. 여기에는 신법(神法), 복음 설교, 성인들의 모범, 기적 등이 있다. 이러한 외적 은총은 항상 내적 은총의 계기가 된다(로마 10, 14). 〔은사와 직분의 은총〕 '특별한 은사' (charisma)는 바오 로가 사용한 용어이다. 이 은사는 성화 은총을 위해 있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의 구원 곧 교회의 공동선을 목적으 로 한다(1고린 12장 참조). '직분의 은총' 은 일종의 은사로써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다할 수 있도록 각자의 직무에 따라 주어지는 은총이다(로마 12, 6-8). Ⅲ. 전통 신학의 견해 "아우구스티노 이전의 은총 신학은 서방에서처럼 동방에서도 '카리스' 와 '그라치아' 단어를 전문적인 용어 로써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친절에서 비롯된 종속적인 의미로써 사용했다. 특히 이는 교회의 성사들, 개인적인 금욕 활동, 그리스도인 생활의 증거에 대한 구 원 업적과 관계되는 구원의 경륜을 통해서 베풀어진다. 하느님의 친절은 '선의' ( εὐδοκία) · '호의' (εὔνοια) · '선 한 행위' (εὐεργεσία) · '인간 사랑' (φιλανθρωπία) · 관대' (συγκατάβασις) · '부르심' (vocatio) · '간택' (electio) · '섭리' (praedestinatio)라는 용어들로 표현된다. 또한 주어진 하느님의 은혜라는 의미로써는 '영' (πνεῦμα) · '능력' (δύναμις) · '영광' (δόξα) · '선물' (donum) · '의로 움' (iustitia)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준은 다른 개념들 안에서 사용된다" (V. Grossi etB. Sesboüé). 따라서 아 우구스티노 이전의 은총 신학은 은총에 대한 성서적 의 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본격적인 의 미에서 은총 신학은 아우구스티노로부터 시작된다. 은총 교의의 정립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아우구스티노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 1225~1274)를 말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노] 은총론의 박사(Doctor Gratiae)라 불리 는 아우구스티노는 은총 체험의 바탕 위에서 바오로의 은총 신학을 심화하고 체계화시켰다. 특히 펠라지우스 (Pelagius) 이단을 논박하는 기회에 자신의 이론을 체계화하였다. 그는 《심플리치아누스 자유 토론집》(De diversis quaestionibus ad Simplicianum, 397)을 저술할 시기부터 은총의 필요성을 이해하는 방법을 수정하였다고 한다. 특히 고린토 전서 4장 7절에 대한 묵상이 계기가 되었다. "그대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써 받지 않은 것이 무엇 입니까?" 이때 그는 은총은 회개의 갈망을 위해서도 필요하며, 또한 이 은총은 하느님 안에서 신앙의 첫 행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우구스티노에게 있어서 은총은 우선 '관계' 를 표명한다. 은총은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서 가능한 도구적 교 량일 뿐만 아니라 항상 스스로 내어 주는 하느님의 호의이기도 하다. 그에게 있어서 은총은 단지 '중개 역할자' 가 아니며,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이다. 특히 성령을 통하 여 마음속에 부어진 사랑(inspiratio caritatis)을 거쳐 구세주와 인간의 관계(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가 문제된다. 그 관계 문제가 자유 의지와 자유와 관련하여 발전되었다. 아우구스티노는 자유 의지와 자유를 구별한다. 자유 의지는 선택하는 능력으로 각 인간이 그 능력을 지니고 태어난다. 자유 의지는 영적 본성에 속하는 것으로써 의지 자체이다. 의지가 죄에 대하여 종속 상황에서 발견될 지라도 자유 의지는 결코 상실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유는 정확히 말해서 선택 능력이 아니다. 자유는 선에 대한 사랑이다. 그것은 하느님인 선을 향해 인도된 의지의 상 태이다. 자유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소명에 따라 신적 생명에 참여하도록 이끌어 주는 흐름 안에 새겨져 있다. 처음 사랑하고 베푸는 분은 항상 하느님이다. "하느님이 존재 안에서 현존을 지속시키듯이 그분은 당신의 자유로운 행위 안에서 인간을 지원하신다." 인간이 이러한 원칙을 반대한다면 그는 자유를 상실한다. 그렇지만 자유 의지는 유지한다. 자유 의지와 자유 사이에는 상호 관련 성이 있다. 전자는 후자에 중개 역할을 한다. 자유가 근 본적으로 하느님을 향하거나 혹은 반대된 방향을 향하는 것은 실재 생활 안에서 자유 의지의 지속적인 선택을 거쳐 이루어진다. 따라서 자유 의지의 훈련은 자유가 시간을 두고 하느님의 선물을 차지하도록 한다. 자유가 하느님 안에서 굳건하여질수록 그 자유는 자유 의지의 변화에 덜 종속된다. 아담이 죄를 지은 이후 인간은 자유를 상실하고 사욕의 지배하에 떨어졌지만, 자유 의지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은총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은총이 인간의 자유 의지를 대신하지는 못한다. 은총은 인간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행하도록 한다. 은총과 자유 사이에서 이 두 행위는 서로 경쟁하지 않고 하나는 다른 하나가 되도록 한다. 그래서 인간의 선한 행위 안에서 모두가 은총이며 모두가 자유라고 말할 수 있다. 은총은 인간의 창조된 본성과 관련이 있다. 펠라지우스(Pelagius, 354?~418?)가 은총은 창조 안에서 자유 의지 에 대해서도 본성 곧 자유로울 수 있는 능력으로 생각될 수 있다고 선언했을 때, 아우구스티노는 그를 심하게 비판하였다. 아우구스티노는 본성을 각자가 태어나는 구체 적인 상황의 의미로 이해했고, 본성을 추상적인 능력처럼 이해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자유 의지 를 지니고 창조되었던 상황" (《은총과 자유 의지》 10, 22)에 대해 말하였다. 결국 아우구스티노는 인간의 창조가 은 총에서가 아니라 구원에서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하느 님이 본성을 제정한 것이 은총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 님이 본성을 복원시킨 것이 은총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 다(《본성과 은총》 53, 56) 따라서 그는 펠라지우스 지지자 들에게 반복하여 말하기를 문제가 되는 것은 누가 본성의 창조주인가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구세주가 필요한가를 탐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그리스도의 은 총과 원죄》 Ⅱ, 33, 38). 아우구스티노가 이해하는 본성은 철학적인 개념이거나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구체적인 인간이다. 은총과 자유의 관계는 인간 실존 전체에 해당한다. 이 관계는 신앙의 시작이나 첫 회개를 출발점으로 전 생애 동안 계속된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노가 생애 말기에 아 드루메툼(Adrumetum)과 프로방스 수사들과 함께 벌였던 토론들을 통해 펼친 적극적인 가르침이다. 수사들은 은 총에 관해서 서방 신학보다는 동방 신학의 전통에 의존 해 있었다. 그들은 신앙이 하느님의 선물이라면, 인간이 적극적인 의향 · 기도가 참회의 갈망과 실행을 통해 하느 님의 선물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들 은 "인간이 시작하고 하느님이 성취시킨다"는 기본 생각 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는 인간을 구원에로 이끄는 인간의 전적인 주도권은 하느님의 주도권에 의해 인도된다고 보았다. 신앙에의 준비 그 자체가 하느님의 선물이다. 인간은 영원히 은총 안에서 삶을 지속하기 위 해 은총에 의존한다. 이렇게 항구하게 지속되는 은총을 아우구스티노는 '큰 은총' (magnum donum)이라고 지칭하 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하느님이 시작하고 그것을 성취 시키는 분도 하느님이다. '모두가 은총' (sola gratia, 혹은 은총만으로)이라는 공식이 여기서 성립된다. 예정이란 하느님이 구원받을 자들의 구원을 영원히 결 정하는 행위이다. 여기서 아우구스티노에게 결정적인 것은 바오로의 사상이었다. 즉 "그분께서는 미리 알아 (택 하신) 이들을 당신 아드님 모습과 한 모양이 되도록 예정하셨으니··· 그분은 당신이 예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로마 8, 29-30). 또 한 하느님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의 아들이 되는 자격을 얻도록 예정하셨습니다"(에페 1, 5). 그러나 문제가 된 것은 로마서 9장 9-21절의 본문과 관련이 있다. 즉 하느님의 무상성과 그분의 계획이라는 측면에서 구원의 역사와 이스라엘의 역할에 대한 의미를 논하지 않고 여기서 각 신자의 구원과 파멸을 생각하였다. 그는 "나는 야곱을 사랑했고 에사오는 미워했다" (말 라 1, 2-3 : 로마 9, 13)는 구절을 인용하였다. 아우구스티노의 이러한 인용의 의도는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 졌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은총이 아니라는 생각을 강조하 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의 이러한 설명 은 후대에 가서 '예정론' 의 온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렇 지만 아우구스티노에게 있어서 악을 위한 예정이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예정이 바로 우리 예정의 표본이며 모범이 된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는 은총에 대한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도권을 강조하기 위해 하느님의 그르침 없는 예정을 강조하지만 지나치게 의인화된 개념 안에 갇혀 있다. 그렇지만 그에게 있어서 예정이란 구원을 위한 예정 하나뿐이다. 아우구스티노의 시간 개념에서 영 원성이란 "시간을 감싸며 시간의 모든 순간들과 동시적이다. 은총은 그것이 인간의 각 행위에 영원하고 동시적 인 사실로써 동시에 인간 행위를 초월한다. 은총은 이전 도 이후도 아니지만 시간의 진행 중에 현존하고 작용한 다. 따라서 은총은 마치 하느님이 그분의 계획을 한 번에 고정시켰거나 돌이킬 수 없거나 자기 안에 갇힌 어떤 것이 아니다" (P. Agaèsse, L'anthropologie chrétienne selon saint Augustin, 1986, p. 113). 결국 아우구스티노에게 있어서는 은총과 자 유의 관계에서 은총이 자유를 부른다. 그런데, 이런 입장 에서는 은총에 대한 하느님의 주도권을 강조한 나머지 자유를 은총 안에 흡수할 위험이 있다. 그러나 분명히 자유는 은총의 신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자유 의지는 선행 이 실현되도록 하기 위하여 개입해야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 근래에 와서 "신학자들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본성과 은총, 이성과 신앙, 철학과 신학 영역 을 '결합시키기 위해 구별' 할 수 있었던 훌륭한 학자임 을 재발견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학문적인 소신을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은총 신학을 전개하였다. 그의 사고 체계(Denkfom)는 인격적이었으며 인간 중심적이었다. 그가 비록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83~322/321)의 개념들을 반영하고 있다 하더라도 보 다 더 바오로의 충실한 제자로 자각했으며 그의 은총 신 학은 바오로와 아우구스티노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 그 러면서 중세의 이론 체계적인 학문 방식을 신학에 적용시키는 선구자가 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청년기에서 장년기를 넘어가면서 은총에 대한 신학적 이해의 변천 과정을 겪었다. 청년기 의 저술 《명제집에 관한 규정》(Scriptum super libros Sententiarum, 1252~1256)에서는 하느님과 인간 관계에서 인 간의 자연적 능력을 강조하는 반(半)펠라지우스주의 (semi-Pelagianism)의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후기 저술인 《신학 대전》(Summa Theologiae, 1270)에서는 전적으로 아우구스티노의 노선을 따르면서 체계화시키고 있다. 결 국 그의 입장은 '모두가 은총' (sola gratia)이라는 것이다. 은총 신학에 관한 스콜라 학파의 노선에는 크게 두 가 지가 있었다. 빅토르 학파를 중심으로 프란치스코 학파 들에 의해 배양된 플라톤 · 아우구스티노적인 노선과 토 마스 아퀴나스를 중심으로 한 아리스토텔레스 · 토마스 주의의 노선이다. 후자 노선의 선구자가 토마스 아퀴나스이며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체계적이다. 토마스 아퀴 나스는 자기 노선에 따라 서로 겹치지 않는 일련의 한 쌍들을 형성하기 위해 연결된 다수의 용어들로 표현된 정 확한 개념 정립을 발전시키면서 은총 교리를 체계화하였다. 예를 들면, '치유 은총' (gratia sanana)과 '증대 은총' (gratia elevans) , '상존 은총' 과 '조력 은총' , '창조되지 않은 은총' 과 '창조된 은총' 이 그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최후 목적이 부활한 자들에 게 주어지는 하느님에 대한 지복 직관에 있다는 것과 아 담의 원죄가 인간의 이러한 초자연적 소명을 바꾸지 못 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후자가 자기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중적으로 부족한 상태에 있다고 한다. 바로 인간은 죄로 인해 상처받은 자기 본성을 '치유하는 은총' 을 필요로 하고, 그의 목적인 하느님과의 통 교 안에 들어갈 수 있기 위해 자기 고유 본성을 넘어서 그를 드높이는 '증대 은총' 을 필요로 한다. 치유 은총 교 리는 아우구스티노가 진단한 바와 같이 선을 행하는 데 있어서 타락한 인간의 불능 상태와 관련이 있다. 이 은총은 정확히 말해서 죄인의 '의화 은총' (gratia justificationis) , '하느님 마음에 들게 하는 은총' (gratia gratum faciens), '성화 은총' (gratia sanctificans)이다. 이 은총 없이 는 인간은 전적으로 윤리 · 도덕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 아우구스티노보다는 더 낙관주의자인 토마스 아퀴 나스는 타락한 인간이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자기 생활 영역 안에서 개별적인 선을 행하기 위한 힘을 갖고 있다 고 생각하였다. 예를 들면 일하기, 먹기, 친구 갖기, 사 회에서 봉사하기가 그것이다(s.Th. I a-Il ae,q. 109,a 2. 5). 그렇지만 이러한 인간의 상태에서는 우선적으로 하느님 을 더 사랑할 수도, 아주 극심한 유혹에 오래 버틸 수도 없다. 은총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도 필 연적으로 증대되어야 한다. 영원한 생명은 인간 본성의 가능성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성을 치유한 후 또한 영원한 생명에 합당한 행업들을 성취하기까지 그 본성을 드높이는 상존하는 선물이 필요하다. 이는 본성 의 능력을 능가하기 때문이다(s.Th. I a- Il ae,q. 109,a.9). 은총의 실재에 대한 또 다른 접근은 조력 은총과 상존 은총의 구별이다. 인간 주체를 '움직이게 하는 하느님의 도움' (auxilium Dei moventis) 혹은 조력 은총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하느님이 베푸는 일시적인 도움이다. 예를 들 면,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나 죄인을 의화로 인도하는 선행은총이 그것이다. 혹은 선행을 하도록 영감을 주는 내적 작용이다. 반면, 상존 은총은 성화 은총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 이름이 보여 주듯이 이 은총은 하느님과 함께 통교의 삶을 사는 의화된 인간의 견고한 상태를 의미 한다. 이 은총은 영혼의 삼위 일체적 삶에 참여하는 것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신앙 · 희망 · 사랑의 덕행을 실행하 도록 한다. 향주덕에 대한 주제는 은총의 이러한 습성 (habitus)과 함께 인간을 변화시키는 '창조된 은총' 으로써 스콜라 신학 사상 안에서 지속적인 특성을 유지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후기 신학은 인간의 영혼 안에 하느님의 현존 혹은 내주(內住)를 은총의 효과처럼 심화시키게 된다. 이러한 통찰은 '창조된 은총' 과 '창조되지 않은 은총' 을 구별하는 세 번째 접근으로 인도한다. 토마스 아퀴나 스는 특히 하느님과의 통교 안에 들어가기에 합당하도록 인간을 변화시키는 하느님의 호의와 선물을 수렴하는 '창조된 은총' 에 대한 신학을 구축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느님의 은총은 하나의 실재이다. "우리가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을 가졌다고 말할 때 이는 초자연적 실재 가 하느님에 의해 인간에게 통교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S.Th. Ia- Ilae,q. 110,a. 1). 그러나 이 창조된 은총은 '창 조되지 않은 은총' 곧 하느님이 당신 피조물에게 스스로 주시면서 당신 자신이 이루시는 사랑의 선물과 그분의 호의적인 현존과 분리될 수 없다. 여기서 신적 본성에 인 간 영혼이 참여하는 양식이 문제로 제기된다. 상황에 따 라 두 가지 양식이 있는데, 지복 직관의 상황과 은총의 상황이 그것이다. 지복 직관의 상황은 원인이 가져오는 결과를 그 원인 자체와 동일시하는 원인을 개입시키며, 은총의 상황은 그 원인 자체와 구별되는 창조된 형태를 갖추면서 통교를 가능하게 하는 동력인을 개입시킨다. '창조되지 않은 은총' 에 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은 육화한 아들과 의인들의 영혼에 거주하러 오시는 성령의 삼위 일체 신학에서 발전된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또한 '하느님의 마음에 들게 하는 은총' (gratia gratum faciens)과 '무상으로 주어진 은총' (gratia gratis data)을 구별하는데, 후자의 은총으로 한 인간 이 또 다른 한 인간의 하느님에로의 귀의에 협조한다. 여 기에는 또한 효력 은총과 협조 은총, 선행 은총과 결과 은총, 은총에로의 예정과 영광에로의 예정 사이에 구별이 있다. 이러한 구별은 은총이 우선 인간을 위한 하느님 사랑의 호의이며, 따라서 관계라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분명히 이러한 의미 안에서 자 기 신학을 발전시킨다. 여기서 '하느님 마음에 들게 하는 은총' 은 성화 은총을 말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또한 자신이 최대로 발전시킨 불충 자에 대한 의화론을 제안하는데 이는 트리엔트 공의회에 참고 자료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우선 죄인을 의로움에로 인도하는 여정을 소개하였다. 이 여정은 끊임없이 은총의 우선권 안에 위치하지만 또 한 자유 의지의 응답에 길을 열어 준다. 그는 곧이어 이 를 분석하였다. 왜냐하면 "불충자의 의화가 하느님에 의 해 순식간에 실현되기 때문이다" (S. Th. Ia- Ilae, q. 113,a. 7). 다시 말해서 준비 과정의 마지막에 즉각적으로 의인 이 되는 변화가 죄인의 존재 안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변 화는 하느님의 선물과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의 상호 전제에 근거한다. 같은 작용에서 인간이 사랑 안에서 하느 님에게로 돌아가기 위해 죄를 미워할 때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사랑을 받아들인다.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이 하느님을 위한 인간의 사랑이 된다. Ⅳ. 공의회의 가르침 은총 교리를 천명한 교회의 공적 회의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카르타고 교회 회의(418)와 트리엔트 공의회이다. 카르타고 교회 회의의 가르침은 종교 개혁 시기까지 은 총 교리의 기준 지침이 되었으며, 그 이후부터 오늘날까 지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가르침이 함께 그 기준 지침 역할을 하였다. 〔카르타고 교회 회의〕 418년에 개최된 카르타고 교회 회의는 은총 신학 역사에서 완전히 새로운 장을 열었다. 교회 회의의 법령 3~5조에서는 은총에 대해 펠라지우스가 주장하는 세 가지 의미를 제외시켰으며, 그리스도교 은총의 의미를 명확히 천명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D. 225~227). "누구든지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을 의롭게 하 는 하느님의 은총이 오로지 이미 범한 죄들의 사함에만 관계가 있고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데에는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는 파문된다" (3조). "누구든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이러한 같은 은총이 우리가 원해야 하는 것과 피해야 하는 것을 알 수 있도록 계명들에 대한 지성을 계시하고 열어 주기 때문에 그 은 총이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죄짓지 않도록 도와주지만 우리가 우리의 의무로 인식했던 것을 또한 행하게 하는 사랑과 힘을 전혀 우리에게 주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는 파문된다" (4조). "우리가 우리 자유 의지로 행해야 될 것을 그 은총을 통해 더 쉽게 완수할 수 있기 위해 의화의 은총이 분명히 주어지는데, 누구든지 그 은총이 주어지지 않을 때 약간의 어려움은 있다 해도, 우리가 그 은총 없이 하느님의 계명을 준수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파문된다"(5조) . 교회 회의는 펠라지우스의 세 가지 오류를 지적하면서 은총의 필요성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천명하였다. 은총은 이미 범한 죄들의 사함에만 관계가 있다거나 우리가 행해야 할 것을 알리는 계시에만 관계가 있다거나 행해야 될 것을 더 쉽게 완수하기 위한 도움만으로 규정되어서 는 안된다고 하였다. 보다 더 적극적으로 교회 회의는 은 총이란 인식된 것의 성취에 있어서 사랑처럼 이해되어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한 하나의 도움이기도 하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우리가 행하기를 바라기 위해' 의지 안에 개입하는 이러한 도움 없이 인간은 하느님의 계명을 준 수할 수 없다고 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 원죄에 관한 법령을 심의한 트리엔 트 공의회 교부들은,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헌 인 의화에 관한 법령을 함께 취급하였다. 1546년 6월 22일에 시작한 토론은 제6 회기부터 7개월이 지나서 완 료되어 1547년 1월 13일 법령 인준을 했다(D. 1520~ 1583). 의화에 대한 문제 자체가 이전 공의회에서 다루 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문헌을 만들어야 했다. 공 의회는 33개의 법령과 16장으로 된 교리 문헌을 공포하 였는데, 이 문헌들은 여러 차례 교정되었다. 공의회의 <의화에 관한 가르침>은 은총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공의회가 스스로 의화에 대한 정의를 "사람이 태어 난 죄의 상태에서 은총의 상태와 하느님의 자녀로서 입 양 상태로 이동되는 것"(4장)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대한 이 문헌 중에서 은총에 대한 주요 가르침 부분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공의회 문헌 1~4장과 법령 1~3조는 카르타고 교회 회의와 제2차 오랑주 교회 회의(529)를 상기하면서 인간 은 행업이나 자력으로 의화될 수 없다는 반(反)펠라지우 스주의(ant-Pelagiaism)를 반향하고 있다. 은총은 의화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은총은 단순히 쉽게 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만은 아니다. 은총은 그리스도교적 삶을 실재로 가능하게 한다. 진실로 은총 없이는 하느님께 돌아갈 수 없다. 이는 루터의 입장과 같다. 그러나 또한 타 락한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이름으로밖에' (de sola titullo) 남아 있지 않다는 루터의 견해에는 반대하였다(5 조). 공의회는 자유 의지가 파괴되지 않고 쇠약해졌다고 천명하였다. 이는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이다. 즉 인간 의 자유 의지는 비록 그것이 "자기 힘에 있어서 약화되 고 굴절되어" (attenuatum et inclinatum ; D. 239, 386, 391) 있다 하더라도 전적으로 "사라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minime extinctum ; D. 331). 근본적인 자유 의지의 지속성 은 구원이 인간에 이를 수 있고 인간이 여기에 응답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결국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해방될 수 있으며 이 은총에 '협조' 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 의지는 그대로 있다. 2장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절대적인 무상의 주도권 을 통해서만 인간을 위해 가능한 구원이 설정된다고 한 다. 이 주도권은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인 당신 아들의 파견에 따라 "선포하시고 약속하신" , "자비의 아버지"와 관계가 있다. 그리고 이 구원은 "자녀의 품위"를 선사하 는 적극적인 선물을 내포하고 있다. '치유 은총' 과 '증대 은총' 혹은 '신화 은총' 사이의 기술적인 구별이 문헌 안 에 표명되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 숨어 있다. 은총의 지배 적인 모습이 죄에서의 해방이라면 '자녀 품위' 에 대한 빈번한 언급은 은총의 더 적극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5~6장은 성인(成人)들의 의화 준비에 대해서 언급하 면서 은총의 절대적 우선권과 인간 자유의 협조에 대한 관계를 명확히 밝혔다. 공의회의 은총에 대한 가르침의 핵심 부분이 이장들이다. 우선 공의회 교부들은 5장의 문헌을 작성하면서 두 가지 중점을 가졌다. 하나는 의화의 기원에서 하느님의 주도권을 문제삼는 반(半)펠라지 우스주의의 모든 형태를 제외시키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프로테스탄트와 대면해서 인간의 의화에서 전적 으로 수동적일 수만은 없는 인간의 자유로운 협조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중대한 두 가지 관점이 공의회로 하여금 이중적인 선언을 하도록 하였다. 하느님 은총의 우선권과 인간 자유의 필요한 협 조를 요구하는 선언 채택에는 내적인 긴장이 감돌았다. 여기서 두 경향이 서로 대립되었다. 하나는 자유 의지를 아주 제한하는 아우구스티노적인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스코투스(Johannes Duns Scotus, 1265/1266~1308)를 지지하는 신학자들의 경향으로 넓은 의미로 이해된 공로를 생 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의회는 자유 안에서 이루어 지는 모든 것은 항상 은총 안에 있다는 관점을 표명하려 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 문헌의 주요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성인(成人)들에게 있어서 의화 그 자체는 예수 그리 스도를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는 선행(先行) 은총 안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그들 자신의 어떤 공로도 없이 불림을 받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그래서 자신들의 죄로 하느님을 등 진 자들이 은총으로 자극을 받고 도움을 받아 이 동일한 은총에 자유로이 동의하고 협조하면서 하느님이 그들에 게 허락하는 의화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성령의 조명을 통해 하느님은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 시는데, 이러한 영감을 받아들이면서 인간은 스스로 전 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인간은 그것을 거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때 인간이 하느 님의 은총 없이 자기 자신의 고유한 의지로 하느님의 면전에서 의로움에 다다를 수 있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D. 1525) . 공의회는 우선 "성인(成人)들에게 있어서 의화 그 자 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선행 (先行) 은총 안에 그 기원을 가진다" 고 선언하였다. 이러 한 은총은 하나의 부름인 동시에 도움이다. 이 은총은 끌어들이며 충동한다. 이 은총은 전적으로 무상이다. 예비 적인 '아무런 공로 없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 은총은 자기가 아닌 어떤 것과도 경쟁 상태에 있지 않다. 아무것 도 이를 선행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이를 동반하지 않으며 이를 따라오는 것은 이미 그 열매이다. 그 다음 자유 의 협조에 대한 선언이 뒤따른다. "그래서 자기 죄로 하 느님으로부터 멀어져서 그분의 은총으로 자극을 받고 도움을 받은 자들이 같은 은총에 동의하고 협조하면서 하 느님이 그들에게 베푸는 의화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는 은총이 자유의 협조가 가능하게 하고 필요한 주도 권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여기서 거부나 승낙의 선택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거부의 가정이 항상 가능하기 때 문에 자유로운 승낙이 있다. 승낙 안에서의 자유가 거부 안에서 표명되는 자유에 의해 확인된다. 6장은 의화에 대한 준비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은총의 주도권에 응답하는 자유 행위의 논리적인 연관성과 추상적인 유형을 선언한다(D. 1526). 즉 언급될 모든 행위들의 결과가 이 선행 은총의 전제 안에 들어 있음을 천명한다. 〔종합과 전망〕 종교 개혁자들의 은총 신학은 주로 '위로부터' 라는 관점과 관련이 있다. 이는 또한 가톨릭의 관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톨릭의 '모두가(오로지) 은 총' (sola gratia)이라는 표현은 하느님이 홀로 작용하신다 는 의미일 수는 없다. 정확히 말해서 하느님의 은총이 진 실로 창조적이기에 인간은 은총의 능동적 주체가 된다. 은총은 스스로 육화하며 은총은 인간의 자유 안에서 만 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역사적 실재이다. 말씀은 언제나 새롭게 육(肉)이 되신다. 최근에(1999. 10. 31) 이루어진 가톨릭 교회와 루터 교회의 '의화론에 대한 공식 합의' 는 서로 간의 은총 이해에 대한 오해를 푸는 계기가 되었 을 뿐만 아니라 은총에 대한 교회 일치 신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루터교 세계 연맹과 가톨릭 교회의 의화 교리에 관한 합동 선언문>에 의하면, "의화는 '오로지 은총 에 의해서만' (<선언문> 15~16항), 오로지 신앙에 의해서 만 발생하고, 인간은 '행업과는 별개로' (로마 3, 28 ; <선 언문> 25항 참조) 의화된다. '은총은 신앙이 한 인간 안에 서 시작될 때뿐만 아니라, 신앙으로써 존속하는 한 신앙 을 이룩한다' (S. Th., Ⅱ-Ⅱ 4, 4ad 3). 하느님 은총의 역사 (役事)는 인간의 활동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기꺼이 하고자 하는 마음과 그 일을 할 힘을 주시기에, 우리는 구원을 위하여 애쓰도록 부름받는다" (필 립 2, 12 이하 참조). (⇦ 도움의 은총 ; 성사 은총 ; 성총 ; 성화 은총 ; → 과성 은혜 ; 몰리나주의 ; 사효론 ; 선업 ; 성사론 ; 아우구스티노, 히포의 ; 예정설 ; 은총론 ; 의화론 ; 자유 ; 카리스마 ; 토마스 아퀴나스 ; 펠라지우스 주의) ※ 참고문헌  기스벨트 그레사케, 심상태 역, 《은총 : 선사된 자 유》, 신학 선서 I , 성바오로출판사, 1979/ -, 정양모 역, <은총과 구원, 죄와 멸망>, <현대 신학 동향》, 신학 총서 24, 분도출판사, 1984, pp. 209~218/ 칼 라너, 이봉우 역, 《그리스도교 신앙 입문 : 현대 가톨릭 신학 기초론》, 사목 총서 15, 분도출판사, 1994/ 이찬수, 《인 간은 신의 암호, 칼 라너의 신학과 다원적 종교의 이해》, 분도출판 사, 1999/ 루터교 세계 연맹과 교황청 그리스도인 일치 촉진 평의회 편, 심상태 역, <루터교 세계 연맹과 가톨릭 교회의 의화 교리에 대 한 합동 선언문>,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13호(2000. 2), pp. 211~2471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6, 1996~2005항/ E.M. Burke et al., 《NCE》 4, pp. 658~685/ C.M. Aherne, Grace, Controversies on, 《NCE》 6, pp. 675~678/ Stephen J. Duffy, The Dynamics of Grace : Perspectives in Theological Anthropology, Minnesota, The Liturgical Press, 1933/ V. Grossi · B. Sesboüé, Grace et justification, L'homme et son salut, Histoire des dogmes II , Paris, Desclée, 1995, pp. 269~373. 〔權赫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