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론 恩寵論

〔라〕De Gratia · 〔영〕Theology of 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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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인간을 위해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시는 계시 사건에 근거한 하느님의 구원 경륜이나 사랑의 경륜을 다루는 신학의 한 분야. "은총 신학"이라 고도 한다. 은총은 본질적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이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이야기 되는 곳에 '은총론' 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넓은 의미에서 하느님의 구원 경륜과 함께 '은총론의 요소들은 이미 주어져 있다. 올바른 은총론 정립을 위해서는 보다 더 심화된 신론 · 그리스도론 · 성령 론 · 구원론 · 인간학과의 만남이 요구된다. 〔학문으로서 배경과 위치〕 신학사에서 볼 때, 은총론의 역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 배경이 되는 역사나 문화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다양한 개념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당시의 학문적인 배경을 각별히 고려하면서, 이 개 념들이 신학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또한 하느님에게 속하는 개념들과 인간에게 속하는 개념들을 다른 차원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개념들이 성서에 계시된 내용을 얼마나 충분 히 표현해 낼 수 있는지를 탐구해야 한다. 이것이 신학의 과제였으며 은총론의 과제였다. 은총론의 효시 아우구스티노 : 신학적 탐구 측면에서 고유한 분야로 은총론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아우구스 티노(Augustinus Hipponensis, 354~430)가 《본성과 은총》 (De Natura et Gratia, 415)을 저술한 시기부터이다(V. Grossi · B. Sesboüé, Grace et justification, p. 358). 이때부터 아우구스 티노는 여러 가지 저서들에 '은총' 이라는 용어를 첨가하 게 되며, 자신이 전에 사용했던 '하느님의 구원' · '하느님의 자비' · '하느님의 사랑' 과 같은 표현들을 '은총' 이 라는 용어로 수렴하여 표현하였다. 아우구스티노는 이로써 '은총' 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신학을 체계화시킨 최 초의 학자로 '은총론의 박사 (Doctor Gratiae)라고 칭송받으며 은총론의 효시자가 되었다. 아우구스티노가 이해하는 인간 본성 개념은 아리스토 텔레스적인 철학적 추상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구체적인 인간 조건인 '탄생' 에서 연유된 실존적이고 역사적인 의미의 구체적인 인간을 의미한다. 이러한 해석 방법은 성서 본문을 통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성을 재조명하는 도구가 된다. 아우구스티노의 이러한 전통 안에서는 창조와 아담의 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이야기가 필 연적이다. 그런데 이후 스콜라 신학의 본성 개념과의 이해 차이로 인해, 본성과 은총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많은 혼란이 초래되었다. 서방 신학에서는 주로 아우구스티노 의 은총론을 따랐다. 하지만 스콜라 신학의 지나친 신학 체계화로 말미암아 아우구스티노의 은총론은 제대로 수 용되어 전해지지 못하였다. 특히 그의 후기 저술에만 집중적인 관심을 두어 그의 사상을 예정론의 온상으로 오 해하기까지 하였다. 아무튼 교회는 은총 교리 확립 과정에서 아우구스티노의 중심 사상을 정통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교도권은 카르타고 교회 회의(418) 이후부터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 이르기까지 그의 사상을 근간으로 은총 교리를 천명했으며, 그 입장은 변함이 없었다. 스콜라 신학 이후의 개념 정립 : 스콜라 신학은 점점 더 은총을 개념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은총을 하느님 자신의 통교 사건 곧 하느님의 자비나 사랑 자체의 차 원(창조되지 않은 은총)보다 하느님의 작용(창조된 은총)으 로 이해하는 데에 더 관심을 두었다. 특히 13세기 이후의 스콜라 신학은 개념적인 구분을 통해 하느님의 작용 (창조된 은총)으로써의 은총을 세분화하였다. 다시 말해 서 은총을 본성과 은총 · 자연과 초자연 · 자유와 은총 · 창조된 은총과 창조되지 않은 은총 · 성화 은총과 조력 은총 등의 다양한 요소들 사이의 관계라는 차원에서 고 찰하였다. 이러한 은총론의 경향은 19세기에 이르기까 지 '창조된 은총' 의 탐구에 집중되어 있었다. 또한 인간 개인의 내적 변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특히 본성 · 은 총 · 의로움 · 의화 · 공로라는 용어들의 개념적 정의를 분명히 하여 당시의 어려운 문제에 해답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나친 개념화는 하느님의 것과 인간의 것을 이분화하는 신학적인 오류를 낳기도 하였다. 그러 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자연' 과 '초자연' , '본성 과 은총' 의 개념들을 회피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구체적인 인간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이 구체적인 인간이란 언제나 이미 은총에 이끌 려 사랑하며, 사랑 속에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불림받은 인간인 것이다. 은총론은 수많은 논쟁들을 통 해서 발전하고 정립되었다. 이러한 논쟁 과정 안에서 은총론의 주제들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따라서 은총 논쟁의 역사를 통해 은총론의 주제들이 어떻게 정리되었 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은총 논쟁〕 은총 논쟁(controversia de gratia)은 넓은 의미로 신학사에서 은총의 여러 측면에 대한 일련의 논쟁들을 통틀어 이르며, 좁은 의미로는 도미니코회 학파와 예수회 학파 사이의 '은총 논쟁' (disputatio de auxiliis)을 의미한다. 초기 교회 때의 은총 교리는 최초로 그노시스주의자들 을 논박하는 가운데 발전되었는데 이때 은총은 '구원' 의 의미가 더 강하였다. 다시 말해서 삼위 일체 교리의 바탕 위에서 은총 교리를 전개했는데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한 하느님의 현존이 강조되었다. 이때 특히 동방 교부들은 은총의 효과로 인간의 '신화' (神l匕, deificatio)를 강조하였다. 후대 서방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친자 관계' (adoptio)를 더 강조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노와 펠라지우스 : 아우구스티노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가 지니는 역할을 강조한 펠라지우스 (Pelagius, 354?~418?)를 논박하면서 자신의 은총론을 발전 시켰는데, '모두가 은총' (혹은 오로지 은총, sola gratia)이라 는 구원론적인 입장을 강조하였다. 펠라지우스는 처음부터 자유 의지를 부여받은 아담의 창조를 상기시키면서 '인간 본성' 개념을 이해하였다. 그에 의하면 자유 의지를 부여받은 본성의 가능성 자체가 하느님의 선물이며 은총인데, 원죄 이후에도 이러한 상태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아담이 인간성은 훼손시켰지만, 그가 단지 나쁜 표양을 주었을 뿐이며 그 의 죄로 인해 상처받은 본성을 오염시키고 훼손시킨 것 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펠라지우스 지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 없이도 구원될 수 있다는 극단적 인 상황에까지 이르는 오류를 범하였다. 아우구스티노는 펠라지우스의 이러한 이론을 논박하였다. 그는 인간 본 성을 아담에게서 상속된 있는 그대로의 본성으로 이해하면서 인간 본성에 대해 "상처받고, 망가뜨려지고, 혼란 스럽고, 빼앗긴"(vulnerata, sauciata, vexata, perdita; 《본성과 은총》 53, 62) 등의 표현으로 '상처받은 본성' 개념을 직 접적으로 설명하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총과 자유 의지를 명백히 하였다. '은총과 자유' 에 관 한 이러한 논쟁은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교회는 카르타고 교회 회의를 통하여 펠라지우스의 이러한 이론을 단죄하면서 아우구스티노의 은총 교리를 분명히 받아들 였다(D. 222~230). 아우구스티노는 《은총과 자유 의지》(De gratia et libero arbitrio, 426~427)라는 저서에서 은총과 자유 의지의 관계 를 분명히 하였다. 그는 자신이 인간의 자유 의지를 거부 한다고 비판하는 아프리카의 아드루메툼(Adrumetum) 수 사들을 논박하면서 자유 의지의 존재와 은총의 필요성을 동시에 강조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남부 지방의 수사들 이 원죄와 은총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은총의 필요성 이 인간의 의지에 의존해 있는 것처럼 설명할 때, 아우구 스티노는 이러한 인간의 의지도 하느님의 은총에서 비롯된다는 은총의 절대적 주도권을 강조하면서 인간 홀로는 어떠한 선업을 시작할 수도 완수할 수도 없다고 천명하였다. 수사들은 인간을 의사를 부르는 환자에 비유하면서 인간 의지가 적어도 은총에 앞서서 의사를 부르는 환 자의 역할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론 은 펠라지우스의 주장을 약간 변형시킨 형태이기 때문에 반(半)펠라지우스주의(semi-pelagianism)이라고 불렸다. 이러한 이론은 은총에 앞서서 인간이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인간 편의 공로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후대 스콜라 신학에서도 이는 큰 논쟁 주제가 되었다. 교회는 제2차 오랑주(Orange) 교회 회의(529)를 통해 이러한 반 펠라지우스주의의 요소를 지닌 이론을 단죄하면서 은총 은 인간의 모든 노력을 선행하며 '신앙의 시작' (initium fidei)도 전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온다고 천명하였다(D. 370~397항 참조). 종교 개혁 시대의 논쟁 : 종교 개혁 시대에 루터(M. Luther, 1483~1546)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을 지나치게 비하시키고 '오로지 하느님만' (Deus solus)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은 '은총만으로' (sola gratia) 구원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루터는 인간 본성의 부패를 강조하면서 은총 안에서 인간의 전적인 수동성을 부각시켰다. 이에 대해 트리엔트 공의회는 은총의 절대적인 우 선권을 천명하지만 이는 인간의 자유로운 협조' (cooperatio)를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고 밝히면서 은총 안에 서 인간의 능동적인 응답과 내적인 쇄신을 강조하였다. 신학적 관점에서 비롯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사이에 빚어진 오해와 갈등은 서로간의 신학적 대화 덕분에 오 늘날 많이 해소되었다(〈루터교 세계 연맹과 가톨릭 교회의 의화 교리에 관한 합동 선언문> 참조).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은총론은 '인간의 자유와 은총 의 필요성' 의 관계에 집중되었다. 여기서 인간 자유의 규모와 기능이 세밀하게 고찰되었다. 특히 인간의 자유와 조력 은총의 관계가 문제되었다. 이미 의화된 인간이 자기 자유를 성취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로 조력 은총이 필요하며, 이 조력 은총은 어떤 작용을 하는가를 따져 보 았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두 가지 유형의 은 총을 분류하였다. 그것은 충족 은총(充足恩寵, gratia sufficiens)과 효능 은총(效能恩寵, gratia efficax)이다. 전자는 각 인간에게 주어지는데 그 은총의 수용 여부가 인간의 자유에 의해 좌우되며, 후자는 하느님이 인간 안에서 거 역할 수 없이 당신을 관철시킬 수 있는 은총이라고 하였 다. 이 두 가지 유형의 은총 관계를 둘러싸고 진행된 논 쟁이 몰리나(Luis de Molina, 1535~1600)를 중심으로 한 예수회 학파와 바녜스(Domingo Bénez, 1528~1604)를 중심으 로 한 도미니코회 학파 간에 일어난 은총 논쟁이다. 일반적으로 예수회 학파는 인간의 자유에 고도로 가능한 공간을 부여한다. 그리고 충족 은총에 착안하여 이 은총은 인간의 동의를 통해서 효능 은총이 된다고 하였다. 반펠라지우스주의의 오류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몰리 나는 하느님의 '중도 인식' (中途認識, scientia media)이라 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이 이러한 상황에 처해졌고 이러한 조건이 실현되었다면,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한편, 도미니코회 학파는 하느님에 의하여 선험적으로 효과를 발하는 효능 은총에 착안하여, 하느님은 인간이 자유롭 게 행하리라는 것을 알고 계신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구원 행위는 효능 은총의 열매이다. 이 이 론도 결코 인간의 자유를 없애지 않는다고 하지만 결과 적으로 항상 제기되었던 어려움 즉 인간 자유의 존중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 논쟁의 본질적인 내용은 인간의 자유가 우위를 차지하는가, 아니면 무조건적으로 효능을 발하는 하느님 은총이 우위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가 어떻게 함께 연합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두 학파 간의 논쟁 은 수세기를 걸쳐 격렬하게 이루어졌다. 예수회 학파는 도미니코회 학파에게서 엿보이는 일종의 극단적인 아우 구스티노주의를 우려하였고, 도미니코회 학파는 예수회 학파에게서 일종의 펠라지우스주의의 재생을 우려했기 때문에 그들의 논쟁은 치열하였다. 이들의 논쟁은 비록 은총에 대한 트리엔트 공의회 지 침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지속되었다 하더라도, 인간 자유의 규모와 기능을 너무 지나치게 세분화하여 하느님 과 인간의 기본적 관계의 신비에 손상을 입혔다고 평가 된다. 1598~1607년에 120회 이상의 회의가 열렸으며, 교황 바오로 5세(1605~1621)는 양쪽 모두 단죄하지 않고 서로의 입장을 비난하는 것을 금하는 것으로 문제를 일단락 지으려 하였다(D. 1997). 단지 양편에서 극단 적인 주장들만이 배격되었을 뿐이다. 즉 한편에서는 만 사가 인간의 자유에 의해 좌우되어서, 은총은 자신을 자 율적으로 성취하는 인간을 돕고 지원하는 기능만을 지닌 다는 주장이 배격되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만사가 하느님에 의해 좌우되어서 인간의 자유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다는 주장이 배격되었다. 결국 하느님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 모두를 고수하는 것이 성서에 바탕을 둔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은총 논쟁' 은 얀센(C.O. Jansen, 1585~1638)의 저서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1640)의 출판 이후 새로 이 시작되었다. 이 저서가 이전 논쟁의 전제들까지 재검 토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바이우스(M. Baius, 1513~1589)를 중심으로 한 루뱅(Louvain)의 신학자들은 아우구스티노의 이름으로 원죄 이전의 인간만이 은총에 대하여 자유로우며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부자 유스럽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들이 사용한 비유는 자신들의 입장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인간은 한 마리의 당나귀와 같다. 그를 악마가 타게 되거나, 아니면 하느님이 타게 된다. 인간은 이를테면 어쩔 수 없이 전자나 후자의 노예가 된다" . 이러한 루뱅학파의 아우구스티노 전통을 답습한 얀센은 '하느님의 은총은 어김이 없으며 인간은 그 은총에 반대할 수 없다' 고 주장하였다. 그는 효능은 총만이 인간 구원을 이룬다고 강조하면서 인간의 자유를 허용했던 아담의 은총인 충족 은총은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얀센의 은총론은 하느님이 몇몇 사람들 만을 구원에로 예정하신다는 결론에 이르렀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지 않았다고까지 말하였다. 이는 교회의 전통적인 구원론에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노에 대한 이러한 오해의 출발점은 아우구스티노처럼 인간 본성을 아담으로부터 상속받은 구체적 실존으로 이해하지 않고, 아담이 창조 때 받았던 은총을 본성으로 격하시켜서 이해한 데서 비롯되었다. 얀센의 이러한 사상은 '얀센주의' (Jansenismus)란 이름으로 교회로부터 연속적인 단죄를 받았다. 얀센주의의 이러한 경향은 심한 비관주의와 두려움을 조장하는 영성 에 결합되어 윤리적으로 지나친 엄격주의(rigorismus)로 교회 생활을 암울하게 하기도 하였다. 얀센주의에 대한 교회의 단죄는 수많은 신학자들에게 아우구스티노의 저술에 대한 불신감까지 조장시켰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거의 모든 위원회에 참석했던 뤼박(H. de Lubac, 1896~1991) · 콩가르(Y.M. Congar, 1904~1995) · 트라페(A. Trapé)와 같은 현대 신학의 대가들은 성서적 인간학에 바 탕을 둔 아우구스티노의 그리스도교 인간학의 재탐구를 촉구하였다. 이는 또한 올바른 은총론 재정립을 위해서도 필요한 과제이다. 〔현대 은총론의 동향 및 전망〕 20세기 중반에 들어서 면서 신(新)스콜라 신학은 점차 그 기반을 상실해 갔고 사람들은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신학 논쟁들을 점점 멀리 하기 시작하였다. 성서학과 교부학과 전례학의 활발한 탐구 결과 신학의 노선은 점점 더 성서적이고 역사적인 사고 방법에 기초를 두고 전개되어 나갔다. 이러한 신학 의 경향은 은총론의 새로운 지평을 열도록 자극하였다. 인격적 관점 : 신학적인 관점의 변화는 또 다른 신학 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 뤼박 · 콩가르 · 라너(K. Rahner, 1904~1984) · 발타사르(H.U. von Balthasar, 1905~1988)는 전 통 신학처럼 '창조된 은총' 으로부터 자신들의 신학을 전개하지 않고 '창조되지 않은 은총' 에 절대 우위성을 두고 새로운 신학을 시도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은총은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온전히 양도하여, 인간 안에 거처하고, 당신과의 온전한 일치로 인간을 이끌어 가려는 자비로운 하느님 자신이다. 다른 모든 것은 이 기본 실상 (基本實狀)으로부터 연역되고 해설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창조된 은총' 은 '하느님의 자기 전달' (Selbstmitteilung Gottes)과 엄격한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창조 된 은총은 인간이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를 수 있기 위한 작용이며 전제이다. 여기서부터 인간의 자유 역시 올바 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들은 인격 개념 혹은 위격 개념을 도입하여 이러한 은총론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은총은 하느님과 친교로 살게 마련된 인간에게 하느님 친히 당신 자신을 알리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시는 구원사의 단계별로 육화와 구원과 성령 강림과 개인의 구원 사건 등을 다룬다. 이러 한 신학은 모든 사건을 언제나 하느님의 자기 계시라는 관점에서 풀이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기 계시 야말로 태초부터 역사를 움직이고 인간의 응답을 요구하 며 그의 최종 미래를 결정한다고 보며 이를 바탕으로 은 총론을 전개해 나간다. 이는 종래의 존재론적인 은총론 을 위격 개념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이러한 신학의 경향을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라너의 은총론을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라너에 의하면, "하느님의 인간을 향한 자기 전달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은총을 내리시는 하느님 자신이야말로 바로 은총이라는 사실이다. 즉, 은총을 내리 시는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피조물로 내어 주신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기 전달을 통해서, 하느님은 절대적 존재의 자립성을 잃지 않고 당신 자신이 피조적 존재자의 구성적 원리가 되신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기 전달을 받 은 유한한 존재 안에서 이 자기 전달을 '신성화' (神聖 化)하신다" (칼 라너,《그리스도교 신앙 입문》,p. 169). 라너 자 신의 설명에 의하면,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의 자기 전 달 개념의 참된 의미는 하느님께서 당신 스스로 인간 존재 구성의 가장 심오한 핵심이 되도록 하는 것이 하느님의 고유 모습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존재를 부여하 는 의미에서 하느님의 자기 전달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이란 하느님의 절대 자기 전달 사건이다. 여기서 인간은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으로 말미암아 초자연적으로 고양되어 있는 존재로 드러난다. 라너는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초자연적 실존 범주' (das bernatiirliches Existentia)l)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이 개념을 통하여 하느님과 인간의 신비로운 통교 관계와 은총의 보편성과 무상성이 설명된다. 로버츠(Louis Roberts)는 라 너의 이러한 입장을 반영하면서 은총을 다음과 같이 정 리하였다. "첫째, 은총은 인간에게 자신을 내어 주기 위 해 사랑과 자유 속에서 내린 하느님의 결정이고, 둘째, 역사나 계시 혹은 그 밖의 수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신 적인 결정의 전달이며, 셋째, 하느님과 인간의 새로운 관 계의 기초이다." 이러한 은총은 세 단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시적이다. 그레사케(G. Greshake)는 보다 더 구체적인 인간학적 상황을 고려하면서 은총론을 전개하기를 제안하였다. 다 시 말해서 필연적으로 '의미' 를 추구하는 인간에게 그것 을 제시하는 은총론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특히 그는 '자유' 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은총론을 풀어 나갔다. 하 느님과 인간의 상호 인격적인 관계를 각기 '자유' 를 매 개로 한 역동적인 관계 개념에 바탕을 두고 은총을 서술 하였다. "은총은 '하느님이 나에게 어떻게 처신하시는 가? 라는 물음에 대하여, '하느님은 자유롭고, 극도의 사랑으로써 자유로이 행동하신다' 라고 대답하는 관계 개념(Relationsbegriff)이다. 은총은 말하자면 인간에 대한 하 느님의 관계와, 여기서부터 생겨나 하느님의 사랑에 직 면한 인간의 자기 (Selbtverständnis)를 표출한다. 피 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처신을 오로지 극도의 사랑으로만 표시할 수 있다면, 인간의 참된 본성(Natur)이란, 이러한 사랑을 받아들이고, 이에 응답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완성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은총-선사된 자유》,p. 15). 그레사케는 '하느님의 자기 전달' 로써의 은총을 이러한 방법으로 이해하였다. 결국 그에게 있어서 '은총 체험' 은 바로 '사랑 체험' 이다. 하느님과 인간의 인격적인 관 계가 사랑의 통교를 통해서 성취되어 나간다. 인간에 대 한 하느님의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공동체적 관점 : 전통 신학에서는 구원에 대해 말할 때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룩한 객관적인 구원에 각자 주관적으로 참여할 때 구원이 이룩된다고 가르쳤 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구원은 죄의 용서와 악 마로부터 해방을 이룩하는 은총에 있으며, 그것도 인간 을 거룩하게 하는 성화 은총과 실제로 거룩하게 살도록 하는 조력 은총에 있다는 것이다"(그레사케, <은총과 구원, 죄와멸망>, 《현대 신학 동향》, p. 209). 종래의 은총론 교과서 들은 거의 모두가 이러한 내용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여기서 연유한 구원관은 개인의 내적인 쇄신에 집중되어 있어 개인적인 구원만을 강조하는 경향에 젖어 있었다. 이러한 구원관은 성서적인 구원관을 온전하게 설명해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현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구체적인 인생 체험과도 거리가 멀다. 부버 (Martin Buber, 1878~1965)의 저서 《나와 너》(Ich und Du, 1923)가 나온 이 후 인간학 분야에서 '관계' 라는 개념은 더욱 중요시되었 다. 또한 이 개념은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과 신(神)에게 까지 확장되었다. 인간은 이러한 삼중적인 관계 속에서 역사를 이루어 나간다. 이러한 인간의 일상적인 관계는 근본적으로 '공동체' 를 지향하며 '함께 하는 역사 를 구성한다. 근본적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인격적인 관계를 구성하는 은총은 또 다른 관계의 기초가 되어 확장되어 나간다. 스콜라 신학은 은총을 받는 주체의 상황에 따라 '내적 은총' 과 '외적 은총' 으로 구분하였었다. 은총을 받는 주체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초자연적 선물을 '내적 은총' 이라고 불렀고, 이 은총을 불러일으키는 외적 요인으로 써의 은총을 '외적 은총' 이라고 불렀다. 아우구스티노 이래 서방 은총론의 전면에는 '내적 은총' 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렇게 이해된 은총 이해는 과거에 이루어졌던 죄의 체험과 비(非)구원의 체험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하느님과의 초월적 관계에서 자신을 놓쳐 버리고, 이로써 현재의 구원과 무엇보다 미래의 구원을 잃어 버리지 않을까 하는 의식이 전면에 자리잡고 있었다" (《은총-선사된 자유》, p. 124). 그래서 은총론은 항상 죄론 (罪論)을 동반했으며, 구원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에 달려 있었다. 여기서는 죄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파괴시키는 세력이었다. 근세에 들어서면 서 인간의 세계 내적이고 상호 인격적인 측면이 강조됨으로써 인간은 이제 하느님의 계명 안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적 요청을 체험한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신학은 신법(神法), 복음 설교, 성 인들의 모범, 기적 등의 외부적 요인으로만 이해되던 '외적 은총' 의 의미를 심화시키고 확장시키면서 사회적인 차원에서 재해석한다. 구원 역사를 통해서 본 구원과 죄의 역사는 하느님과 인간의 수직적 관계만을 이야기하지 않고, 항상 수평적인 관계도 함께 이야기한다. 성서적 구원관에 의하면, 죄는 하느님과의 단절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과의 단절이기도 하다. 또한 구원에 있어서도 이 연대성의 법칙은 적용된다.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구원 역사 안에서는 죄의 연대성이 존재하듯이 구원의 연대성도 항상 존재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수직적' 도래는 '수평적' 관계나 상황이 변모되는 속에서 구체적이고, 가시적이며, 실재적으로 된다. 이러한 관점을 은총론에 적용시킬 수 있다. "하느님의 은총은 오로지 인간의 내면성 속에만 거처 하지는 않는다. 은총은 인간 존재의 구체적인 차원들을 넘어 비약하지 않는다. 은총은 이 차원들을 창조적으로 변형시키면서, 이들 속에서 그리고 이들을 통하여 자신 을 매개시키고 이들을 포착한다. 이것은 첨예한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분명하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적이고 가시적인 '외적 은총' 이 나타났다"(《은총 -선사된 자유》, pp. 130~13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 난 '외적 은총' 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하다. 인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상 만큼이나 다양하다. 그분의 십자 가와 부활 사건 안에 그분의 모든 일상이 수렴되며, 그 일상은 모든 인간의 구체적 상황이 된다. 하느님은 이처 럼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위격적 관계를 성령 안에서 인간과 우주 전체에 확장시킨다. 이것이 하느님의 구원 경륜이며 은총 경륜이다. 이러한 놀라운 경륜이 인간의 구체적인 관계 체험들을 통하여 역사 안에 드러난다. 새로운 희망과 변화와 발전 을 가져다주는 다양한 체험들은 여러 측면에서 '예수 그 리스도 사건의 직접적인 현실화' 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인 '외적 은총' 이 역사적 매체를 통하여 전수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적 인 행위가 이처럼 은총의 매개 형식과 현현 형식이 된다. 인간들이 희망하고 감행하면서 타인을 위해서 투신하고, 불의한 구조들을 변모시키고, 비인간적인 관계를 제거하고, 언젠가 하느님을 완전히 드러나게 할 저 광명의 전조 (前兆)를 세계에로 이끌어 오는 데서도 이 점은 해당된다" (《은총-선사된 자유》,p. 133).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 은 은총의 현현 형식들뿐만 아니라 구원을 이룩하는 행 위의 결과들까지도 은총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러한 '외적 은총' 은 일상에서 새 출애급을 도출하는 의미로 '해 방하는 은총' 이라 지칭할 수 있다. 여기서 은총이 결코 세계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은총의 사 회적인 차원이 적극적으로 개진된다. 은총이 '자유' 라는 이름을 통해 자기 본 모습을 드러낸다면 거기에는 분명 모든 속박과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은총의 기쁨이 함께 한다. 하느님의 구원하시는 현존인 해방하는 은총' 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은총은 근본적으로 서로간의 관 계 체험을 통해 각자가 혹은 공동체로 하느님을 만나도록 이끌어 주는 가시적인 은총으로 인간뿐만 아니라 자 연 · 우주 인간의 구체적인 상황 전체가 여기에 포함된다. 종말론적 관점 : 현대 은총론은 신학을 전개함에 있어 서 '은총' 이라는 용어 고찰에만 집착하지 않고 보다 폭 넓게 하느님으로부터 거저 통교된 '구원' 전체 의미로부 터 출발하는 경향이 있다. 이 구원의 무상성은 은총의 무 상성과 자유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 는 종말론적인 원칙이 '구원' 에 적용되듯이 '은총' 에도 적용된다. 은총은 약속으로만 주 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은 이미 '은총 체험' 을 통하여 일 상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하느님 현존 체험' 을 하고 있 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충만하고 완성된 '신화' (神仙 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닮음' 의 과정을 통해 서 희망 중에 산다. 피조물도 함께 신음하고 있다(로마 8, 21-25 참조). 이것이 은총의 역동성이다. 그레사케는 현대 은총론을 '하느님 나라' 라는 주제로 전개할 것을 제안하였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 가 구원과 은총의 본질적인 의미를 잘 드러내 줄 뿐만 아니라 그 종말론적인 의미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현존한다. 예수 그리스 도의 인격 안에 이미 현존한다. 사람들이 그분의 말씀을 따라 그분의 삶을 살 때 구원과 은총, 해방과 자유의 삶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구원이며 은총이다. "그분이야말로 '밖으로는' 당신의 말씀과 행적으로 삶의 본보기를 제시하시고, '안으 로는 당신의 영으로 당신의 삶을 본받을 수 있는 능력 을 주신다. 그리하여 인간의 의미 충족은 비록 초보적일 망정 이미 실현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은총 · 구원 · 자유는 이미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레사케, <은총과 구원, 죄와 멸망>, <현대 신학 동향》, pp. 213~ 214). 그러나 하느님 나라가 아직 온전히 실현되지 않고 '그날' 을 기다려야 하듯이, 은총 · 구원 · 자유도 근본적 으로 희망의 차원에 속한다. 그러나 이 희망은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이 아니라 이미 약속된 희망이다. 이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른 협조자 인 성령 안에서 실현된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되새기게 하고 그분을 우리 가운데 현존하게 한다. 성령이 구원 · 은총 · 자 유의 첫 보증으로 주어져 있다. 전통적으로 신학은 성령을 은총과 동일시해 왔다. 성 령으로 인간과 세상은 이미 하느님의 역사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우리가 희망 중에 구원과 은총의 충만을 고 대한다는 것은 은총이 인간의 노력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해 주기도 한다. 이 사실은 또한 하느님의 나라는 우선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하느님의 나라가 회개와 믿음을 촉구하듯이(마르 1, 15 참 조), 은총도 인간의 응답을 요구한다. 인간의 구체적인 삶을 촉구한다. 은총은 받는 것만이 아니라 사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신앙의 실천은 자력으로는 불 가능하고 하느님 나라의 선물을 받아야만 가능하다는 사 실이다. 결국 신앙 실천 역시 은총인 셈이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하느님이 몸소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구원과 은총 신비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역시 이러한 구원 · 은총론의 전개 안에서 보 다 구체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단편적인 일상의 은총 체 험은 이제 하잘것없는 것이 아니라 결국 그 충만을 향하는 밑거름이 된다. 은총은 순수 내적, 탈세속적, 영적 또는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그리고 체험 가능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다. 이는 생명을 주시는 성령 안에서 더욱 현실적이다. (⇦ 은총 논쟁 ; → 몰리나주의 ; 신학 ; 신학사 ; 신화 ; 아우구스 티노, 히포의 ; 얀센주의 ; 은총 ; 펠라지우스주의) ※ 참고문헌  기스벨트 그레사케, 심상태 역, 《은총 : 선사된 자 유》, 신학 선서 I , 성바오로출판사, 1979/ 一, 정양모 역, <은총과 구원, 죄와 멸망>, 《현대 신학 동향》, 신학 총서 24, 분도출판사, 1984, pp. 209~218/ 칼 라너, 이봉우 역, ,《그리스도: 신앙 입문 : 현대 가톨릭 신학 기초론》, 사목 총서 15, 분도출판사, 1994/ 이찬수, 《인 간은 신의 암호, 칼 라너의 신학과 다원적 종교의 이해》, 분도출판 사, 1999/ 루터교 세계 연맹과 교황청 그리스도인 일치 촉진 평의회 편, 심상태 역, <루터교 세계 연맹과 가톨릭 교회의 의화 교리에 대한 합동 선언문>,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13호(2000. 2), pp. 211~2471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6, 1996~2005항/ E.M. Burke et al., 《NCE》 4, pp. 658~685/ C.M. Aherne, Grace, Controversies on, 《NCE》 6, pp. 675~678/ Stephen J. Duffy, The Dynamics of Grace : Perspectives in Theological Anthropology, Minnesota, The Liturgical Press, 1933/ V. Grossi · B. Sesboüe, Grace et justification, L'homme et son salut, Histoire des dogmes II , Paris, Desclée, 1995, pp. 269~373. 〔權赫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