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민단 義民團

글자 크기
9

1920년대 초 천주교인으로 조직된 만주의 독립 운동 단체. 기록에는 대한 의민단, 의민회, 대한 의민회 등으 로도 나타난다. 왕청현(王淸縣) 춘화향(春華鄕) 알하하 (嘎呀河)에 본부가 있었으며, 병력은 200~300명이었 고, 무기는 군총 400정, 권총 50정, 수류탄 등을 보유하 였다. 단장 방우룡(方雨龍, 方禹傭), 부단장 김연군(金演 君), 참모장 김종헌(金鍾憲), 영장(營長) 허은(許垠) 외 에 재정부 · 선전부 · 외교부 · 통신부 · 경위부 · 교육부 등의 조직을 갖추었고 여러 곳에 지부도 설치되었다. 재 정은 천주교 신자들에게 기반을 두고 있어 비교적 풍부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1920년 독립 운동 단체의 연합을 추진하기 위하여 파견 한 군무위원 왕삼덕(王三德)이 1920년 7월 3일자로 정 부에 보고한 서류에 따르면, 임시 정부의 권유로 7월 1 일 왕청현 알하하에서 연합 회의를 개최하자 9개 단체가 참여하였는데, 의민단은 방우룡이 대표로 참석하였다고 한다. 이해 7월 26일 북간도 독립군들이 동도독군부(東 都督軍府)를 창설하자 의민단은 연길현(延吉縣) 숭례향 (崇禮鄉) 명월구(明月溝)에 주둔한 제2 대대로 편성되었 으며, 방우룡이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방우룡의 집 과 천주교회 건물이 제1군사령부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의민단은 독립 운동 단체인 대한 국민회, 대 한 독립군과 함께 1920년 7월 사관 양성소를 설립하기도 하였으나, 그 해 9월 1일 일본의 압력을 받은 중국 기 병의 방화로 폐교되었다. 9월 29일 의민단은 여러 독립 운동 단체와 북로 사령부(北路司令部)를 구성하여, 10 월 21일 이후 홍범도(洪範圖) · 김좌진(金佐鎭)이 이끈 연합군의 일원으로 청산리(靑山里) 전투에 100여 명이 참가하였다. 10월 29일에는 대한 신민단(大韓新民團) 등과 함께 상해 임시 정부의 지휘를 받는 총판부(總辦 府)를 설치하였으며, 의민단장 방우룡은 연길 · 화룡(和 龍) · 돈화(敦化) · 액목(額穆) 등을 관장하는 간북 북부 총판부(璋北北部總辦部)의 부총판으로, 김연군은 참사 (參事)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의민단은 일제의 독립군 추격으로 일부는 러시아령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였다가 1921년 6월 29일 발생한 '자유시 참변' 에서 희생 되었고, 일부는 만주에 잔류하였던 것 같다. 이후 의민단에 관한 기록은 찾아지지 않고 있는데, 의민단이라는 명 칭으로 활동이 계속되지 못한 것은 1920년 8월 근거지를 이동할 때 분열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3 · 1 운 동 이후 만주에서 독립 전쟁이 수행되는 과정에 천주교 신자들이 무장 투쟁 단체를 조직하여 반일 투쟁에 나선 것은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 참고문헌  蔡根植 《武裝獨立運動史》, 公報處, 1949/ 金正明 편, 《朝鮮獨立運動》 I . Ⅲ, 原書房, 1967/ 姜德相 편, 《現代史資料》 27 · 28, みすず書房, 1970/ 《독립 운동사 자료집》 10, 독립 유공자사 업기금운용위원회, 1976/ 在上海日 本總領事館 警察部, 《朝獨立 運動年鑑》 1932/ 조광, <일제하 무장 독립 투쟁과 조선 천주교회>, 《敎會史研究》 11, 1996/ 윤선자, 《일제의 종교 정책과 천주교회》, 景 仁文化社, 2001. 〔崔起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