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관 擬人觀

〔라〕Anthrophomorphismus · 〔영〕Anthrophomorp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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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인간의 형태와 속성들로 묘사하는 관념 〔어원과 정의〕 의인관이란 의미를 지닌 라틴어 "안트 로포모피스무스" (Anthrophomorphismus)는 그리스어로 '인간' 을 의미하는 "안트로포스"(ἄνθρωπος)와 '형상' 이란 의미의 "모르페" (μορφή)를 합성한 것에서 유래되었 다. 그래서 어원적으로는 "인간의 형상으로 신성을 표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이 용어를 "신인 동형론" (神人同形論)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의인관은 세계 종교에서 실례를 찾아볼 수 있는데, 신 화와 종교의 그림(iconograph)에 나타난다. 넓은 의미에 서 의인관은 비인간적인 존재 내지는 대상에게 인간의 특성이나 속성을 적용한다. 의인관은 원시 종교의 일반 적 현상으로써 세계 전역에 퍼져 있다. 의인관은 그리스 와 초기 로마 종교에서 나타난다. 의인관은 신적이고 신 령한 형상을 종교 개념과 사상의 범주 안에서 인간의 생 각과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그래서 그리스 종교에서 하 늘과 땅은 신들과 같이 표현된다. 또한 신성에 대한 의인 관 사상을 통해서 백성들을 통치하고 지배하였다. 의인 관의 사상은 아우구스티노(Augusinus Hipponensis, 354~ 430)에 의해서 사용되었다. 그는 부패될 인간의 형상 안 에 하느님의 형상이 있다고 생각하였다(《PL) 42, 39). 그 의 영향을 받은 라이프니츠(G.W. von Leibniz, 1646~1716) 도 의인관을 사용하였다. 일반적인 측면에서 의인관은 비물질적인 것을 묘사하는 것이다. 결국 영적인 것이 물리적인 것 안에 존재한다. 〔성서에서의 의인관〕 구약성서 : 의인관은 구약성서에 서 명확하게 발견된다. 여기에는 세 가지 주요한 이유가 따른다. 첫째, 구약성서의 배경적인 측면에서 원시적인 민족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형상을 묘사하는 언어를 사 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약성서 중에서도 모세 오경을 비롯하여 더 고대의 것일수록 의인론적인 표현을 많이 담고 있다. 둘째, 하느님은 구약성서 안에서 성조들 과 예언자들에게 자주 인간적인 형상을 통해 당신의 현 현을 취하시는데 이때 인간의 형상은 신성을 그 안에 감 추기 위해 하느님께서 택한 장막의 역할을 한다. 이에 따 라 예언서들은 의인론적인 표현으로 채워져 있고 특히 이사야서는 이 사실을 확고하게 증언한다. 셋째, 시편처 럼 시적인 특성을 지닌 구약성서의 여러 책들은 비유 양 식을 빈번하게 채용할 필요가 있었는데 여기에 의인론적 인 표현이 사용된 것이다. 비록 하느님은 성(性)이 없지 만 남성으로 특성화되고(아버지 · 목자 · 왕) 간혹 여성으로 표현된다(동정심 많은 어머니). 이와 같이 의인관은 구약성서의 많이 사용된다. 이를 증언하는 구약성서의 여러 표현들을 살펴보면, 우선 인 간의 오감을 통해 나타나는 모든 현상을 하느님께 적용 시키고 있다. 하느님은 눈을 지니심으로써 모든 것을 보 시고(1사무 15, 19 ; 2사무 15, 25 ; 1열왕 15, 5 : 2열왕 19, 16 ; 2역대 26, 4 ; 36, 12 ; 시편 9, 14 ; 10, 5 ; 30, 23 ; 32, 18 ; 34, 22 ; 잠언 24, 18 ; 집회 45, 23 ; 이사 37, 17 ; 예레 7, 11), 귀를 가지심으로써 모든 것을 들으시며(민수 9, 1 ; 신명 33, 7 ; 2열왕 13, 4 ; 19, 16 ; 시편 5, 2 ; 85, 1. 6 ; 93, 9 ; 이사 37, 17 ; 미가 7, 7 ; 즈가 5, 4), 냄새를 맡 으시고(창세 8, 21 ; 레위 1, 17 ; 2, 2 ; 에제 20, 41), 만지 기도 하신다(욥 19, 21 ; 시편 103, 32 ; 143, 5 ; 예레 1, 9). 둘째, 인간 신체의 여러 장기들과 그 행위들이 마찬 가지로 하느님께 귀속된다. 하느님은 입술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이사 1, 20 ; 34, 16 ; 58, 14 ; 예레 23, 16) 당 신의 입김으로 원수들을 죽이시며(이사 11, 4) 그분의 말 씀은 삼키는 불이다(이사 30, 27). 하느님은 당신을 저버 린 불경한 이들에게서 등을 돌리시고(예레 18, 17), 구원 하시고자 하는 이들에게 당신 얼굴을 보여 주신다(시편 59, 4. 8. 20). 하느님의 오른팔은 모든 일을 할 수 있고 (시편 14, 14 ; 17, 36 ; 19, 7 ; 20, 9 ; 이사 19, 25 ; 29, 23 ; 45, 11 48, 13 ; 52, 8 54, 8 ; 예레 21, 5 ; 32, 21 ; 하바 2, 16), 그분은 말씀하시기 위해 팔을 들어 올리시며 (이사 52, 8), 죄인들을 부르시기 위해 당신 팔을 펼치신 다(이사 45, 2). 하느님은 길 잃은 양을 당신 어깨에 메고 가시고(이사 50, 11 ; 호세 11, 3), 땅은 그분의 발판이 된 다(이사 56, 1). 하느님의 내장과 심장은 후회와 동정과 사랑으로 동요된다(창세 6, 6 ; 예레 31, 20). 하느님은 하 늘과 당신의 성전에서 살고(이사 8, 18 ; 33, 5 : 57, 15 ; 즈가 8, 3), 당신의 어좌에 앉아 계신다(이사 6, 1 ; 16, 5 ; 37, 16 ; 다니 3, 54). 하느님은 일어나시고(아모 7, 9), 싸 우기 위해 나아가시며(즈가 14, 3), 내려오셔서(창세 11, 7), 산들을 가로질러 가시며(아모 4, 13 ; 미가 1, 3), 땅과 바다 위를 달리신다(하바 3, 12. 15). 하느님은 헐벗은 자 를 두 팔로 감싸 안으시고(이사 52, 10), 활을 당기시며 칼을 휘두르시고(이사 27, 1 ; 예레 12, 12 ; 25, 29 ; 애가 2. 4 ; 3, 12 : 에제 5, 2 ; 12, 14 ; 21, 9 ; 하바 3, 11), 원 수들을 쳐부수신다(이사 14, 25). 또한 하느님은 치시기 도 하고 상처를 낫게 하시기도 한다(이사 6, 10 ; 30, 26 ; 예레 30, 17). 그리하여 하느님은 쓰러뜨리기도 하고 일 으키기도 하며 부수기도 하고 세우기도 한다(1사무 2, 68 ; 이사 5, 2 ; 9, 14 ; 51, 16). 셋째, 구약성서는 하느님을 인간적인 여러 감정들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하느님은 사랑하시고 미워하시며 (이사 1, 14 ; 42, 1 ; 48, 14 ; 예레 12, 8 ; 31, 3), 원하시 고 즐거워하시며(이사 42, 1 ; 52, 5 ; 55, 19), 괴로워하 시고(창세 6, 6), 기다리시며(호세 3, 3), 참으시고(즈가 11, 8), 화를 내시며(시편 2, 12 ; 5, 11 : 79, 5 84, 6 ; 예 레 4, 8 ; 30, 24 42, 18 ; 에제 6, 12 ; 7. 8 ; 다니 11, 36), 후회하시는(창세 6, 6 ; 시편 109, 4 ; 예레 4, 28 ; 18, 10 ; 즈가 8, 14-15) 등의 감정을 지니신 것으로 묘사된다. 넷 째, 구약성서는 신적 지성의 활동을 묘사하기 위해 인간 적 지성의 활동과 상태를 이용하기도 한다. 즉 하느님은 기억하시고(토비 3, 3 ; 시편 19, 4 ; 88, 51 ; 113, 12), 예 견하시며(2열왕 19, 27 ; 시편 138, 4), 잊어버리시고(시편 12, 1 ; 집회 23, 19), 생각하시며(지혜 4, 17 ; 즈가 1, 6 ; 미가 4, 12), 곰곰이 돌이켜 보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신약성서 : 구약성서의 영향 아래 신약성서에도 하느 님을 의인론적으로 묘사하는 부분들이 있다(로마 1, 18 이하 ; 5, 12 ; 1고린 1, 17. 25 ; 히브 3, 15 ; 6, 17 ; 10, 31). 그러나 신약성서에 따르면 하느님을 인간과 동일하 게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거울에 비추어 보듯 보며(1고 린 13, 12), 하느님은 인간의 손으로 만든 성전에 계시지 않고 가까이 할 수 없는 빛 속에 계신다(1디모 6, 16). 하 느님은 영이시고(요한 4, 24), 하느님을 완전하게 바라보 는 일은 종말의 완성에 이르러서야 가능하다(1고린 13, 9 ; 2데살 1, 7) 신약성서에서 하느님의 형상화는 구약성서와 달리 완전히 새로운 근거 위에 자리하게 된다. 구약성서에서 의 인론적인 언급의 합법성이 하느님 모상에 따라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데 있다면, 신약성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느님의 계시에 근거한다. 사실 신약성서는 개별적인 의인관을 비교적 유보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 한 유보의 특별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에서 비 롯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가 바로 다른 모든 것을 뛰어넘어 신약성서의 기록과 신앙 고백이 보여 주는 최 고의 의인관을 나타내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거처하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요한 1, 14), "도리어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 셨으니 사람들과 비슷하게 되시어 여느 사람 모양으로 드러나셨도다"(필립 2. 7), "그 말씀은 처음부터 계셨으 며, 우리가 듣고 우리 눈으로 보고 살펴보고 또 우리 손 으로 만졌던 것입니다"(1요한 1, 1), "나를 본 사람은 이 미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요한 14, 9). ※ 참고문헌  R.T.A. Murphy, Anthrophomorphism in the Bible, 《NCE》 1, p. 614/ J. Schreiner, Anthrophomorphismus Biblisch, 《LThK》 1, pp. 734~735/ Hans-Walter Schiitte, Anthrophomorphismus SystematischTheologische, 《LThK) 1, pp. 735~7371 Jörg Splett, AnthrophomorpisinWesen und Bedeutung, I , pp. 186~187/ Werner Post, Anthrophomorphismus Biblisch, I , pp. 187~189/ A. Chollet, 《DTC》 I pp. 1367~1370/ W. Eichrodt, Theologie des Alten Testaments I, Stuttgart Göttingen, 1968(박문재 역, 《구약성서 신학》 1, 크리스챤 다이제스 트, 1988, Pp. 222~232). 〔鄭學根〕
〔신학에서의 의인관〕 신학에서 의인관이라는 용어는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여 하느님을 이해하려는 경향을 지 칭한다. 바르트(K. Barth, 1886~1968)가 말했듯이 신학은 하느님에 관해 말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우리는 인간이 기 때문에 하느님에 대해 하느님이 하신 그대로 말할 수 는 없다. 이러한 당위와 무능 사이에 놓인 인간이 그럼에 도 불구하고 말해야 하는 숙명은 하느님에 대한 모든 말 을 인간적인 형태의 말에 근접하게 만들었다. 하느님은 감추어져 있고, 인지될 수 없으며, 말로 표현 될 수도 없지만 의인론적 표현 안에서 당신의 형상을 비 추어 주신다. 역사적으로 의인관은 초월적인 하느님을 인간화시킨다는 위험성 때문에 비판받아 왔다. 이와 같 은 위험성은 신화의 표현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는 성격 의 것이다. 신화에서 신은 단지 인간의 모습을 확대 · 투 사한 존재로 그려진다. 이에 따라 이성적으로 생각해 볼 때, 만약 신이 인간을 확대해서 표현한 존재일 뿐이라고 한다면, 인간이 신이 될 수 없다거나 신일 수 없다는 아 무런 이유도 발견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위험성에 제 약받다 보면 우리는 신을 추상적인 범주에서만 이해하게 되어 신으로부터 진실하고 역동적인 생명을 빼앗아 버리 게 된다. 따라서 의인관은 그 위험성을 고려하여 적절한 표현법을 찾아야 할 과제를 지니고 있다. 은유와 비유 : 의인관은 시적인 상징 내지는 특히 표 현할 수 없는 신적인 속성을 위한 은유들이다. 성서는 이 러한 의인관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하느님의 본질과 습관 을 이해하는 데 남자와 여자의 제한된 재능에 낮추어 대 등하게 하고 있다. 하느님은 아담과 함께 낙원에서 걸었 으며, 그와 함께 이웃처럼 이야기한다. 하느님은 화를 내 고, 매우 인간적인 방법으로 모든 것을 위로한다. 그러나 동일한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새로운 하늘의 뜻으로 시대 가 다가오고 있다. 신앙에 의해 비추어진 인간 지성의 노 력이라는 신학적 이해는 하느님에 대해 어떤 물질이 아 니라는 것을 명백하게 볼 수 있다. 만일 하느님께서 용맹 한 자라고 불린다면 이것은 은유이다. 만일 하느님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며, 감정을 터뜨린다면 이것도 역시 은유이다. 다른 점에서 하느님이 인식되고, 영적 감성에 서 사랑한다고 말해진다면 이것은 은유가 아니다. 하느 님은 참으로 인식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인간 존재가 하는 것과 같지만, 다른 점이 있다. 그래서 이것 을 비유라고 말한다. 인간의 인식과 사랑은 불완전하다. 그러나 하느님의 인식과 사랑은 영원하다. 무엇으로 비 유와 은유를 구별할 수 있는가? 누가 하느님은 소리를 지르신다고 말한다면, 그러나 사실 하느님은 참으로 함 성을 지를 수 없다. 하지만 하느님이 사람을 어느 지역에 서 끄집어내기 위하여 소리를 지르신다면 그것이 의인관 이다. 그러나 여전히 의인관에서 심리적인 문제가 남아 있다. 의인관이 은유보다 문학적일 때 위험 요소가 발생 한다. 한편 의인관 언어의 반응은 회의론과 불가지론으 로 변할 수 있다. 하느님은 다른 점에서 토론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의 미〕 의인관은 인간이 알고 있는 애매하고 알기 어 려운 존재, 인간의 삶에 감각 · 느낌을 주고, 인간을 지켜 주고 말을 하게 하고 말을 건네는 존재인 하느님에게 더 가까이 그려지는 인간에게 이익이 된다. 그러나 위험스 러운 것은 하느님의 거룩함에 가까이 할 수 없고, 반대로 하느님의 위엄과 전능의 시각을 잃어버릴 수 있는 인간 의 근접이다. 그러나 발전된 신학적 인간학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계시와 현시로서 나타난다. 이 점에서 의인관 은 인간의 의신관(擬神觀)의 본질을 반성하고 있다. 포 이어바흐(L. Feuerbach)가 신학을 인간학으로 변형하면서 그것을 시도했듯이, 인간의 빛으로 하느님을 설명하는 것을 시도하지 말고 오히려 인간을 하느님의 신비에 환 원하는 것이다. 거기서 모든 자신들의 성격이 분명해 진 다. 인간에 부정적인 반대로써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육화의 신비는 의인론의 최고 정당화이다. 결국 의인관에서 역사적으로 신적 신비를 열어 보인 의 의를 찾을 수 있다. 성서에서 보듯이 의인론적 표현은 하 느님이 인간적인 말을 통해 스스로를 인식하도록 드러내 보이시는 방식이다. 나아가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을 지니 고서 창조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인간이며, 하 느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화되었다는 사실로 말미 암아 의인관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합법 적인 방식이 된다. 의인관의 신학적 의의는 하느님을 인 간 위주로, 인간을 통하여 밝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신 적 신비에로 회귀시키는 것이며 이로써 신적 신비 자체를 더욱 순수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결국 의인관은 한편으로 하느님에 대한 인간적인 언어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인 동시에 인격적인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생생한 신앙 표현 이라고 볼 수 있다. (⇦ 안트로포모르피즘)
※ 참고문헌  Sinclair B. Ferguson Ed., New Dictionary of Theology, Illinois, Inter-Varsity Press, 1966/ Karl Rahner ed., Encyclopedia of Theology, Tunbridge Wells, Kent, Burns & Oates, 1986/ R.L. Richard, 《NCE》 1, pp.614~615/R.J. Zwi Werblowsky, (ER) 1, pp. 316~320.〔郭承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