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사리아

[라 · 영]Caesarea · [그 · 독]Kaisare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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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변의 가이사리아 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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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변의 가이사리아 항구.

가이사리아로 불리는 도시가 세 곳이 있다. 즉, 지중해변 가이사리아,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가빠도기아의 가이사리아이다.
〔지중해변 가이사리아(일명 팔레스티나의 가이사리아)〕 기원전 22~9년경, 헤로데 대왕이 지금의 텔 아비브에서 북쪽으로 50여km 떨어진 이곳에 대대적인 공사를 벌여, 그리스 · 로마식 도시와 항구를 건설했다. 그는 로마 황실의 호의를 사려고, 로마 제국의 첫번째 황제 아우구스투스 체사르(그리스어로는 카이사르)를 기리는 뜻에서 새 항구 도시를 가이사리아라고 명명했다. 이런 정치적 동기 못지 않게 경제적 동기도 컸었다. 그는 로마와 중동 간의 무역을 장악코자 알렉산드리아와 맞먹는 항구를 세웠다. 여기서 그는 막대한 수입을 올려서 예루살렘 성전의 증축, 헤브론 삼대조 묘소의 단장, 사마리아 신축 등 대대적 건축 공사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는 가이사리아에 상 · 하수도, 아우구스투스 신전, 궁전, 극장, 원형 극장, 항구(Sebastos, Portus Augusti)를 건설했다(요세푸스, 《유대전쟁》 1권 pp. 408~415 ; 《유대고사》 15권 pp.331~341).
서기 6년부터 500여 년 동안 로마 총독이 여기에 상주했다. 본시오 빌라도는 26~36년 간에 여기서 총독으로 재임하던 중 30년 봄 예루살렘에 가게 된 기회에 예수를 심문하고, 4월 7일 금요일 정오쯤에 사형 언도를 내리는 동시에 십자가형을 명했다(요한 19, 14). 1961년 극장 폐허를 발굴하던 중 "본시오 빌라도 유대 총독"이라고 새겨진 돌덩이가 나왔다. 베드로는 교회사상 처음 으로 가이사리아에서 이방인을 교회에 받아들였다. 곧, 로마군 백부장 고리넬리오 가족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것이다(사도 10장). 52~60년경에 노예 출신인 펠릭스가 총독으로 재직했는데, 이 자는 매우 불성실한 인물이었다. 펠릭스 재직 때 사도 바울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된 다음, 가이사리아에서 두 해 동안(58~60년경) 미결수로 옥고를 치렀다(사도 21, 27-24, 27). 그의 후임 페스도는 명문 출신답게 매우 충실한 총독이었다. 페스도가 부임하자 바울로는 로마 황제에게 가서 재판을 받고 싶다는 말을 했고, 그 결과 바울로 사도는 60년 늦가을 쯤, 가이사리아에서 출항하여 61년 초봄에 로마에 당도했다(사도 25-28장). 후대에 와서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재위 : 117~138) 때 두번째 상수로와 석조물 시설을 갖춘 경마장이 건설되었다.
3세기에 이르러 호샤야, 압바후, 이사악 하빠하 등 탁월한 율법학자들이 가이사리아 학파를 이루었다. 이들의 미쉬나 법전 해석은 5세기 초 팔레스티나 탈무드, 일명 예루살렘 탈무드 편찬에 크게 기여했다. 알렉산드리아 출신 교부 오리제네스(231~250년 가이사리아 체류)도 여기에 와서 성경 해석에 우의적 방법을 적용하여 신학을 창시했고, 이어 그의 후학 밤필루스(240~309?), 밤필루스의 제자 에우세비오(260-340?) 등을 거치면서 가이사리아 신학파가 형성되었다. 그들이 갖춘 장서는 7세기에 아랍인들이 약탈 · 파괴할 때까지 지중해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 도서관이었다. 에우세비오는 315년 가이사리아의 주교가 되고, 323년 사도 시대 때부터 그의 시대까지의 《교회사》 10권을 완성했다. 또한 그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고문으로 《콘스탄티누스의 생애》를 집필했는데, 몹시 아부하는 모습이 역겨울 정도이다. 에우세비오는 예언적 그리스도교를 제도적 종교로 탈바꿈시키는 데 일조한 사람이라는 혹평도 듣는다(알리스테어 키, 《콘스탄티누스 대 그리스도》, 한국신학연구소, 1988). 640년 아랍인들이 점령했던 가이사리아를 1101년 5월 프랑크족 십자군이 탈환했다. 가이사리아를 방문하면 우선 거대한 성벽이 눈에 띄는데, 이것은 프랑스 성왕 루이 9세가 1251~1252년에 구축한 요새이다. 요새 규모는 12헥타르 남
짓하다. 따라서 헤로데 대왕 시절의 가이사리아의 3분의 1 규모에 불과하다.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갈릴래아 호수에서 북쪽으로 100리 떨어진 수원지에, 헬레니즘 시대엔 파네아스로, 로마 시대엔 필립보의 가이사리아라고 불리던 도시의 폐허가 있다. 요즘엔 이 폐허를 '바니아스' 라고 부른다. 그 북쪽에 있는 헤르몬 산(해발 2,814m)의 눈이 녹으면서 석회석 암반 속으로 스며들었다가 네 곳에서 분출하여 요르단 강을 이루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수원지가 단
(Dan)이고, 두번째로 큰 수원지가 바니아스이다. 병풍처럼 둘러친 바위 아래서 솟아오르는 바니아스 지하수는 장관을 이루고 있다.
헤로데 대왕과 클레오파트라 왕비 사이에 태어난 헤로데 필립보는 기원전 4년부터 서기 34년까지 갈릴래아 호수 북쪽에 위치한 이두래아와 드라코니디스 지방의 영주로 행세했었다(루가 3, 1). 그는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와 혼인했다(마르 6, 17은 오보). 그는 기원전 2년경, 판(Pan : 半人半獸의 그리스 神)을 섬긴다고 해서 파네아스라고 불리던 이 헬레니즘 도시를 대폭 확장하여 영지의 수도로 삼고, 필립보의 가이사리아라고 개칭했다. 필립보 자신이 로마 제국의 첫번째 황제 아우구스투스 체사르를 기려서 세운 도시라는 뜻이다. 아그리파 2세(재위 : 53~94)는 이 도시를 더욱 넓히고, 네로 황제(재위 : 54~68)에게 충성하는 뜻으로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네로' 라고 또다시 개칭했다. 이 도시 발굴은 이제서야 겨우 시작되었다.
수제자 시몬 베드로는 가이사리아로 가던 도중에 예수님의 정체를 밝혀 메시아(그리스도)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예수와 당신 제자들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근처·촌락으로 떠났다. 그분은 길을 가시며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하고 합디까?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이렇게 말씀 드렸다. '세례자 요한이라고들 합니다만, 다른 이들은 엘리야라고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예언자들 중의 한 분이라고도 합니다. 이어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러면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하겠습니까? 하고 물으시니, 베드로가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을 나무라시며 당신에 관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마르 8, 27-30 ; 참조 : 마태 16, 13-20).
〔가빠도기아의 가이사리아〕 이곳은 과거만이 아니고 현재에도 터키 중부 가빠도기아 지방의 대표적 도시이다. 지금은 약간 변음하여 카이세리(Kayseri)라 한다. 서기 17년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재위 : 14~37)는 가빠도기아 지방을 로마 제국의 속주로 삼고 가이사리아를 속주의 수도로 정했다. 이미 1세기 말엽에 이 지방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것 같다(1베드 1, 1). 가이사리아 주교로 명성을 떨친 이들로는 오리제네스의 제자 피로밀리아노(168년 사망)와 바실리오(329/330~379)를 꼽을 수 있다. 바실리오는 성령론 및 수도회 규칙서 소본과 대본 두 종류를 저술했다. 가빠도기아 지방은 1174년부터는 셀죽터키에 예속되고, 1515년부터는 오스만 터키에 예속되었다. 1895년 오스만 터키 제국이 아르메니아 민족 말살 정책으로 아르메니아 정교도가 소멸되고, 1923년 터키 공화국은 로잔느 조약에 따라 그리스인들을 그리스로 송환함으로써 그리스 정교회도 사라졌다. (→ 가나안 ;가빠도기아)
※ 참고문헌  정양모, <지중해변 가이사리아>, 《이스라엘 성지, 어제와 오늘》, 생활성서사, 1988, pp. 123~126/ 이영헌, <바니야스 필립비의 가이사리아>, 《이스라엘 성지, 어제와 오늘》, 생활성서사,1988, pp. 156~159/ Michael Avi-Yona, 《EJ》 51 John Kutsko, Caesarea Philippi, 《ABD》 1/ J. Gribomont, Caesarea in Cappadocia, 《NCE》 3/ R.L.Hohlfelder, Herod the Great's City on the Sea, National Geographic 171~172, 1987, pp.260~279/ Robert L. Hohlfelder, Caesarea, 《ABD》 1/ A. Raban, Caesarea aritima, 《RB》 91~92/ A. Raban, Caesarea Harbor Excavation Project, 《IEJ》34. 〔鄭良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