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환 李家煥(1742~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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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자들과 서학에 대해 토론한 이가환(탁희성 작).

유학자들과 서학에 대해 토론한 이가환(탁희성 작).


조선 후기 정조 연간의 뛰어난 학자이자 정치가. 호는 금대(錦帶) · 정헌(貞軒), 자(字)는 정조(廷藻)이다. 본 관은 여주(驪州)로서, 원래 여주 이씨가 대대로 거주했 던 서울 서대문 근처인 정동(舊貞陵港)에서 태어나고 성 장하였다. 조선 후기 경기도 지역 남인이자 대실학자인 성호 이익 집안의 학통을 이은 정산 이병휴(貞山 李秉 休)와 혜환 이용휴(惠寰 李用休)에게서 학문을 배워 대 성하였다. 1776년(정조 1) 증광 문과에 급제한 이후, 정 조로부터 깊은 신임을 받아 병조 판서에까지 오르는 등 비교적 순탄한 학술 관료로 생활하였다. 그러나 1791년 진산 사건이 일어난 이후부터는 천주교에 입교하는 등 서학에 심취하였다 하여, 반대 정파로부터 끊임없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1801년(순조 1) 신유 옥사에 연루되어 심문 도중 곤장 에 맞아 죽었는데, 천주교회 지도자이자 외국 군함을 청 한 수괴로 지목되어 역적으로 단죄되었다. 묘소는 충청 도 덕산(德山)의 장천(長川)에 있다. 황사영의 <백서>로 판단하면 그는 천주교 신자로서 죽었다. 그러나 실록 및 추안(推案)을 위시한 사료로 보면, 1791년 이후 충주 목 사나 광주 부윤으로 재직할 때 천주교 신자를 탄압한 사 실도 있으므로, 그보다는 당시 서양 학문의 진정한 수준 을 파악하는 것이 사회에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열심히 노력한 지식인이었다. 문집으로 《금대집》(錦帶集) 10책 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 전해지는 문집은 약간의 시문 을 수습한 정도에 불과하다. 이가환은 종조부인 성호 이익이 노력한 명말 청초 경 세학파에서 이어지는 백과 전서적 박학풍의 학문을 이어 서 대성하였다. 특히 암기력이 뛰어난데다 독서를 많이 하여 보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였으므로, 고증을 하고 논 거를 찾아야 하는 《대전통편》(大典通編) · 《춘관지》(春 官志) · 《갱장록》(羹錄) · 《규장전운》(奎章全韻) 같은 어려운 편찬 사업에 주로 발탁되었다. 정조는 즉위 초부 터 이가환의 학문 실력을 높게 평가하여 각별하게 대접 하였고, 그의 문장을 육경 고문에 근거한 당시 최고 수준 이라고 평가하였다. 성호 이익의 학통을 이은 이가환은 주자 성리학의 나 라인 남송(南宋)보다는 통일 왕조를 최초로 오랫동안 유 지했던 한(漢)나라를 모범으로 보는 기록을 남기고 있 다. 그는 정조 2년에 군주와 특별 대담을 하였다. 여기서 그는 삼대 이전은 주(周)나라의 육관제(六官制)를 이상 적으로, 삼대 이후는 한나라의 구경제(九卿制)를 실제 현실 적용에 우수하다고 진언하였고, 당 · 송 · 명 시대는 비판적으로 보는 입장을 개진하였다. 또한 봉건제 실시 기의 문화적 영향력 자체는 강력한 군현제 실시기에 미 치지 못했음을 지적하기도 했지만, 조선의 관제는 주나 라 시절의 관제인 봉건제의 기본 정신을 지향해야 한다 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는 결국 그의 종조부인 성 호 이익의 견해, 곧 주자의 원론적 봉건제론의 부족한 점 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는 원론적인 봉건 제보다는 군현제의 장점을 절충한 전한(前漢)의 잡건(雜 建) 형태의 국가 체제를 현실적으로 좋다고 판단한 당시 경기 지역 남인들의 견해이기도 하다. 당시 주자 성리학 을 바탕으로 대대로 내려오는 양반 벌열의 특권을 긍정 하는 노론계 경화 벌열(京華閥閱)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 다. 이가환은 특히 서양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기하 학에 대한 이해는 스스로 독보적인 수준에 이르렀다고 자부하였다. 일찍이 성호 이익은 서양 선교사들이 만든 세계 지도를 보고서, 성인은 하늘을 대신하여 인간을 이 롭게 하는 사람이므로 이를 만든 리치(Matteo Ricci)야말 로 성인이라고 칭찬한 일이 있었다. 이가환 역시 마찬가 지 견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 서양 선교 사들이 저술한 서양학 서적은 그들이 창작한 것이 아니 고 수많은 전문가들의 견해를 종합한 것이라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이가환은 일찍이 서학 서적을 깊게 공부한 이벽과 논쟁을 한 후 천주교 성인의 전기인 《성년광익》 (聖年廣益)까지 읽고 나서, "만약 이것이 바른길이 아니 라면 서양 선비〔西士〕는 바다를 건너오지도 못하고 벼락 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익과 이가환의 이러한 견해는 당시 큰 파란을 불러일으 켜서, 남인들 사이에서도 성호 문집 정본에 '마테오 리 치는 성인' 이라는 내용이 실제 있었는지의 여부를 놓고 심각한 논란이 벌어지기까지 했었다. 이익과 이가환이 한 말은 바로 전체 세계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보편성을 지닌 문화가 세계 문화〔中華文化〕라는 의미였다. 이 때문에 이가환은 서양인 신부를 조선으로 초빙해 오는 사업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이를 위해 자금 지원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당시 다른 사람들에게 는 천주교 세례를 받도록 권했으면서도, 자신은 중국에 있는 서양인 신부를 만나 본 이후에야 세례를 받으려고 했다. 이는 이가환이 서양 학문의 진정한 수준을 파악하 기 위해서 천주교를 연구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청나 라 수준에는 도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가환은 채제공(蔡濟恭)의 충실한 정치적 후계자였 다. 소론 준론 서명선(徐命善)을 영의정으로 하는 정권 이 들어선 후 채제공이 집중 공격을 받아 8년 간 정계에 서 물러나 있는 동안에, 오직 이가환과 정범조(丁範祖) 유항주(俞恒柱) 등 몇 명만이 흔들림 없이 끝까지 채제 공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동시에 이들은 채제공과 개인 적으로 친밀했으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적대하는 편에 가 담한 목만중(睦萬中) 채홍리(蔡弘履) , 홍수보(洪秀輔) 강세륜(姜世綸) 등을 나쁜 무리라고 공격하였다. 이가환 은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을 보호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 려 노론 당국자를 공격했다가 죄인으로 죽은 이잠(李潛) 의 종손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노론 정파 인물 로부터 아예 출신에서부터 음흉하고 난폭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정조는 이가환을 탕평 정치가 키워 낼 수 있었던 인재 라고 지목하여 각별하게 보호하였다. 그를 "깊은 골짜기에서 자랐지만, 스스로 높이 솟구쳐 오른 큰 나무"에 비 유하였는데, 이는 영조가 채제공을 각별하게 보호한 뜻 과 같았다. 이 때문에 정조가 사망하자 이가환 역시 곧바로 죄인으로 몰려 죽을 수밖에 없었다. ※ 참고문헌  《朝鮮王朝實錄》/ 《錦帶集》/ 《與猶堂全書》/朴光 用,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1998. 〔朴光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