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경 李圭景(1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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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일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일부.


19세기 초 · 중반 박학풍(博學風)의 실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백규(伯揆). 호는 오주(五洲), 오주거 사(五洲居士) 또는 소운거사(嘯雲居士) 조부 덕무(德 懋, 1741~1793)와 부친 광규(光奎, 1795~1817)가 규장각 (奎章閣) 검서관(檢書官)을 지냄으로써 정조와 그의 가 문은 각별한 친분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찍 출세를 단념하고 평생을 포의(布衣)로 충청도 시골에 묻혀 살면서, 가끔 서울의 최한기(崔漢綺, 1803~1877), 최 성환(崔理喚, 1813~1879), 김정호(金正浩, 1800?~1864?) 등과 교유하며 제자백가(諸子百家)는 물론이고 명물도 수지학(名物度數之學)을 포함한 기문이서(奇文異書)에 이르는 온갖 종류의 학문에 열중한 결과, 1850년대를 전후하여 60권 60책에 이르는 방대한 백과 전서(百科全 書)인 《오주연문장전신고》(五洲衍大長箋教稿高)를 편찬하 였다. 이외에도 그는 서양의 화학 지식 등을 소개한 《오 주서종》(五洲書種)과 농정에 관한 《백운필》(白雲筆) 등 의 저서를 남겼다.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조선, 청, 일본 의 고전은 물론 서양인 선교사들이 지은 20여 종의 한역 서학서(漢譯西學書)를 포함하여 수백 종에 이르는 서적 을 고증학적 방법으로 분석하고, 역사 · 경학(經學) · 천 문 · 역법(曆法) · 지리 · 종교 · 서화(書畵) · 풍속 · 언 어 · 동식물 · 광물 · 군사 · 의학 · 농업 · 화폐 등 거의 모 든 분야의 학문을 망라하여 1,400여 항목의 변증설(辨 證說)로 완성한 책이다. 이 책은 17세기 초반 이수광(李 睟光)의 <지봉유설》(芝峰說)을 확대 · 종합한 것으로 조선 후기 백과 전서류의 박학적 전통을 집대성한 것으 로 평가된다. 특히 이 책에는 그의 개방적인 대외관과 진 취적인 서양 인식을 보여 주는 수많은 변증설이 실려 있 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만국경위지구도변증설>(萬國 經緯地球圖辨證說) · <남돈백기근여외인물변증설>(南敦 伯紀坤與外人物辨證說) · 〈호경오문변증설>(濠鏡澳門辨 證說) · <매곡제국품도변증설>(味谷諸國風土辨證說) · <백인변증설>(白人辨證說) · <용기변증설>(用氣辨證 說) · <서양통구역증설>(西洋洋通中國諜諜影片) · <여번박 교역변증설>(典舶交易辨證說) · <척사교변증설>(斥邪 敎辨證說) 등을 들 수 있다. 이규경은 이러한 변증설을 통하여 17세기 《지봉유설》의 탈중화주의적(脫中華主義 的) 세계 지리 인식을 계승하면서도 구라파 제국주의 열 강의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현실 인식을 토대로 하 여 조선 왕조의 문호 개방 시기에 대비하는 새로운 서양 인식을 정립하였다. 즉 전통적으로 중국에서 유럽에 이 르는 해로(海路)의 방향에서 유래된 명칭인 서양을 중국 과의 원근(遠近)에 따라 대서양(大西洋, 유럽)과 소서양 (小西洋, 인도양 · 동남아 일대)으로 분리 인식하는 마테오 리치(M. Ricci, 利瑪竇, 1552~1610)의 <곤여만국전도>(坤 輿萬國全圖)의 인식을 계승하면서도, 1840년대 중영 전 쟁(中英戰爭, 아편 전쟁) 이후 정치 · 군사적으로 동아시 아를 압박하여 들어오는 영국, 프랑스 등 대서양 연안국 들 즉 유럽 열강을 곧바로 '서양' 으로 통칭함으로써, 이 후 조선 지식인의 인식에서 점차 소서양을 서양의 범주 에서 제외시켜 가는 새로운 서양 인식을 정립하였다. 또 한 이규경은 천주교 박해의 여파로 고립적인 대외 관계 를 고수하던 19세기 전반의 세도 정권(勢道政權) 아래 에서도, 기원 전후부터 한 · 당 · 명 · 청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제국이 서역(西域)의 한 범주로 존재하면서 중국과 육로를 통해 꾸준히 교류해 오던 사적(史跡)을 일일이 입증하고 이를 근거로 하여 동-서양 간의 각종 문화 교 류와 통상 교류를 적극적으로 주창하는 거의 독보적인 문호 개방론을 주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천주교에 대해 서만은 도교나 불교와 마찬가지로 정학(正學)인 유학에 배치되는 사학(邪學)으로 파악하면서 이를 배척하는 입 장을 견지하였다. 이러한 천주교관은 <척사교 변증설>의 천주교 조선 전래사(朝鮮傳來史) 인식에서 구체화되었 다. 그는 이 변증설에서 경교(景敎)의 중국 전래와 대진 사(大秦寺) 등의 사적을 포함하여, 천주교가 중국과 조 선에 전래된 내력 및 18~19세기 조선에서의 천주교 박 해를 중국 · 일본의 그것과 비교 설명한 다음, 1846년(헌 종 12)과 이듬해에 연거푸 프랑스 함대가 조선 서해안에 출현하여 통상 교역을 강요한 사실까지 자세히 기술하였 다. 그리하여 이러한 서양 함대의 해상 시위(海上示威) 는 국내 · 외의 천주교 신자가 간여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했다고 생각하여 천주교 신자에 대한 척사론적(斥邪 論的) 경계심을 강하게 표출하였다. 그의 천주교관은 기 본적으로 정조(正祖)의 교화주의 원칙을 계승하는 온건 한 척사론에서 출발하여, 1801년 · 1839년 · 1846년의 전국적인 대규모 박해를 정당화하는 궁치멸절식(窮治滅 絶式)의 강경한 척사론으로 변화되어 가는데, 이러한 경 향은 1840년대 들어와서 중국과 조선에 밀어닥친 서양 세력의 군사적 침략을 목도하면서 이상주의적인 그의 대 외 개방론이 다소간 위축되면서, 어양론적(禦洋論的) 개방론으로 전환되는 것과 일정한 상관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참고문헌  《五洲行文長笈散稿》/ 《五洲書種》 《白雲筆》/ 李元 淳, 《朝鮮西學史研究》, 일지사, 1986/ 조광,<서양과의 관계>, 《한국 사》 32, 국사편찬위원회, 1997/ 신병주, <19세기 중엽 李圭景의 學風 과 思想>, 《韓國學報》 75, 1994/ 원재연, <조선 후기 西洋認識의 변천 과 對外開放論〉,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 학위 논문, 2000.〔元載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