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양 李基讓(1744~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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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조선 후기 성호학파(星湖學派)의 학자. 본관은 광주 (廣州). 자는 사흥(士興). 호는 복암(茯庵). 양명학(陽明 學)을 정면으로 수용하여 성호학파 내에 널리 전파시킴 으로써 소장학자들의 주도적인 학문이 되게 하였다. 그의 영향으로 양명학을 수용한 소장학자들이 뒤에 대거 천주교를 신봉하였다. 따라서 천주교 수용과 발전에 미친 그의 영향은 적지가 않다. 〔가문과 학문 배경〕 선조 대에 영의정을 지낸 한음(漢 陰) 이덕형(李德馨)의 후손인 그의 집안은 본래 기호 남 인(畿湖南人)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그의 6대조인 이여 규(李如圭)로부터 부(父)인 이종한(李宗漢)에 이르기까 지 문과에 급제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관계 진출도 6 대조인 이여규와 증조인 이복인(李復仁)이 음서(蔭敍) 로 출사(出仕)하였을 뿐이고 조(祖) · 부(父) 대에 이르 러서는 그것마저도 여의치 못했다. 그리하여 그의 대에 이르게 되면 끼니도 제대로 잇기 어려운 비참한 생활을 할 정도로 그의 가문은 경제적으로 매우 열악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가문은 성호학파의 중요한 여러 가문들과 두루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다. 즉 그는 허경(許檠)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그의 사촌 처남이 성 호 이익(李潔)의 제자이자 조카인 이용휴(李用休)의 딸 과 결혼하였다. 또한 그의 동생 이기성(李基誠)은 안정 복(安鼎福)의 손녀와, 그의 장남 이총억(李寵億)은 권철 신(權哲身)의 딸과, 그의 차남 이방억(李龐億)은 이가환 (李家煥)의 딸과, 그의 딸은 홍낙민(洪樂敏)의 아들 홍 백영(洪柏榮)과 각각 혼인하였다. 이기양은 1764년경부터 이익의 조카이자 제자인 정 산(貞山) 이병휴(李秉休) 밑에서 학문을 닦았다. 당시 이병휴는 예산(禮山)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수학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1766년경에 아산(牙山)으로 이사 하였다. 이 밖에도 그는 이철환 · 안정복 · 윤동규(尹東 奎) 등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았으며, 권철신 · 한정운(韓 鼎運) 등과도 학문적 교류를 깊게 나누었다. 그의 주된 스승으로서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이병휴는 성호 이 익의 실학(實學) 가운데서도 진보적인 면을 가장 적극적 으로 계승 · 발전시킨 인물이었다. 이병휴는 윤동규 · 안 정복 등의 만류와 비판에도 불구하고 경전(經傳)에 대한 자주적인 해석을 적극 추구하였고, 후배나 제자들에게도 그러한 자주적인 경전 해석을 적극 장려하였다. 이와 같 이 자주적인 경전 해석을 적극 추구한 이병휴는 이기양 을 장차 성호학파를 이끌어 갈 주된 인물로 높이 평가하 였다. 그러나 자주적인 경전 해석을 경계한 안정복은 그 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의 학문을 독실하지 못 하다고 심하게 비판하였다. 〔양명학의 수용과 전파〕 이익의 제자 대에 이르러 성 호학파 내에 양명학이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우선 이용 휴가 문학적인 면에서 양명학을 수용하였고, 또한 이병 휴가 경학적인 면에서 양명학을 '외주내왕' (外朱內王) 의 형태로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양명학을 정면으로 수 용하여 성호학파 내에 널리 전파시킨 인물은 이기양이었 다. 일찍부터 이병휴 밑에서 학문을 닦은 그는 양명학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이병휴의 여러 학설을 계승하는 한 편 왕양명(王陽明)의 '주자만년정론' (朱子晚年定論)의 설에 따라 주자학(朱子學)을 전면적으로 배척하였다. 아 울러 왕양명의 설에 따라 주자학의 두 공부 방법인 경 (敬)과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배격하였으며, 또한 미발 (未發)의 중(中)과 그에 관한 공부인 계구(戒懼)에 대한 해석도 양명학의 입장을 따랐다. 이와 같이 그가 양명학 을 정면으로 수용한 시기는 1768년 12월(음) 이전이었 다. 이기양이 양명학을 정면으로 수용한 뒤 그의 영향으로 양명학은 성호학파 내에 널리 전파되어 나갔다. 우선 1766년부터 양명학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권철신이 1769년에 양명학에 입각한 중화(中和) · 경 · 격물치지 등에 관한 이기양의 학설을 받아들임으로써 마침내 양명 학을 수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기양과 권철신의 영향 으로 그들의 동료인 이가환 · 한정운 · 권일신(權日身) 등이 양명학을 수용하였으며, 이어서 그들의 문도인 정 약전(丁若銓) · 이벽(李檗) · 이승훈(李承薰) · 이존창(李 存昌) · 홍낙민(洪樂敏) · 이총억(李寵億) · 이방억(李龐 億) · 권상문(權相門) · 권상학(權相學) · 이윤하(李潤 夏) · 윤유일(尹有一) · 김원성(金源星) 등이 양명학을 계승하였다. 양명학의 확산을 막으려는 안정복의 노력에 도 불구하고 양명학은 마침내 성호학파 소장학자들의 지 배적인 학문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양명학이 성호학파의 소장학자들 사이에 널 리 전파된 데에는 1768년부터 1783년까지 거의 매년 주로 겨울에 천진암(天真菴) · 주어사(走魚寺) 등의 산 사(山寺)에서 개최된 일련의 강학(講學)이 큰 기능을 하 였다. 강학 참여자는 처음에는 이기양과 그의 동료들인 권철신 · 한정운 등이 중심을 이루었고, 뒤에는 권철신과 그의 문도들인 정약전 · 김원성 · 이총억 · 이벽 · 권상학 등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기양과 그의 동료들이 주축을 이룬 일련의 강학은 이기양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그 내 용은 양명학이 중심을 이루었다. 권철신 · 한정운 등은 바로 이 강학을 통하여 양명학을 수용하였다. 그리고 권 철신에 의해 주도된 일련의 강학도 양명학이 그 중심 내 용을 이루었으며, 그의 문도들은 바로 이 강학을 통해 양 명학을 계승하였다. 이처럼 이기양이 수용하여 널리 전파시킨 성호학파의 양명학은 사회의 통념이나 주위의 비난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양지에 비추어 옳은 바를 그대로 실천하는 과격 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좌파 계통이었다. 또한 그들은 이 기(理氣)의 개념을 가치 세계에 속하는 것과 사실 세계 에 속하는 것으로 구분하고, 인식 방법도 선험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으로 구분하여 덕(德)을 이루는 학문과 더불 어 사공(事功)에 관한 학문도 적극 탐구해야 한다고 주 장한 성호 이익의 실학을 이론적으로 더욱 체계화하였 다. 이와 같이 실학의 철학적 기반을 확립한 결과 성호학 파의 양명학자들은 서양 과학 기술을 천주교와 구분하여 적극적으로 탐구하는 등 사공에 관한 학문을 널리 추구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성호학파의 양명학은 좌파적 성 격을 지닌 실학적 양명학이라고 할 수 있다. 〔정계 진출과 그 좌절〕 이기양은 1765년 무렵만 해도 관계 진출에 별로 뜻이 없었으나 양명학을 정면으로 수 용한 뒤인 1769년 무렵부터 서울의 명사(名士)들이 모 이는 곳에 나아가 사람들과 교류하는 등 관계 진출에 적 극성을 띠기 시작하였다. 그는 1774년에 진사(進士) 시 험에 장원한 후 1778년에 음서로 영릉참봉(寧陵參奉)이 되었다가 1784년에는 문의현령(文義縣令)으로 승진하 였으나 1785년 이후 머지않은 시기에 파면되어 경기도 이천에 있는 초가집에서 살았다. 그로부터 몇 년 후에 그 는 다시 진산현감(珍山縣監)이 되었으며, 1795년 3월에 는 남인의 영수(領袖)인 채제공(蔡濟恭)의 천거로 문과 를 치르고 급제하였다. 그런 다음 정조(正祖)의 배려로 그는 곧바로 홍문관(弘文館)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 었으며, 1796년 봄에는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에, 이듬해 봄에는 의정부(議政府) 검상(檢詳)에, 같은 해 8 월에는 승정원(承政院) 승지(承旨)에, 10월에는 의주부 윤(義州府尹)에, 1799년에는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임 명되는등 매우 빠른 속도로 승진하였다. 이러한 그의 고 속 승진은 정조가 그를 체제공의 후계자로 삼고자 하였 기 때문이다. 그는 채제공 · 이가환 · 정약용 등과 더불어 정조의 개혁 정치를 뒷받침해 주는 중심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당시 정조가 추구한 일련의 개혁 정치는 노론(老 論) 벌열(閥閱)을 개혁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었기 때문 에 정조의 사망과 더불어 정권을 장악하게 된 노론 벌열 들은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일으켜 그를 천주교 신자로 몰아 함경도 단천(端川)으로 귀양보냈다. 그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1802년 2월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천주교 수용에 끼친 영향〕 1784년 봄에 이승훈이 북 경에서 영세하고 돌아와 이벽과 함께 전도하자 이기양도 천주교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 때문에 안정복은 성 호학파 소장학자들의 천주교 수용을 배후에서 조정하는 인물의 한 사람으로 그를 지목하였다. 그러나 그가 천주 교의 전파를 막기 위하여 이벽과 논쟁을 벌였다는 달레 의 언급이나 그가 안정복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에는 천주교 서적을 공부하였다가 뒤에 입장을 바꾸어 이단을 막는 글 두 편을 저술하여 서울의 소장학자들에게 보냈 다고 주장한 내용, 그리고 신유박해 때 연루되어 국문을 받았으나 그가 천주교를 믿었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증 거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던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천주교를 믿지 않았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 다. 또한 그의 두 아들 이총억과 이방억도 그와 마찬가지 로 처음에는 천주교 서적을 깊이 공부하였으나 뒤에 입 장을 바꾸어 천주교를 믿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의 손자인 이의창(李宜昌)과 손부인 정희순(丁喜順, 가타리나)은 천주교를 믿고 따랐다. 1839년 기해박해 (己亥迫害) 때 이의창은 연루되었으나 도피하여 체포를 모면하였고, 정희순은 체포되어 3년 간 옥에 갇혔다가 1841년 가을에 형조로 옮겨 신문을 받는 중에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기양이 널리 전파한 양명학을 수용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천주교의 수용과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즉, 천주교 수용에 앞장선 이벽 · 이승 훈 · 권일신 · 홍낙민 · 윤유일 등은 모두 양명학을 받아 들인 사람들이었다. 정약종도 정약전을 통해 양명학을 수용하였다고 믿어진다. 그리고 이벽을 통해 천주교를 받아들인 김범우 · 최창현 등의 중인들도 그 이전부터 이 벽과 사귀고 있었던 점으로 보아 양명학과 무관하지 않 았을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경기도의 양근 · 광주 · 여 주 · 포천 등의 신앙 공동체와 충청도의 내포 · 충주 등의 신앙 공동체, 그리고 전라도의 전주 · 진산 등의 신앙 공 동체의 설립과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도 대 부분 양명학을 수용하거나 양명학과 무관하지 않은 사람 들이었다. 특히 내포의 사도라고 불리는 이존창은 이기 양이 아산에 살 때부터 그의 집을 드나들며 양명학을 공 부한 사람이었다. 이와 같이 성호학파의 양명학자들이 천주교에 대해 남다른 반응을 보인 것은 그들의 주된 학 문인 양명학에 천주교를 수용하는 데 유리한 이론적 특 성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이기 양이 천주교의 수용과 발전에 끼친 영향은 크다고 할 수가 있다. 이기양의 저술로는 정약용이 그의 묘지명(墓誌銘)을 저술할 때만 해도 《복암유고》(花庵遺槁) 4책이 있었으나 오늘날은 아무것도 전하지 않고 있다. 단지 그와 학문적 교류가 있었던 이병휴 · 안정복 · 정약용 등의 문집 속에 서 그의 학문과 사상을 엿볼 수 있는 편린들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 권철신 ; 안정복 ; 양명학) ※ 참고문헌 徐鍾泰 <星湖學派의 陽明學 受容 一茯庵 李基讓을 中心으로>, 《韓國史研究》 66, 1989/ 一, <鹿庵 權哲身의 陽明學 受 容과 그 影響), 《國史館論叢》 34, 1992/ 一, <李秉休의 '外朱內王'의 儒敎思想〉, 《歷史와 社會》, 현암사, 1997/ 一, 〈天真菴 走魚寺 講 學과 陽明學〉, 《李基白先生古稀紀念韓國史學論叢》, 一潮閣, 1994/ 一, <星湖學派의 陽明學과 實學〉, 《朝鮮時代史學報》 7, 1998/ 一, 〈星湖學派의 陽明學과 天主敎〉, 《東洋哲學研究會》, 2001. 〔徐鍾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