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준 李起俊(1884~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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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토마스. 본 관은 전주. 1884년 8 월 5일 충북 진천의 배티에서 효령대군(孝 寧大君)의 후손인 이 병의(李秉義)와 김석 현(金錫賢)의 6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출생 직후 경기도 안 성군 양성면 미산리 (美山里, 미리내)로 이 주하여 성장하였다. 동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미 리내 본당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신부의 추천으로 1899년 8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하여 1913년 5월 17일 명동 성당에서 뮈텔(G.-C.-M. Mutel, 閔德孝) 주교의 주례로 사제 서품을 받고, 6월에 평북 용천군 산태 (山台) 본당 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교세가 약한 산 태 본당에서는 행인에게 노변 담화(路邊談話)로 전교하 였다고 한다. 이 해 11월 황해도 봉산군 용현리의 검수 (劍水) 본당으로 전임되어, 30여 개의 공소를 3개월에 걸쳐 순방하는 등 전교에 진력하다가 풍토병인 디스토마 에 걸려 고통을 받았다. 이기준 신부는 본당의 이전을 뮈 텔 주교에게 건의하여 1915년 9월 서흥(瑞興)에 본당을 설립하였으나, 신자들이 약속과 달리 성당과 사제관을 마련하지 않자 서흥 본당을 폐쇄하고, 1916년 6월 사리 원(沙里院) 본당을 창설하였다. 그리고 1923년 7월 예 수성심신학교 라틴어 교수로 전임될 때까지 사리원 본당 에서 열성적으로 사목하여 교세를 크게 신장시켰다. 1930년 6월 춘천 약사리(현 죽림동 주교좌) 본당으로 전 임되어 소화유치원을 설립하였으며, 이어 1931년 5월 황해도 신천 본당의 2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사제관과 종탑, 수녀원을 세우고 이듬해 11월 샬트르 성 바오로 수 녀회의 수녀들을 맞아들였다. 1935년 1월 장연 본당 6 대 주임을 거쳐 1937년 5월 서울 명동 성가숙(聖家宿) 사감으로 부임하였다가, 1942년 1월 노기남(盧基南, 바 오로) 신부가 서울 대목구장에 취임한 뒤 서울 대목구 부주교에 임명되었으며, 5월에는 명동 본당 5대 주임을 겸하였다. 일제 말기와 해방 정국에서 이기준 신부는 명 동 본당에서 사목하며 신자들을 꼼꼼하게 돌보았고, 1947년에는 가톨릭출판사를 설립하여 각종 교리서를 출 판하였으며, 지성인 교리 강좌를 시작하였다. 또 성당을 보수하였으며 성당에 신자용 장궤(長跪) 틀을 설치하였 고, 1947년에 세종로 본당을, 1949년에는 신당동 본당 과 가회동 본당을 분할하였다. 1950년 1월 명동 본당 주임을 수석 보좌인 장금구(莊金龜, 요한 그리소스토모) 신부에게 인계하고 부주교로만 1958년 4월까지 봉직하 다가 은퇴하였다. 은퇴 후 명동 본당 사제관에 거주하면 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지도 신부와 성직자 · 수도 자 · 평신도들의 고해 신부로 활동하며, 항시 방문을 열어 놓아 '죄인들의 피난처' 로 불렸다. 1963년 5월 17일 명동 주교관에서 한국인으로 김명제(金命濟, 베드로) 신 부에 이어 두 번째 맞는 사제 수품 50주년 기념식이 베풀 어졌다. 이기준 신부는 노환에 대퇴부 골절상으로 장기 간 성모병원에 입원하였다가 1977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오후 7시 30분 명동 본당 사제관에서 93세를 일기로 선종하였으며 용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 참고문헌  李起俊, <내가 걸어온 길>, 《가톨릭 청년》 1960년 5 월회 <李도마 神父님의 病席을 찾아서>, 《가톨릭 청년》 1963년 5월 회 金바오로(正鎮), (李도마(起俊) 신부 금경축을 맞이하여>, 《가톨 릭 청년》 1963년 5월호/ <가톨릭시보> 1977. 8. 21 ; 8. 28/ 徐相堯, 〈李 起俊 신부>, 《교회와 역사》 65호(1981. 1)/ 李泰浩, '李起俊 신부', <평화신문> 1994. 4. 24. 〔崔起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