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내수 李迺秀(1862~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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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교구 신부.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 1862년 8월 10일 전북 완주군 동상면 수만리(水滿里) 성불(成佛)에 서 본관이 성주(星州)인 이수현(李秀賢, 야고보)과 서 아가타의 장남으로 출 생하여 병인박해를 겪으면서 성장했다. 1879 년 5월 블랑(G. Blanc, 白圭三) 신부가 전북 장수 큰골에서 신학생 양성을 준비하자 이내 수도 이곳에서 예비 신 학생 교육을 받았고 1880년 신학생으로 선 발되어 서울로 올라가 한문 등을 배우다가, 1881년 비밀리에 부산 을 출발하여 나가사키 (長崎)에 도착하여 1년 동안 신학을 공부하였다. 1882 년 12월 말레이 반도 페낭에 도착하여 파리 외방전교회 가 운영하는 국제 공동신학교에서 수학하다가 조선에 소 신학교 개설을 준비하던 블랑 주교의 명으로 1884년 11 월 귀국하여, 1885년 10월 경기도 여주 부엉골(현 경기 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에 신학당이 설치되자 그곳에서 수학하였다. 이어 한불조약의 체결로 어느 정도 전교의 자유가 허용되자 부엉골의 신학당은 용산으로 옮기게 되 었고, 이내수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 였다. 그러나 이내수는 1888년 소풍을 나갔다가 무너진 담장으로 대궐 마당에 진입하게 되어 한기근(韓基根, 바 오로), 김토마스 신학생과 함께 3개월 동안 옥고를 치 르다가 프랑스 공사의 부임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 1897년 12월 18일 약현(藥峴) 성당에서 뮈텔(G. Mutel, 閔德孝) 주교의 주례로 여섯 번째 한국인 사제로 서품되 었다. 이내수 신부의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양로원에 반년 간 머물다가 1898년 6월 목포(현 산정동) 본당 보좌로 임명되었으나, 주임 드 예(A. Deshayes) 신부는 병약한 그의 건강을 고려하지 않 고 사목 활동을 맡겼다. 1899년 5월 22일 무안의 우적 동(牛跡洞)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지만, 주민들의 냉대와 무리한 활동으로 병세가 악화하여 1900년 12 월 20일 선종하고 말았다. 유해는 성당 앞의 산을 매입 하여 매장하였다. 우적동 본당은 1908년 투르뇌(V. Tourmeux) 신부가 노안 본당 초대 주임으로 전임되면서 목포 본당의 관할이 되었다가, 1958년 일로 본당이 설립되면서 그 관할 몽탄(夢灘) 공소로 유지되고 있다. 이내수 신부가 사망한 후 동생 이성수(李聖秀, 프란치스코)가 형이 갖은 고난을 겪으면서 사제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병상의 시련을 담은 <리별가>가 전하고 있다. ※ 참고문헌  車基眞, <天主歌辭 리별가의 性格〉, 《교회와 역사》 122호(1985. 8)/ 尹善子, <이내수 신부>, 《교회와 역사》 197호(1991. 10)/《우적동의 사제》, 1998.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