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 심문 異端審問 〔라〕Inquisitio 〔영〕Inquis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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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심문을 하는 성 도미니코.
이단자 색출과 심문을 위해 그레고리오 9세 교황(1227~ 1241)이 설립한 법정. 이를 "마녀 재판"이나 "종교 재판" 이라 번역하는 것은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오역 (誤譯)이다. 이단 심문을 단순히 제도로 설명할 수는 없다. 역사적 상황에 따라서 여러 형태의 이단에 대응하는 법정이 있 었기 때문에 그 법정들을 구분하지 않고 말하는 것은 본 질을 이해하기 어렵게 한다. 먼저 이단 근절을 위한 주교 법정이 있었고, 그 이후에 교황 사절 법정이 존재했고, 그리고 교황에 의해 설립된 독립된 법정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교리적인 이단을 배척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정치적인 목적이 더 컸던 스페인의 이단 법정은 그 성격을 달 리한다. 국가 질서의 유지와 신앙의 통일을 위해 이루어 졌던 많은 제후국이나 프로테스탄트 국가의 법정도 같은 종류의 법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역사적인 배경〕 중세를 유럽의 형성기라고 말할 때, 중세 초기는 민족 이동과 국가 형성으로 많은 혼란을 겪 었다. 동시에 문화적 요소와 윤리적인 문제가 정착되지 않아서 사회적인 혼란을 국가와 교회가 동시에 겪게 되 었다. 12세기 들어서면서 국가 권력이 안정되고 국가 형 태를 갖추기 시작했고 교회도 그레고리오 개혁을 통해서 권위를 회복하였다. 서유럽의 국가와 교회의 권위 회복 의 증거는 성지 회복을 위해 일으킨 1095년의 십자군이 었다. 성지 회복을 위해서 군사적 행동을 일으킨 십자군 운동은 영적인 목적과 정치적 목적이 동반된 서유럽 전 체의 힘의 표현이었다. 교회의 공동의 적인 이슬람을 성 지에서 몰아내는 일에 교회와 국가가 힘을 합친 것이다. 성지에서 십자군이 전쟁을 하는 동안 유럽 안에서 교회 와 국가의 공동의 적으로 나타난 현상이 있었다.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고 교리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여러 가지 이단이 나타난 것이다. 교회는 여러 차례 공의회를 소집 하고 교회를 개혁하는 동시에 제2차 라테란 공의회(1139) 를 통해 이단자들을 단죄하고 세속 군주들이 협조할 것을 요구하였다. 알렉산데르 3세 교황(1159~1181)은 이단에 빠진 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그 재산을 몰수하도록 요구 하였고, 제3차 라테란 공의회(1179)에서는 법령을 공포 하였다. 1215년에 개최된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는 인노첸시오 3세 교황(1198~1216)이 이전의 법령을 새롭 게 반포하고, 세속 군주들에게 교회가 이단을 척결하는 데 지원해야 하는 의무를 부여하였다. 공의회에서 교황들이 세속 군주에게 지원을 요청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프랑스 남부 지방에 광범위하 게 퍼져 있었던 가타리파(Cathari)는 교회를 부정하고 마 니교에서는 주장하는 이원론을 믿으며 교계 제도가 불필 요하다고 말하면서 순회 설교를 하여 추종자들을 모았 다. 이 설교자들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고 윤리적인 제약도 말하지 않았다. 따라서 쉽게 추종자들이 생겼고 그중에서 기사들, 귀족들, 영주들, 심지어 주교까지 추종 자가 생기는 현상이 일어났다. 프랑스로서는 국가 안에 새로운 국가가 생성되는 것이고 교회로서는 비윤리적인 이단을 척결할 필요성이 생겨난 와중에 1207년 이단 조 사를 위해 파견된 교황 사절 카스델로(P. Casdello)가 암 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를 계기로 1209년에 알비 (Albi) 지방의 가타리파를 근절할 목적의 십자군이 일어 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1255년까지의 전쟁을 통해서 살 아남은 이단자들은 이탈리아나 스페인으로 도망을 가서 새로운 단체를 이루거나 그 지역에 남은 사람들은 숨어 서 자신들의 전례를 계속하고 비밀스럽게 지속하였다. 숨어 버린 이단자 색출을 위해서 만들어진 법정이 바로 이단 심문 법정이다. 〔이단 심문의 시작〕 이단 심문이 교회와 국가의 법으 로 만든 교황은 그레고리오 9세이다. 이단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조직을 만들라는 칙서 〈엑스콤무니카무 스〉(Excommunicamus, 1231. 2)가 반포됨으로써 즉시 교황 의 영향하에 있는 지역에서 법령이 시행되었다. 교황은 이전에 있었던 여러 공의회에서의 이단에 대한 결정을 재천명하고, 교회로부터 단죄된 이단자는 세속 권력이 벌을 주도록 하였다. 이탈리아 밖의 이단 법정 설립은 독일에서 먼저 있었 다. 이단 법정을 열 수 있는 특별 권한을 마르부르크의 콘라트(Conrad von Marburg, 1180?~1233)에게 부여했고, 그는 자유롭게 사람을 선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도미 니코회에게 이 특별 임무를 맡겼다. 임무를 부여받은 이 단 심문관은 이전의 관습이나 그 지역 주교의 법정을 무 시하고, 특별 임무를 수행하면서 이단자들을 화형에 처 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모습으로 독일의 여러 지방으로 확산되었고, 특별 관할권으로 이단자들을 색출하였다. 새로운 제도가 일반화된 것은 1233년이었다. 프랑스 는 지역에 따라 또 그 지방 주교에 의해 이단 추방 노력 이 있었기에 특별 법정이 형성되지 않았다. 지방 주교가 이단 법정을 열 때 주교에 속한 사람들이 맡으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고, 이단 근절이 더욱 어려워지는 문제도 생겼다. 따라서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은 전 프랑 스 주교들에게 1233년 4월 13일에 쓴 편지를 보내 이단 근절을 요구하고, 이를 위해서 수도자를 이단 심문관으 로 임명하라고 요구하였다. 로베르(Robert Bougre)가 심 문 법정을 열게 되면서 프랑스에서는 교황이 직접 이단 심문관을 선택하여 이단 법정을 운영하도록 하였다. 이 렇게 된 이유는 당시 이단이 여러 지방에 흩어져서 겉모 습은 정통 교리를 따르는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 문이다. 또한, 지역 주교가 이단자 색출에 나서면 가까운 다른 지방으로 도망가는 방법을 사용하여 어느 쪽의 관 할권에도 저촉되지 않게 세력을 확산시키고 있었기 때문 에 관활권을 분산시켜서는 이단자 색출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었다. 숨거나 타지역으로 도망 다니는 이단자들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능률적인 제도가 필요하였고 로베르 에게 그 임무가 맡겨졌다. 교황은 프랑스 이단 심문관에 게는 세속 권력의 도움을 받으며 벌까지 줄 수 있는 권한 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초기에는 모든 지역에 혼란이 일 어나고 대립이 심각하였다. 따라서 모든 일상적인 주교 법정은 관할권을 포기하고 교황청의 통제를 받는 새로운 심문 법정에 협력하도록 하였다. 물론 이단 법정의 권위 를 확정 짓는 데는 프랑스 왕의 후원이 절대적이었다. 이 러한 모든 원인 이외에도 로마법의 부활이 이단 법정을 제도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단 심문관〕 당시 심문관들은 거의 모두 도미니코회 이거나 작은 형제회 수사들이었다. 이 두 수도회는 이단 들이 성행하던 시대에, 그 필요성에 의해 탄생된 수도회 들이었다. 이단을 선전하러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대중으 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그것은 이단 설교가들이 신학적 으로도 박식할 뿐만 아니라 성실하고 가난을 실천하여 자신에게는 엄격한 생활을 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고위 성직자는 너무 화려하게 살았고, 일반 사제들 은 가난하고 배운 것이 없던 사람들이었다. 또한 수도자 들은 봉쇄 수도원 안에서 자신들만의 일들을 하고 있었 기 때문에, 이단자들의 순회 설교는 대중의 환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일반 대중에게 가난과 예수 그리스 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대중에게 설교하는 도미니코 회나 작은 형제회는 큰 환영을 받았다. 따라서 이 두 수 도회는 수도 생활 외에 설교가 중요한 과제였다. 특히 도미니코회를 설립한 도미니코(Dominicus, 1170~ 1221)는 가타리파가 가장 성행하던 프랑스 남부에서 첫 공동체가 시작되었고, 성인 자신이 가타리파의 모든 사 정을 알았기 때문에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교회로 돌아 오게 하는 일이 큰 임무라고 생각하였다. 설교를 통해 이 단자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완덕의 삶을 살아야 하지만 동시에 가르치는 능력과 학식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수 도회는 가르칠 수 있는 지원자를 선호하였고 수도원 안 에서는 학문 연구가 의무가 되었다. 그래서 1221년 도 미니코 성인이 세상을 떠날 때 이미 20개의 수도원이 프 랑스, 스페인 등지에 설립되었고, 1224년에는 120명 이 상이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 로 1227년부터는 교황은 신앙 문제에 있어서 도미니코 회에 도움을 청하였다. 그렇기에 작은 형제회 수사들보 다 도미니코회 수사들이 이단 심문관으로 더 많이 활동 하게 된 것이다. 원칙적으로 심문관은 두 명이 같은 권한을 가지고 각 자의 법정을 열었다. 이들은 교황으로부터 직접 권한을 부여받고 법정을 열었기 때문에 지방의 권위로부터 도전 을 받는 등 어려움이 있었다. 심문관들은 대체로 같은 회 소속이었고 그들의 임무 때문에 수도원 생활은 하지 못 했다. 그러나 초기에는 마르부르크의 콘라트처럼 수도자 가 아닌 경우도 있었으며, 또 수도회가 재속 사제를 심문 관으로 기용해서 법정을 여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13 세기 말경부터 모든 심문관들은 수도회 소속이었다. 심문관들의 임무 부여 : 심문관이 한 나라나 또는 어떤 제후국에 임명되면 그 나라의 군주에게 교황청으로부터 받은 임명장을 제시했다. 이때 심문관은 군주에게 이단 근절을 위해 열심히 봉사할 테니 조언과 도움을 청했다. 임명장을 제시하고 난 뒤에 심문관은 자신과 자신의 일 을 도와주게 되는 조사관, 서기, 호위대의 안전 통행권을 요구했다. 안전 통행권의 내용 안에 군주의 모든 행정관 들은 심문관을 도와주라는 내용이 포함되길 요구했다. 즉 이단자들과 그 추종자들, 그리고 이단자들을 숨기거 나 보호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체포하는 일은 행정관 의 임무라고 하였다. 이런 모든 도움을 확실히 하기 위해 가능하다면 군주로부터 증명서를 요구했다. 이 증명서에 는 "심문관 아무개는 이 나라의 이단의 근절을 위해 교 황청으로부터 파견되어 왔으므로 교리를 바로 세우기 위 해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히 파견된 사람으로 존중하고 그 임무를 완전히 수행하도록 왕국의 모든 신하는 그를 도 와주어야 한다. 따라서 이단 심문관을 잘 대접하고 심문 관이 지시하는 데로 이단자들을 체포하고 결정된 벌을 실행하기를 명한다"는 것과 "심문관이 임무를 확실한 자 유와 안전 속에 수행하도록 모든 조치를 다 해줄 것을 명 한다" 는 내용의 문서를 만들고 군주가 문서에 서명을 하 였다. 군주의 증명서를 가지고 심문관은 자신이 담당한 지역 의 대주교좌를 방문하여 임명장을 제시하였고 또 방문하 게 되는 주교나 총대리에게도 자신의 임무 시작 전에 같 은 행동을 하였다. 그것은 임무 수행을 하는 데 지방 주 교나 지방 제후가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가 있 었다. 절차를 밟고 난 후에 심문관은 지방 제후에게 교회 를 방어하고 이단의 근절을 하겠다는 서약을 하고, 심문관을 성실히 도와주겠다는 서약을 하도록 했다. 즉 이단 심문관은 교황으로부터 또 군주에게서 이단 근절의 임무 를 부여받고 그 지역에 왔으므로 그 도시의 모든 행정관 은 최고의 열성을 가지고 이단 심문관에게 순종하겠다는 서약이었다. 이 서약은 성당이나 수도원에 모여서 성서 에 손을 얹고 서약서를 낭독하게 했다. 이러한 절차를 거쳐서 이단 심문관은 자신의 법정을 열고 이단이란 의심이 있는 자를 심문하는 일을 시작하 였다. 그러나 이단 심문관이 도시들과 교구를 말을 타고 순회하는 법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심문관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한 곳에서 모든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하였고, 그로 인해 한 지역에 정착을 하였 다. 지역 조직 : 초기의 경험을 하고 난 후 각 이단 심문 법정이 정확하게 지리적으로 조정되었다. 그리고 그 지 역 조정은 이단자들의 수에 따라 다양하였다. 프랑스를 예로 들면, 파리에 중앙 본부를 두고 왕국을 여러 지역으 로 나누었다. 교회적 조직과 정치적 구분도 고려되었다. 즉 나르본(Narbonne) 지방에 있는 아라곤 왕의 토지는 아 라곤 이단 심문관이 권한권을 가졌고, 툴루즈(Toulouse) 공작의 지역 내에 있는 프랑스 왕의 소유지는 툴루즈 이 단 심문관의 관할이 되었다. 도미니코회는 프랑스 왕국 전 지역과 그 주변 지역과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와 로 마냐와 토스카나 지역 관할권을 갖고 있었으며, 작은 형 제회는 사보이 지역과 이탈리아 동부와 남부 지역의 책 임을 맡았다. 〔심문 과정의 문제점〕 교황청 문서에도 지방의 제후와 주교들이 이단 심문관에게 협조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 다. 이것은 지방관들이 이단 심문에 마지못해서 협조하는 것이 어려움 중 하나였음을 의미한다. 특히 주교들은 한 동안 협조를 기피했다. 이에 교황 인노첸시오 4세(1243~ 1254)는 여러 기회를 통해서 주교들의 협조 의무를 상기 시키고, 열성적으로 도와주지 않는 것에 대해 엄중히 경 고했다. 1279년에 교황 니콜라오 3세(1277~1280)는 파 도바의 주교에게 주교직 직무 정지의 벌을 내리기도 했 다. 또 다른 문제로는 이단 심문의 중심인 두 수도회 간 의 대결 의식이 여러 문제를 야기시켰다. 1266년 마르 세유에서 도미니코회 수사들이 작은 형제회 소속의 이단 심문관을 위증자를 만들어 고발한 사건이 발생하였고 여 기에 교황이 개입하게 되었다. 어찌 되었든 가장 중요하 고 어려운 문제점은 대중들 자신이 이단 심문에 적대적 이었다는 것이다. 이단자들은 자신들을 이단이기보다는 정당하다고 주장하였고, 이단 심문은 자신들을 박해하는 행위로 여겼다. 그렇기에 적대적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 고 자신들의 고통을 순교의 행위로 여겼다. 이단을 강제 로 근절을 시키는 과정에서 반응이 폭력적으로도 나타났 다. 마르부르크의 콘라트는 1233년 7월에 이단자들에 의해 죽었고, 툴루즈의 이단 심문관들인 아르노와 스테 파노는 1242년 5월 협조자들과 함께 살해당했다. 또한, 1252년 4월 베로나의 베드로는 불과 몇 달 간의 심문관 활동을 끝으로 밀라노와 코모(Como) 사이의 길에서 살 해당했다. 조직적인 반항은 알비 지방의 십자군 운동 이 후에 사라졌지만, 개별적인 저항은 여러 곳에서 일어났 다. 법정의 진행 : 어느 지역에서 법정을 열 준비를 다 마 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대중 설교였다. 교회력으로 평 주일에 그 지역 중심 성당에 모든 사람들을 모아 달라는 편지를 쓰고, 설교는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그 지방 언어를 사용하였다. 설교의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 다. '이단에 물든 사람은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며, 이단 으로 의심이 가는 사람들과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 그 리고 이단에 관련된 물건들을 가진 사람들을 고발해야 한다. 그리고 심문관을 도와 주는 사람들은 전대사를 받 을 것이며, 이단자들에게는 회개의 시간을 알렸다. 즉 정 해진 시간 내에 이전까지 빠졌던 이단을 청산하고 심문 관에게 와서 자발적으로 회개하면 크게 용서한다' 는 것 이다. 그 기간은 대체로 15일에서 30일이었다. 명령서를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붙이고 나서 심문 관은 고발자들과 회개자들이 쉽게 찾아올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자수 기간이 끝나면 심문관은 고 발들을 검토한 후 신앙적으로 심각하게 다루어야 할 사 안을 골라내었다. 그 뒤 고발자를 소환해서 진실만을 말 할 것을 서약하게 하고 진술을 듣는데, 그 내용이 올바르 지 않으면 심문관은 미결로 처리하였다. 고발된 사람은 고발인을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고발자가 당할 수 있는 보복에 대한 보호 때문이었지만, 혐의자는 자신의 진실 을 밝힐 방법이 없었다. 익명의 고발자가 자신의 적들을 악의로 고발한 것이라고 한다면, 고발자의 진실을 밝혀 내기가 쉽지 않았다. 따라서 고발이 범죄자나 평판이 나 쁜 사람, 혹은 이단자들에게서 나온 것일 수도 있었다. 그것은 이단자들도 심문 과정에서 정보 제공자가 되도록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혈연 관계는 변호할 수가 없었고 법률가나 성직자 역시 고발된 자들에게 자신들의 할 수 있는 어떤 일도 하지 않은 것은 공범자가 되지 않기 위해 서였다. 교황에게 호소할 수 있는 권리는 그레고리오 9 세 교황의 칙서 〈엑스콤무니카무스〉로 거부되었다. 하지 만 교황에게 상소한 경우는 자주 있었다. 1245년의 이 단 심문관들은 이단자들이 교황에게 호소해서 받아야 할 벌들을 피해 갔다고 불평을 하였다. 특히 귀족들은 교황 청에 자신을 변호하여 이단 심문관들의 결정을 번복하도 록 한 경우가 있었다. 어쨌든 이단 심문 자체가 신앙이라 는 인간 내면과 생각에 의존하기 때문에 진실을 가려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이단자들은 심문 과정에서 심문을 벗어나는 방법을 사 용하였다. 그 첫째 방법이 애매모호한 대답이었다. 즉 "거룩한 가톨릭 교회를 믿느냐?"는 질문에 "예, 거룩한 교회를 믿습니다" 라고 대답할 때 그 교회는 자신들의 교 회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조건을 붙인 대답을 하였다. 즉 "혼인이 성사인가?"라고 물으면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믿습니다"라는 대답을 하였다. 이는 하느님 이 자신이 믿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 다. 질문을 다시 반복하는 방법과 질문에 놀라는 시능을 하면서 당연하지 않느냐는 식의 대답과 질문의 의미를 바꾸는 방법, 자신의 무지를 탓하기도 하고 또는 머리가 아파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겠다는 신체적 이유를 대 기도 하였다. 또는 자신에게 정신 이상이 생겼다는 등의 방법으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이단의 내용을 제대로 말하지 않음으로써 진실을 비껴갔기 때문에 심문은 상당 히 진척이 어려웠다. 질문서는 항상 라틴어로 쓰여졌고, 필요하다면 통역이 이루어졌다. 질문하는 자와 응답하는 자 간의 진실을 알 려는 투쟁이 벌어졌다. 심문자가 술책을 알아챘을 때 그 응답이 술책이라는 것을 밝히는 노력을 하게 된다. 첫 번 째 대답이 교회를 믿는다고 했을 때 그 질문자는 덧붙여 교황이 누구며 어디에 살고 있느냐고 계속 질문함으로써 애매한 단어를 밝히고 좋은 말로 달래기도 하고 잘못을 인식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술책이라는 것을 분석하기 도 하고 회개한 사람을 불러 대면시키기도 하는 등 심문자도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였다. 고문 : 이단 심문에서 고문을 많이 사용했다고 전한 다. 본래 교회법적 전통에서 이질적인 것이 로마법의 부 활로 나타난 현상인 고문이다. 이단 심문은 로마법의 국 가 반역자 색출법에서 발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단 심 문에 고문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는 알려 주는 사료가 없 기 때문에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단 근절을 위 한 고문과 스페인 이단 법정의 고문과는 그 성격이 다르 다. 이탈리아 심문관들은 인노첸시오 4세 교황의 칙서 〈앗 엑스티르펜드〉(Ad exstirpanda, 1252. 5. 15)의 발표 후 에 고문을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도시의 권력이 이단자들의 자백을 요구하도록 강요한 것이다. 고문은 심문 중에서 혐의는 있지만 자백을 하지 않을 때 고문의 벌을 내렸다. 고문에 대한 대체적인 규정은 다 음과 같다. 즉, 이단 심문관은 다른 방법이 없을 때까지 고문은 사용하지 말아야 하며, 가족이나 친구들 때문에 자백하지 않는 것 같은 경우에 하라고 하였다. 이단 심문 관과 그 지방 주교 등이 볼 때 혐의자가 확실히 숨긴다는 확신이 섰는데도 자백하지 않을 때 약하게 고문을 하라 고 하였다. 하지만 고문을 준비한 후 시작하기 전에 다시 한번 자백을 요구하고, 이때라도 자백하면 후히 판결을 내리도록 하였다. 고문을 시작하면서 질문을 가벼운 것 부터 시작해서 무거운 질문으로 옮겨 가며, 그 다음날 계 속해 할 수 있으며 고문 후에도 아무런 혐의를 찾을 수 없으면 무고한 것으로 판결을 내리라는 것이었다. 고문의 적용은 나라와 이단 심문관에 따라 다르게 적 용되었다. 프랑스 남부 카르카손(Carcassonne)의 이단 심 문관인 갈랑(J. Galland, 1278~1293)은 고문을 통해 많은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나타난다. 고문의 도구는 시간이 지나면서 스페인에서 가장 다양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판 결〕 대체적으로 이단 법정에서 신앙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에게는 영적인 이득을 위한 건설적인 벌을 내리는 경향이었고, 고통을 일부러 주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리 고 고집을 부리는 이단자들에게 내리는 벌도 이단 법정 이 아니라, 그 지역의 세속 권력자들에게 맡겨졌다. 심문이 끝난 후 이단 심문자는 판결을 내리기 전에 대 중을 한자리에 불러모으고, 이 자리에 고위 성직자, 고위 행정관과 법관들 및 귀족들도 초대되었다. 먼저 짧은 훈 시 후에 여러 종류의 벌을 판결했다. 그때 각 혐의자들을 여러 단위로 모아 놓고 해당되는 죄목을 열거했다. 그런 뒤 각 회개자들은 무릎을 끓고 복음에 손을 얹고 자기에 게 해당된 벌을 받았다. 이때 라틴어로 먼저 읽고 다음 지방 말로 말했다. 심문 후 그 구분은 다양하였다. 즉 전 적으로 모든 이단에서 의심이 가지 않는 사람, 일반적으 로 이단으로 중상모략된 사람, 고문을 가해 봐야 하는 사 람, 이단에 약한 혐의, 중간 정도의 혐의, 중한 혐의가 있는 사람, 모함받았거나 혐의가 있는 사람, 자백하고 회 개했으나 의심 가는 사람, 자백했으나 아직 정화되지 않 고 의심되는 사람, 자백하고 정화되지 않았으나 의심은 가지 않는 사람, 자백도 않고 여러 증거로 보아 이단이 확실한 사람, 이단이 확실하면서 도망을 가서 재판에 궐석한 사람 등이다. 일반적인 심문을 통해서 이단에 대한 아무런 혐의가 발견되지 않은 사람들은 혐의를 벗겨 주는 판결을 내렸 다. 즉 모든 노력을 다해서 조사를 하였지만 이단에 대한 혐의를 발견하지 못하였으므로 무고함을 선언한다는 증 명서를 발부했다. 그리고 혐의가 짙게 드러난 사람들과 자백하고 회개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단 심문관이 자의 적으로 무고로 처리하든지 또는 벌금으로 대처하든지, 아니면 작은 벌을 내렸다. 자수 기간 동안에 이단을 자백 한 자들에게는 매질이나 성당 방문, 순례나 십자가 표시 가 달린 옷을 입게 하는 등의 벌을 내리되 한 가지만 받 을 수 있었고 여러 벌을 동시에 받을 수도 있었다. 성지 순례는 주변 성지의 순례와 먼 거리의 순례 즉 예 루살렘까지의 순례 등으로 나뉘었다. 또는 특별한 성지 장소와 날짜를 명기하기도 하였다. 벌을 받는 사람들 중 에는 일정 기간 동안 주일 미사에 채찍을 들고 나타나서 독서와 복음 사이에 자신을 채찍질해야 하는 경우도 있 었으며, 어느 기간에는 어떤 벌의 사면을 위해서 벌금이 부과되기도 하였다. 벌금은 오용을 낳을 소지가 있어 금 해졌지만 완전히 근절되지 않았다. 십자가를 달고 다니 는 것은 심한 벌에 해당되었다. 노란 천으로 만든 십자가 를 상위 앞뒤에 달고 다니게 하였으며, 거짓 고발자들은 붉은 천으로 된 혀의 모양을 달고 다니게 했다. 감옥 생활 : 감옥 연금은 특별한 혜택이 요구되지 않 는 경우에 적용하는 이단자에게 내리는 정상적인 벌이었 다. 규정에 따르면 종신형이었지만 벌금으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이단 심문관은 307건의 감옥 연금 벌 중에서 139건을 벌금으로 대체했으며, 1246년의 어 떤 이단 심문관은 207건의 유죄 중에서 23건만 감옥 생 활을 명했다. 수감자들에게는 빵과 물만 음식으로 주어 졌으나, 어떤 수감자들은 밖에서 들어오는 음식이 허용 되었다. 간혹 독방 수감도 적용되었고, 감옥 감독이 허술 하여 간수들의 게으름과 죄수와의 공모로 탈출이 흔했 다. 감옥을 유지하고 구금자들을 돌봐야 하는 책임은 그 지방 주교에게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열성 없이 받아들였다. 예를 들면 나르본 지방 회의 (1244)에서 주교들은 감옥을 짓는 데 돌과 모르타르가 부족해서 감옥을 지을 수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실질적 으로 프랑스 왕이 감옥에 필요한 물자를 감당하는 경우 가 많았다. 사형 : 화형이 사형 제도였다. 이단을 끝까지 고집하 는 사람들에게 내린 최종 벌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 단 심문관은 순례나 회개 행위 등을 통한 회개를 원했고, 가톨릭 신앙으로 돌아오기를 원했다. 그리고 화형을 통 한 이단의 순교자가 생기기를 원하지 않았다. 어떤 역사 가는, 어떤 사람이든지 불탄 뼈보다는 회개하여 다른 이 단자 친구들을 고발해 주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겠 느냐고 역설적으로 말했다. 따라서 고집하는 이단자를 적어도 6개월, 보통은 1년 이상 독방에 가두고 아내나 자녀들이 방문해서 설득해 보도록 하였다. 때로는 신학 자들이 방문하여 교리적 토론과 논리적 설득을 하도록 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그때 이단 심문관이 공 식적으로 사형자를 세속 권력에 맡겼다. 그것은 교회 자 체가 사형시킬 수 있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단자 들을 화형시키는 벌은 이단 법정이 만들어지기 훨씬 전 에 있었다. 즉, 1209년 알비파와의 전쟁에서 몽포르(Simon de Montfort, 1165?~1218)의 군대가 이단자들을 화형시 켰다. 화형식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휴일에 광장에서 이루어졌으며, 나뭇단을 높은 곳에 쌓 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대체로 회개하였 다가 다시 이단에 빠진 자를 화형시켰다고 하지만, 적용은 잘되지 않았다. 하지만 화형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예를 들어 1256년 툴루즈의 이단 법정에서 12명의 종신형이 있었 고, 화형은 단 한 건이었다. 베르나르 기(Bernard Gui)는 17년 간(1307~1324)의 이단 심문관 활동 중에 40건만 세 속 권력자에게 사형수를 넘겼다. 그런데, 신앙에 관한 일 이었기 때문에 사후에도 사형수와 관련된 모든 사람을 계속 더 조사하고 이단을 근절하려고 하였다. 재산 몰수 : 재산 몰수는 종신형, 사형과 같은 가장 큰 형벌에 속한 것으로, 그 가족에게도 벌이 내려진 경우이 다. 큰 형벌의 판결을 받은 후에 그 재산들이 다시 이단 자들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재산 몰수를 하 였다. 재산 몰수권은 일반적으로 세속 권력자들에게 주 어졌다. 그러나 이단 법정의 경비는 엄청났지만, 현실적 으로 쓸 수 있는 재산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몰수 재산을 관리하는 특별 사무소를 개설하였고, 압류 재산 을 받아들이는 행정관은 이단 법정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급여를 주고 법정 유지비를 책임졌다. 이렇게 본래 책임 져야 할 권력자들이 의무를 하지 않았어도 압류 재산으 로 충당되었다. 법에 의하면 이단자들이 모여 집회를 했 던 집은 파괴하고 그 주변의 주거를 금지시켰다. 실제 있 어서 많은 이해 관계가 얽혀서 이 법은 아주 가끔 적용되었다. 〔이단 법정의 쇠퇴〕 이단 법정이 절정을 이루었던 시 기는 13세기 후반이었다. 이 시기의 법정은 어떤 권위로 부터도 자유로워서 교황청도 간섭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잘못하여도 고칠 방법이 없을 정도였다. 글레멘스 5세 교황(1305~1314) 때 특히 카르카손에 있 던 이단 심문관들의 부패가 많아 교황이 간섭하게 되었 다. 텔레페(Taillefer de la Chapelle) 추기경과 베렝거(Bérenger de Frédol) 추기경에게 조사 책임이 맡겨졌다. 1306년 3월에 이단 법정의 토굴 감옥을 조사하였고, 감옥에 갇 힌 사람들로부터 사실을 확인하였다. 큰 성과는 없었지 만 조사는 큰 의미가 있었다. 비엔(Vienne)의 공의회 (1311~1312) 동안 교황은 〈물토룸 궤렐라〉(Multorum querela)를 반포하였다. 이 문헌에서 교황은 모든 중요한 법 정 결정에서 이단 심문관과 주교들이 공동으로 논의하도록 하였고, 고문의 사용과 죄수의 감독에 대해서는 이단 심문관과 같은 권한을 주교에게도 주어서 독자적인 결정 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만일 한편이 다른 쪽의 동참에 응할 수 없는 경우에도 반드시 대리를 파견하거나 동의 서를 써 주도록 하였다. 이렇게 해서 이단 심문관의 권력 은 근본적으로 약화되었다. 물론 이단 심문관들은 새로 운 규정이 부적절한 것이라고 보고 여러 형태로 자신들 의 권력이 제한받는 것을 막아 보려고 했지만 실패하였 다. 교황 요한 22세(1316~1334)는 이 규정을 존중하고 최 대한 의무를 지키라고 명하는 동시에 이단 법정의 자료 들을 주교 법정에 넘기도록 하였다. 1321년에 발표한 〈쿰 마태우스〉(Cum Mathaeus)에는 이단 심문관들의 권한 을 교황청의 행정관들이 통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4 세기에 어떤 지역에서는 이단 법정이 중요한 역할을 계 속하였지만 점차적으로 이단 혐의자들이 줄어들어 쇠퇴 하기 시작했다. 카르카손 법정의 문서고에 보관된 문서 목차가 15세기에 12개밖에 없었고, 어떤 목록에는 딱 한 개의 문서만 있었다. 따라서 프랑스 남부의 이단 법정 은 역할은 없고 이론적으로만 남아 있는 상태에서 18세 기까지 존속했다. 쇠퇴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국왕의 개입이 이 단 법정의 존재를 없앤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예를 들면 프랑스의 왕인 필리프 4세(1285~1314)는 1302년과 1304년에 칙서를 통해 이단 법정과 프랑스 남부 사람들 과의 투쟁에 개입하였다. 1403년에는 파리 의회가 랭스 (Reims) 대주교와 캉브레(Cambrai) 이단 심문관의 논쟁 에서 대주교의 편을 든 결정을 하였으며, 1412년에는 툴루즈의 이단 심문관을 국왕의 군대가 체포하였다. 이 로 인해 이단 법정은 의회에 예속되기 시작하였고, 의회 가 통제하게 되었다. 그리고 종교 개혁 시기에도 프랑스 에서는 이단인 경우에는 의회가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 다. 이단 법정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도 14세기 에 그 역할이 현저하게 쇠퇴하였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는 15세기에 와서 프랑스와는 다른 이유로 아주 왕성한 활동을 하게 되었다. 〔스페인 이단 법정〕 스페인의 이단 법정은 상대적으로 아주 늦게 시작되었고, 체제 자체도 다른 나라와 매우 달 랐다. 법정 설립 이유도 다르게 시작이 되어 공포의 대상 이 되었다. 스페인은 중세 동안 이슬람 세력이 침입하여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고, 남아 있는 가톨릭 왕국들은 이베리아 반도의 통일과 이슬람의 정복을 원하였지만, 협력이 이 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프랑스 남부의 이단 근절을 위 한 이단 법정이 열렸을 때, 스페인은 뒤늦게 이단 법정을 만들었지만 그 활동은 미비하였고 조직적이지 못했다. 1474년에 카스티야 왕국의 여왕이 된 이사벨 1세(1474~ 1504)와 1479년에 아라곤의 왕이 된 페르난도 2세 (1479~1516)가 1469년 결혼함으로써 두 왕국이 합쳐지 고 난 뒤 의욕적으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시작하였 다. 1492년에 그라나다를 정복함으로써 통일되었으나, 두 군주는 영토의 통일을 추구하는 동시에 내부적인 문 제 해결로 진정한 통일을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슬 람 세력과 유대인 세력, 그리고 이단 문제 등을 해소하여 종교적인 일치가 이루어지기를 원했다. 이런 이유로 군 주들은 식스토 4세 교황(1471~1484)에게 요청하여 1478 년 새로운 이단 법정을 설립하였다. 따라서 스페인 이단 법정은 교황청 소속이 아니라 스페인 왕정에 예속된 기 구였다. 하지만, 당시의 스페인 왕정은 국가와 교회의 분 리 정책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의 일과 교회의 일이 분리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교황은 1478년 11월 1 일의 칙서로 신학에 정통한 40세 이상인 2~3명의 이단 심문관을 허락했다. 1481년에 세비야(Sevilla)에 첫 이단 법정이 세워졌고, 1482년에는 전 왕국에 확산시키면서 지역 주교와의 협 력하에 활동을 하도록 하고 사면 범위도 정해 주었다. 그 러나 군주들의 끈질긴 독립 요구로 스페인의 이단 법정 은 독립이 되었다. 그 후 이단 법정의 효율적인 관리와 일관된 지휘 체제를 위해서 중앙 법정을 세우고, 그 산하 에 지방 법정을 두는 체제를 만들었다. 중앙 법정의 최고 심문관으로 토르케마다(Tomás de Torquemada, 1420~1498) 가 임명되었다. 그는 의욕적인 활동가였으며 종교적으로 메마른 사람이었고 야심가였다. 그가 죽을 때까지의 15년 동안은 공포 시기였다. 이슬람에서 개종한 사람들과 유대교에서 개종한 사람 들도 그 개종이 진정한 것이었는지를 심문받았고, 그리 스도교적 이단에 대해서도 심문하였기 때문에 국민들에 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로 인해 일부 주교들은 이단 법 정에서 경쟁자들이나 부하들의 증언을 토대로 정당한 재 판 없이 감옥에 가두고 고문하고 재산을 몰수하고 처형 하였기에 신자들이 고통받고 있다고 교황청에 개입을 요구하였다. 중앙 법정은 스페인 점령지였던 멕시코, 리마 등지에 도 영향력을 확대시킴으로써 이 지역 원주민의 토착 신 앙이 박해를 받았다. 중앙 법정의 토르케마다는 국왕 다 음가는 힘을 행사하였다. 그는 50명의 호위병과 250명 의 군사를 대동하고 여행을 하며 암살에 대비하였는데, 이는 자신도 사람들이 불만을 많이 가진 것을 알고 있었 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단 심문 방법은 13세기의 교황 청 소속 법정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으나 그 방법의 적용 이 더 엄격하고 관용은 적었다. 그 이전의 이단 심문은 영혼 구원이 목적이었다면, 스페인 법정은 공공 질서 수 립과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스페인 법정은 상당 기간 동안 활동을 하였다. 1730년 이후에 이단 법정의 권력이 현저하게 약화되기 시작 했다. 더 이상 종교 관용이란 다른 유럽 국가들의 분위기 를 무시할 수 없었고, 예산이 현저히 떨어짐으로써 이전 과 같은 권위를 가질 수 없었다. 프랑스 혁명기에도 무기 력하였고, 1808년 프랑스 군대가 스페인을 점령하고 이단 법정의 재산을 몰수하고 폐쇄를 명령하였다. 나폴레 옹의 명령이 전 왕국에 적용되지는 않았고 나폴레옹 멸망 후 왕위에 오른 부르봉(Bourbon) 왕가의 페르난도 7 세(1808~1833)가 복위하여 이단 법정도 부활시켰지만 더 이상의 실질적인 역할은 없었다. 그리고 이미 다 사라진 이단 법정은 1834년 6월 15일의 칙서로 최종적인 폐쇄 가 이루어졌다. 〔평 가〕 이단 심문은 오늘날의 개념으로 판단하면 이 해되지 않는 기구이다. 전적으로 중세적 사고에서만 가 능한 것이며, 국가 통일을 사상적 · 종교적 · 인종적인 통 일로 추구한 모든 곳에서 비슷한 양상의 활동이 있었다. 교회사에 있어서 어두운 단면이기도 하였지만, 국가 반 역죄를 다스리던 법 규정이 나라의 질서를 해치는 자들 을 근절시키고자 한 법정이었다. 하지만 영국이나 독일 과 북유럽에서는 남부 유럽과 같은 활동은 없었다. 따라 서 사회적 · 종교적 · 사상적으로 이단이 수용된 지역에 서의 체제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정치적인 동기가 없었다 면 세속 권력이 군사적 호응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이단 심문이 국가의 이해 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 됨으로써 현대 사람들로서는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되었 다. (⇦ 마녀 재판 ; 종교 재판 ; → 가타리파 ; 도미니코 ; 도미니코 수도회 ; 비엔 공의회 ; 성전 기사 수도회 ; 스페인 ; 십자군 ; 알비파 ; 이단 ; 작은 형제회 ; 프랑스) ※ 참고문헌 Michael Baigent · Richard Leigh, L'Inquisitione, Milano, 1999/ Natale Benazzi · Matteo d'Amico, Il Libro nero Dell'Inquiszione, Edizioni Piemme, 1998/ Nicolau Eymerich, Manuale Dell'Inquisitore A.D. 1376, Ed., Piemme, 1998/ Mariano d'Alatri, Eretici e Inquisitori, Roma, 1986/ Knowles-Obolensky, Il Medico Evo, Nuova Storia della Chiesa, vol.2, Ed., Marietti, 1971/ Storia della Chiesa, vol. Ⅹ, La Cristinita Romana(1198-1274), Ed., S.A.I.E., Torino. 〔具本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