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보 李德甫(1824~1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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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세례명은 마태오. 황해도 신천(信川) 고을 양반 출신 으로 한학(漢學) 지식이 매우 풍부한 유명한 선비였다. 그는 많은 제자들에게 과거 준비를 시켜 약간의 재산을 모은 뒤 야심을 품고 서울로 올라왔으나, 수개월 만에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궁핍한 처지에 이르고 말았다. 그는 일자리를 얻으려고 여기저기 알아보는 동안에 복음에 대 한 말을 듣게 되었으며, 천주교 서적도 몇권 구해서 열심히 배웠다. 그리하여 천주교의 진리를 깨달은 그는 세례를 받기도 전에 고향으로 돌아가 친척과 친지들에게 전교하기 시작하였다. 그중 12명을 개종시켜 그들과 함께 서울로 와서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은 날 그는 스스로 극도로 엄격한 생활 규범 을 만들어 그 뒤로 그것을 결코 어기지 않았다. 매일 빼 놓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바치고 1주일에 두 번 대재(大 齋)를 지키며, 사순절에는 줄곧 대재를 지키는 등 매우 힘든 고신극기(苦身克己)를 실천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몇 주일 동안에 10여 명의 외교인을 개종시켜 교리를 가 르쳐 주었으며, 고향으로 돌아가서는 40명 가량 되는 사 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하였다. 이후 이의송(李義松, 프란치스코)과 함께 황해도 전역을 순회 하며 전교하였고, 8도(道)에서 천주교가 들어가지 못한 유일한 지역인 평안도에도 혼자 가서 최초로 전교 활동을 벌여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그런 다음 그는 베르뇌 주교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여 청소년 교육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는 일을 맡았다. 짧은 시일 안에 12명의 청소년을 모아 과학과 인문을 가르치 고 교리 학습과 종교 의무 실천으로 마음과 정신도 단련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건강이 나빠져서 여러 차례 중병을 앓았고, 1866년 2월 19일에는 중병으로 최형 (崔炯, 베드로)의 집에서 종부 성사(終傅聖事)를 받고 머물러 있었다. 2월 27일 최형이 체포될 때 그는 병석에 누운 몸으로 자신도 천주교 신자임을 밝히고 체포해 갈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고 돌보는 이 없이 굶주리다 가 3월 1일 아침 순교하였다. 그의 시신은 길 가던 한 외교인에 의해 그 다음날 왜고개에 안장되었다. 그의 나이 44세였으며 세례를 받은 지 4년 남짓 되었다. (→ 이의송 ; 평양교구)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下, pp. 410~412/ 《右捕盜聽謄錄》, 〈金 振供招〉. 〔孫淑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