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레네 Irene(752?~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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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하느님의 어머니시여, 여황제 이레네를 도우소서" 란 의미의 모노그람마가 새겨진 기둥.
성화상 공경과 신심을 지지하고 회복시킨 동로마 제국 의 여황제(797~803). 동방 교회의 성녀로 축일은 8월 9 일. 780년에 남편인 황제 레오 4세(775~780)가 서거한 이후부터 797년까지 섭정으로, 797년부터 802년 10월 31일까지는 여황제로서 동로마 제국을 통치하였다. 〔생 애〕 752년에 아테네에서 출생한 이레네는 빼어난 미모로 인해 온건한 성화상 금지 정책을 지지하던 레오 4세의 황후가 되었다. 이레네는 성화상 공경을 강력히 지지하였기 때문에, 레오 4세는 그녀의 영향을 받아 성 화상 공경을 묵인하였다. 레오 4세가 서거하고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6세(780~797)가 어린 나이로 황제가 되자, 이레네가 섭정을 하였다. 이후 이레네는 754년에 히에 레이아(Hiereia) 교회 회의에서 결정된 성화상 금지 정책 을 철회하고, 성화상 신심을 회복시키며 서방과의 화합 을 이루고자 하였다. 784년에 그녀는 총대주교인 바오 로 4세를 온건하고 정치적인 타라시오(Tarasius, 784~806) 로 교체하였다. 타라시오는 성화상 공경을 주장하는 강 령을 작성하였다. 황후는 교황의 승인을 받아 787년 8 월 1일(또는 17일)에 콘스탄티노플 '사도들의 성당에서 교회 회의를 개회하였으나 성화상 파괴를 주창하던 군인들의 난입으로 중단되었다. 황후는 사태가 수습된 후 그 해 9월 24일에 제2차 니 체아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교황 하드리아노 1세(772~ 795)는 이 공의회를 인정하고 대표단을 파견하였다. 이 런 과정에서 레오 4세의 형제들이 심한 반대를 하였지 만, 이레네는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지 않고 서서히 그리 고 신중하게 성화상 공경과 신심을 회복시킬 준비를 해 나갔다. 하지만 절대 권력을 손에 쥐었다고 생각하던 이 레네는 790년에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의 통치권 반환 요구를 받고 그를 폐위시키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위 관료들과 아시아 출신 군인들의 반대 로 이레네 자신이 잠시 권좌에서 물러났다가 792년에 섭정의 자리를 다시 회복하였다. 그리고 797년에는 콘 스탄티누스의 폭정과 군대 지도부의 지도력 부재 등의 요인으로 촉발된 콘스탄티누스 반대 세력의 도움으로 잔 인하게 아들을 실명시킨 뒤 권좌에서 밀어내었다. 다시 왕위에 오른 이레네는, 회복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논란 이 많은 성화상 공경의 옹호와 서방과의 재결합이라는 두 가지 정책 목표를 열정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레네가 통치하는 동안 동로마 제국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사건으로는 800년에 로마에서 거행된 카를 대제 (742~814)의 대관식이었다. 카를 대제는 자신의 황제 즉 위를 콘스탄티노플이 인정해 주기를 청하였다. 공의회 기간 동안 교황 하드리아노 1세와의 화해가 수립되었지 만 제2 제국의 건설 과정에서 동로마 제국의 정치적 이 념은 완전히 혼돈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이레네는 프랑크족 출신의 황제와 협상을 원했다. 이런 와중에 카 를 대제의 즉위는 동방과 서방의 재일치를 위한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었다. 협상은 상당히 진전되었지만 폭동 이 일어나 이레네가 실각함으로써 물거품이 되었다. 동 로마 제국에서 카를 대제를 황제로서 인정한 것은 814 년이었다. 하지만 로마 황제로서 인정하지는 않았다. 여황제 이레네는 강력한 통치력을 지니지는 못하였다. 그녀는 야만족들의 침입을 막을 수가 없었으며, 관대한 재정 정책들, 특히 수도원 건립으로 심각한 재정 손실을 초래하였다. 802년 10월 9일에 이레네는 궁중의 고위 관리들이 꾸민 음모로 왕위에서 밀려나 프린키포(Prinkipo) 섬에 유배되었다가 곧 이어 더 멀리 떨어진 레스보 스(Lesbos) 섬으로 보내져 803년 8월 9일 그곳에서 쓸쓸 하게 생을 마감하였다. 이레네를 왕위에서 쫓아낸 사람 들 중 하나가 그 뒤를 이어 니케포루스 1세(802~811)로 등극하였다. 〔평 가〕 후대 사람들은 주로 이레네를 성화상 공경에 헌신한 열정적인 그리스도교 신자로만 기억하고자 한 경 향이 있다. 또한 일부 역사가나 전기 작가들은 그녀에게 서 탁월한 자질과 높은 덕성을 보고자 하였다. 심지어 동 방 교회에서는 그녀의 유해를 콘스탄티노플의 수도원에 안치하여 성녀로서 공경하였다(BHG 2205). 이는 동방 교회에 성화상 공경과 신심을 회복시킨 업적을 크게 인 정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서방 교회에서는 왕위를 둘러싼 패권 장악을 위해 어머니로서 자기 자식의 눈을 멀게 만들 만큼 잔인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던 여황제 이 레네를 성녀로 공경하지는 않는다. (→ 니체아 공의회, 제2차 ; 성화상 논쟁) ※ 참고문헌 D.A. Miller, 《NCE》 7. pp. 632~633/ V. Laurent, 《Cath》 Ⅵ , pp. 79~80. 〔宋炯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