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우 李文祐(1809~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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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한 성 이문우 요한(탁희성 작).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한 성 이문우 요한(탁희성 작).


성인(聖人).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은 요한. 일명 경천. 경기도 이천 동산 밑 마을의 양반 교우 집안에서 태어났다. 나이 5세 때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으나 다행히 친분이 있던 교우의 알선으로 서울의 여교우 오 바르바라에게 양자로 입양되었다. 이후 그곳에서 계속 성장하였다. 본래 독신 생활을 원했으나 양모의 간곡한 뜻에 따라 결혼하였고, 몇 년 후 아내와 두 자녀를 모두 잃었다. 주위에서 재혼을 권유하기도 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독신 생활을 하였다. 그는 일찍이 천주교에 입교하여 전교에 힘썼다. 1833 년(순조 33) 모방(Maubant)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그의 곁에서 복사(服事)를 하면서 전교를 도왔다. 1838년(현 종 4)에는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 가 한국인 성직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속성 신학 교육을 실시했을 때,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 이신규(李身逵, 마티아)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당시 그는 주교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839년(헌종 5)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일어나자 체포 된 교우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의연금을 모아 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전달하였다. 또한 주교에게는 박해 상황을 상세히 보고하는 등 회장으로서의 직무 도 다하였다. 점차 박해가 심해지면서 주교나 신부는 물론 지도급 교우들도 거의 체포되고, 그의 신변 역시 위험 해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옥중 교우들과 피신 중인 교우들의 사정을 살피고 다른 교우 여러 명과 함께 아직 매장을 하지 못한 순교자들의 시체를 거두었다. 이후 그는 신변이 위험해지자 시골로 피신할 계획이었으나, 갑 자기 들이닥친 포졸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때 그는 "주님께서 특은으로 나를 부르시니 어찌 그분의 부르심을 따르지 않으리오"라고 의연히 행동하였다. 그리하여 이런 행동에 당황해 하는 포졸들을 재촉하여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포도청에서 여러 번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매 번 신념을 굳건히 밝히면서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회유 자들을 전교하려 하였다. 결국 회유에 실패한 포도 대장은 그를 도둑과 배교자들이 갇혀 있는 옥에 가두었다. 그가 12월 27일(음력) 가족들에게 보낸 긴 편지를 보면 형 조에서 받은 고초가 매우 심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포도청과 형조에서 혹형과 고문을 신앙으로 이겨낸 그 는 옥에 갇힌 지 거의 3개월 후 1840년(헌종 6) 2월 1일 에 2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堂峴〕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때 나이 31세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 기해박해 ; 당고개) ※ 참고문헌  《긔ᄒᆡ일긔》/ 《달레 교회사》 中 · 下/ 《日省錄》. 〔孫淑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