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부

敎父

〔라〕pater ecclesiae · 〔영〕father of the church

글자 크기
1
성 예로니모.
1 / 6

성 예로니모.


I. 개 념 교부란 교회의 '아버지' 란 뜻으로 넓게는 교회의 지도 급 인물 즉 주교들을 말하는데, 예컨대 공의회 문헌들의 첫머리와 끝부분에 그 문헌을 결정하고 반포한 주교들을 일컬어 '교부' 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교부란 명칭은 고대 그리스도교의 저술가들에 한정하여 사용된 다. 고대로부터 '아버지' 라는 명칭은 스승에게도 사용되 었는데(1열왕 20, 35 ; 1베드 5, 13), 스승은 제자의 정신 적인 인격을 형성해 준다는 점에서 아버지 같은 역할을 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사실 사도 바울로는 복음 을 전해 주어 신앙인이 되게 한 사람이나 공동체에 대 해, 자신이 그들의 아버지가 된다고 말한다(1고린 4, 15. 17 ; 1디모 1, 2). 2세기의 이레네오 (adv.haer. 4, 41, 2)와 알렉산드리아의 글 레멘스(str. 1, 1, 1)는 스승은 아버지이며 학생은 아들이라고 정의하였다. 초세기에 교부의 명칭은 주로 주교들 에게 사용되었는데, 주교는 지역 교회 의 예비자들에게 실제로 세례를 주고 신도들을 가르치는 최고 스승이었기 때 문이다. 4세기 후반부터 여러 이단 논 쟁이 있었을 때, 교회의 정통 교리를 증언하였던 과거의 주교들은 물론 주교 가 아닌 사제 학자들을 포함하여 교부 라 부르기 시작하였으니, 예를 들면, 아우구스티노는 주교가 아니었던 예로 니모를 교부라 하였다(Contra Juli. 1, 7, 34). 르랭의 빈천시오는 434년에 저술 한 《비망록》(Commonitorium) 1, 3에서 아우구스티노의 이론을 발전시켜 "하 나의 교회 신앙과 일치" 안에 있는 사 람은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나 스승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6세기 초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른바 <젤라시 아누스의 규정>(Decretum gelasianum) 제5장은 교부로 인 정받거나 인정받지 못하는 교회 저술가들의 명단을 최초 로 열거하고 있는데, 평신도인 프로스펠(Prosper)을 교부 들의 명단에 포함시키면서 로마 교회의 신앙과 가르침에 서 벗어나지 않고 끝까지 로마 교회와의 친교를 유지하 는 것을 교부가 되는 중요한 기준으로 제시하였다. II . 조 건 교회는 다음의 4가지 기준을 구비한 사람을 교부라 부 른다. 고대성(antiquitas) : 교부 시대는, 신약성서의 정전(正 典) 외에 95년경에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쓴 로 마의 주교 글레멘스 1세 교황(+101)으로부터 시작된다. 언제까지 교부 시대로 보느냐 하는 문제는, 역사학적, 문화사적, 교의신학적 측면에서 고대 교회와 중세 교회 의 전환점을 어느 시기로 정하느냐 하는 문제와 연관되 어 있기 때문에 지역 교회마다 차이가 있다. 따라서 학 자마다 의견을 달리한다. 가톨릭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요한 다마쉐노(+750)를 동방 교회의 마지막 교부라고 하 는 데에 일치하고 있는 반면, 서방 교회의 경우에는 그 레고리오 1세 교황(+604) 또는 세빌리아의 이시도로 (+636)를 마지막 교부라고 한다. 정통 교리(doctrina orthodoxa) : 교부는 자신의 신학 사 상을 글로 남긴 저자를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정통 교리의 기준은 그의 저서에 한 점의 잘못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당시의 정통 교회와 교리적인 일치를 충실히 유지하였느냐에 달려 있다. 사실 교부들 도 시대적인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2세기 교회 안에서 아직 모호한 상태로 문제시되지 않던 어떤 가르침이 4세기의 공의회를 통해 단죄받았다고 할 때 그 런 교리를 가르친 사람을 시대를 소급해 단죄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문제는 특히 많은 양의 저서를 남긴 교부들에게 해당되는 경우가 많다. 2세기의 성 이 레네오의 저서에 천년 왕국설(millenarismus)이 나오지만 그는 당시 교회의 정통 교리의 수호자인 교부로 인정받 고 있는 반면, 테르툴리아노는 방대한 저서들을 남겼고 그 신학적 가르침이 뛰어났지만 말기에 몬타니즘(Montanismus) 이단에 빠져 보편 교회를 떠났기 때문에 교부 로 불리지 않는다. 거룩한 생활(sanctitas vitae) : 이 기준은 반드시 공식적 으로 성인품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으며, 적어 도 그의 가르침과 실제 생활 사이의 조화 그리고 그의 신앙과 윤리적 생활 사이에 조화를 이루면서 얼마나 교 회 생활에 충실하였느냐를 말한다. 교회의 승인(approrvatio ecclesiastica) : 이 기준은 일종 의 공식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여러 가지 형태로 나 타난다. 예를 들면, 공의회나 교황이 교부로 선포하였거 나, 교회의 공적 순교록에 수록되었거나, 공의회나 교황 또는 전례 문헌이 직접 그의 글을 인용한 경우들이다.
Ⅲ . 구 분 〔언 어〕 교부들을 분류할 때, 해당 교부가 저술에 사용 한 언어에 따라 그리스어를 사용했으면 '그리스 교부' (patres graeci), 라틴어를 사용했으면 '라틴 교부' (patres latini)라 부른다. 이러한 언어적인 구분은 해당 지역과 꼭 일치하지 않는데, 2세기까지 교회 안에서 저술된 문헌은 지역에 관계없이 모두 그리스어였기 때문에 사도 교부들 과 호교 교부들은 모두 그리스 교부에 속한다. 한편 동 방 교회 안에는 일반적으로 그리스어가 통용되지만, 일 부 지역에서는 모국어인 시리아어나 콥 트어나 아르메니아어로 저술하는 교부 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이런 교부 들은 언어상 그리스어로 저술한 교부(그 리스 교부)들과 라틴어로 저술한 교부(라 틴 교부)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동방 교 부' 들(patres orientales)이라고 부른다. 〔교부 학자〕 '교회 학자' (doctor ecclesiae)라는 칭호가 있는데, 이 칭호를 받으 려면, 그의 뛰어난 가르침(eminens eruditio)이 인정되어 교회로부터 공식적인 선 포(expressa ecclesiae declaratio)가 있어야 한다. 이 칭호는 교부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관계없이 붙여진다 (예를 들면, 파도바의 안토니오, 토마스 아퀴 나스, 아빌라의 데레사 등). 그런데 교부들 중에 '학자' 의 칭호를 받는 경우 그 권 위가 특별히 인정된다. 카르타고의 주교 리치니아누스가 그레고리오 대교황에게 보낸 한 서간에서, 힐라리오,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 노,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를 "교회의 학자이며 변호자" (doctores defensoresque ecclesiae)라고 불렀다(Gregor., Ep. 1, 41a). 그리고 밀라노의 주교 만수에투스는 황제에게 보 낸 한 서간에서 네 명의 그리스 교부인 아타나시오, 대 바실리오, 요한 그리소스토모,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와 함께 네 명의 라틴 교부인 힐라리오, 암브로시오, 예로 니모, 아우구스티노를 "신앙의 증인"이라 불렀으며(Mansi 11, 206 이하), 800년경에 요한 수도승은 암브로시오, 아 우구스티노, 예로니모, 그레고리오 대교황을 서방 교회 의 4대 교부라 하면서 "낙원에서 흘러나오는 네 줄기의 강" (HJB 1894, 96)이라 칭송하였다. 서방 교회에서는 보 니파시오 8세 교황이 1298년에 암브로시오, 예로니모, 아우구스티노, 그레고리오 대교황을 사도들과 복음 사가 들 다음으로 "교회에 뛰어난 학자"(eredii doctores ecclesiae) 라고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동방 교회에서는 대 바실 리오,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 요한 그리소스토모 등 3 교부만 '공(公)교부' (patres oecumenici)라고 불러 왔는데, 라틴 교회에서는 여기에 아타나시오를 첨가하여 서방 교 회처럼 4명의 동방 교부 학자를 선포하였다. 성 비오 5 세는 1568년 이들에게 교회 학자란 칭호를 부여하여 성 무 일도(Breviarium)에 삽입하였다. 따라서 동서방 교회 각 4명의 교부를 합하여 8대 교부라고 하는 것이다. 그 러나 이외에 교회 학자의 칭호를 받은 교부들이 더 있으 니, 서방 교회에서는 프와티에의 힐라리오, 베드로 그리 솔로고(+450), 레오 대교황(+461), 세빌리아의 이시도로 (+636)이며, 동방 교회에서는 에프렘(+373), 예루살렘의 치릴로(+386),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444) 등이다.
Ⅳ. 권위와 중요성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계시 헌장>(Verbum Dei) 7~10 항에서 밝히고 있듯이, 하느님의 계시는 신구약 성서와 성전(聖傳)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데, 이 두 가지는 하느님의 똑같은 원천에서 흘러나오므로 하나를 이룰 만 큼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바로 "교부들의 말씀은 믿고 기도하는 교회의 실생활 가운데 풍부히 흐르고 이 성전의 생생한 현존을 입증한다" (8항). 교부들의 가르침 은 성전의 주축을 이루고 있으므로 교부들의 문헌 연구 는 하느님의 계시에 접근하는 데 중요하고 필요불가결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끝맺으 면서, "예수께서 행하신 다른 일들도 많이 있다. 만일 그 것들을 하나하나 다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기록 된 책들을 다 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한 21, 25)고 하였다. 이 말씀이 암시하는 것과 같이, 사도들은 복음서에 기록된 주님의 가르침과 행적들 외에 다른 내 용들을 자기 제자들에게 틈틈이 들려주었을 것이며, 사 도들의 서간들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어떤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주님의 복음 정신에 따라 그 문제 의 해결 방법을 제시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사도들의 제 자들은 사도들 이후에 각 지역 교회의 책임자(주교)로 세 워졌으며, 맡은 교회를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다스리 면서 지역과 시대에 따라 새로이 발생하는 문제들을 대 처해 나갔다. 이러한 가르침의 계승을 '전승' (traditio)이 라 하며,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부들이 된 것이다. 사실 교회의 지도자들의 권위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표현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또는 "우리가 전해 들은 바에 따라"였다. 따라서 신앙의 옳고 그름을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은 그 가르침이 마치 고리처럼 연결되어 사도들에게 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냐였으며, 이것을 "신앙의 규 칙"(regula fidei)이라고 불렀다. 교부들의 권위는 어디까지나 사도들로부터 전해 받은 신앙의 올바른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있다. 교부 각 개 인은 교회의 거룩한 전통〔聖傳〕을 이루는 구성 요소는 되지만 결코 성전 자체는 아니다. 성전의 한몫이며 구성 요소인 교부 각 개인의 권위는 그가 주창한 학설의 내용 이 보편 교회의 가르침이나 다른 교부들의 가르침과 일 치하는 정도에 비례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서 주석에 대한 "교부들의 일치된 견해"(unanimis consensus patrum)는 무류적(無謬的)이라고 말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 르침을 이해해야 한다. "원천으로 돌아가자" , "초대 교 회의 삶을 살자" 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은 일 차적으로 성서와 복음적 삶을 의미하는데, 성서와 가장 가까운 시대에 살았던 교부들의 교회 삶을 통해 성서의 의미를 더욱 깊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V . 교부들의 시대 구분 교부들의 시대는 크게 성장기, 전성기, 쇠퇴기 등 세 단계로 나누어진다. 〔성장기(니체아 공의회 이전 시대)〕 최초의 세계 공의 회였던 니체아 공의회(325)는 교의사적 측면에서 전환기 를 이루는 중대한 사건이었으며, 공의회 이전 시대는 콘 스탄틴 대제의 밀라노 칙령(313)이 있기까지 주로의 박 해 시대였다. 이 시대의 교부들은 다음의 세 시기로 세 분된다. 사도 교부들(patres apostolici) : 이들은 사도들의 제자 들 또는 그 제자들의 제자들로서 사도들로부터 직접 혹 은 간접으로 영향을 받은 2세기 중엽까지의 교부들이며 로마의 글레멘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포, 히에라폴리스의 파피아스가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저자에 대해 논란이 있지만 문헌이 전해 오는 것 으로서 <바르나바 서간>, <헤르마스의 목자>, <디오그네 토에게 보낸 서간>, <디다케>(열두 사도의 가르침), 리옹의 이레네오의 <이단 반론>(Adv. haer. 4, 27, 1 ; 6, 32, 1) 안 에 전해 오는 <장로들의 단편> 등을 사도 교부 시대의 문 헌으로 간주한다. 사도들로부터 세워진 교회들이 뿌리를 내리는 이 시대의 교부들은 신약성서의 사목 서간들의 논조에 따라 종말론적 긴장 안에서 교훈적이며 사목적인 성격의 글을 썼다. 이 저서들은 원시 교회의 공동체 규 칙, 전례 생활, 교계 제도, 신약성서의 발전 과정, 신학 적 개념의 형성 그리고 고대 교회사에 관한 연구에 중요 한 의미를 지닌다. 호교 교부들(patres apologetici) : 사도 교부들의 저서가 내용과 형식에 있어 신약성서와 유사하고 실천적이고 신 앙적인 것인 반면, 2세기 중엽과 말엽의 저술가들은 호 교론적 형식에서 학문적인 논증의 특성을 지닌다. 당시 이교 저술가들은 그리스도교를 비방하는 글을 쓰기 시작 하였으며, 일반 대중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람의 고기를 먹는 식인종이며 근친상간을 한다며 악성 유언비어를 퍼 뜨리고 있었다. 또한, 로마 제국은 그리스도교를 염두에 두고 새로운 종교를 금하는 법령을 제정하였다. 이에 대 해 호교 교부들은 그리스도교가 제국을 위태롭게 하는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제국의 안녕을 위해 일하며 기도 하고 있다고 강변하고, 이교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과 비 도덕성을 폭로함과 동시에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르 침, 특히 하느님의 단일성, 그리스도의 신성, 인간 육신 의 부활 등을 설파한다. 과드라토, 순교자 유스티노, 아 테네의 아리스티데스와 아테나고라스, 안티오키아의 테 오필로, 타시아노, 히에라폴리스의 아폴리나리스, 사르 데스의 멜리톤, 펠라의 아리스톤, 소아시아의 수사학자 밀티아데스, 헤르미아스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 시기에 수준 높은 신학이 개진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유스티 노의 '로고스 신학' 은 후기 신학 발전에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신학 학파의 형성기 : 2~3세기의 그리스도교는 유대 교와 이교도의 박해로 인한 외적인 위협뿐만 아니라 영 지주의, 몬타니즘, 마르치온 이단 등에 의한 위협에 처 하게 된다. 특히 인간 육신의 구원을 부인하는 영지주의 계통의 여러 이단 학파와 마르치온 이단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기본 교리 즉 신론, 그리스도론, 인간론, 구원론 등을 근본적으로 왜곡시킴으로써 신도들에게 엄 청난 혼란을 초래하였다. 당시의 교부들은 이단 논박을 통해 정통 교리를 수호하고 체계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앞 으로의 신학 발전에 중요한 기초를 놓았다. '전통의 사 람' 이라 불리는 리옹의 이레네오는 호교 교부들과 이 시 대를 이어 주는 교량 역할을 하면서 앞으로의 이단 논쟁 을 위한 중요한 모범을 제시하였다. 한편 교회는 2세기 말과 3세기 초, 거의 같은 시기에 서로 다른 지역에서 세 명의 위대한 신학자들을 배출하 였다. 동방에서는 뛰어난 신학적 통찰력으로 엄청난 양 의 저서를 남긴 오리제네스가 동방 교회 신학의 발전에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서방에서는 오리제네스와 견줄 수 있는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노 그리고 로마의 히폴리토 가 서방 교회 신학의 기초를 놓았다. 이로써 각 지역 교 회 안에 고유한 신학 학풍이 형성되어 일종의 학파가 생 겨나게 되었다. ①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체사레아 학파 : 나일강 하구 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는 상업, 학문, 종교의 요충지였 으며, 구약성서를 히브리어에서 그리스어로 번역한 70 인역이 생겨난 곳이어서 그리스도교가 일찍부터 이곳에 서 번성하였다. 판테누스(200년 이전 사망)는 180년경에 최초로 교리 교육 학교를 세워 강의한 첫 그리스도인 학 자였다. 그는 성서를 우의적(寓意的)인 방법으로 뛰어나 게 해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저술 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그의 학문적 특성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 다. 그의 뛰어난 제자이자 후계자로서 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215?)가 배출되었는데, 글레멘스는 그리스도 교의 가르침에 관한 위대한 호교가인 동시에 교회의 첫 윤리학자라 할 수 있다. 글레멘스의 제자이자 후계자이 며, 알렉산드리아 교회가 배출한 가장 뛰어난 학자는 오 리제네스(+253/254)이다. 오리제네스는 개인적으로 엄격 하고 모범적인 생활을 하였으며, 백과 사전적 지식과 천 재적 두뇌로 신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엄청난 양의 뛰어난 저서들을 남겼으며, 동방 교회 신학의 기초를 놓 았다. 따라서 그는 생전과 사후에 수많은 제자들과 열렬 한 지지자들을 갖게 되었지만, 동시에 그를 반대하는 적 대자들도 많았다. 오리제네스의 적대자들 중에는 그의 뛰어난 재능과 적극적인 활동을 시기한 이들도 있었지 만, 그의 많은 학설 중에 몇 가지 문제되는 점들, 예를 들면 영혼의 선재설과 세상 종말에 모든 죄인들도 정화 되어 구원받게 된다는 우주의 복원설 때문이었다. 사실 그의 사후에도 계속된 이른바 '오리제네스 논쟁' 은 동방 교회 신학 발전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오리제네스의 전통을 이어받은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디오니시오, 테오 그노스토, 피에리오, 피에트로로 이어지면서 계속 발전 되었으며, 4~5세기에 뛰어난 학자들을 많이 배출하였 다. 한편 오리제네스는 232년에 적대자들을 피해 알렉 산드리아를 떠나 팔레스티나의 체사레아에 가서 학교를 세워 가르침으로써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기 때문에 알 렉산드리아 학파와 체사레아 학파 사이에 깊은 연관성을 갖게 되었다. 이곳의 제자로는 체사레아의 팜필로, 그레 고리오 타우마투르구스,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 등을 들 수 있으며, 반대로 그의 가장 적극적인 반대자는 메토디 오였다. ② 안티오키아 학파 : 안티오키아 교회는 신도들이 처 음으로 '그리스도인들' 이라는 이름을 받게 된 곳이고(사 도 11, 26), 사도 바울로가 이방인들을 위해 선교 여행을 떠난 전초지였으며,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를 위시해 사도 교부들 시대의 교회 지도자들 대부분은 이곳 출신 이었다. 2세기 중엽부터 3세기 초까지는 별로 뛰어난 학 자가 없었으나, 오리제네스가 인접한 체사레아에 학교를 세움으로써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그러나 321년에 순교한 루치아노는 알렉산드리아 학파 의 은유적인 성서 주석 방법과는 달리 성서 본문 비판에 기초를 둔 성서 주석 방법을 제창하면서 안티오키아 학 파를 설립하였다. 그의 제자들 중에 이단자가 된 바울로 사모사타와 아리우스가 있었으며, 아리우스 이단의 추종 자 대부분이 그의 제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도 같이 단죄 를 받게 되었다. 안티오키아 학파는 비판적인 사고력, 논리적 숙고, 실용적 경향, 계시된 것에 관한 사실적 고 찰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후에 유명한 신학 자들을 많이 배출하였으며,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경쟁하 면서 동방 교회의 신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③ 로마 교회와 아프리카 교회 : 로마 교회가 가지고 있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학자들을 배출하지는 못하였다. 그 이유들 중에 하나는 로마의 주교들이 개인 적인 저서를 남기기보다는 보편 교회의 정통성을 보존하 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로마 교회가 배출한 최초의 학자는 호교론자 미누치오 펠릭스였다. 그러나 2 세기 말 로마 교회는 오리제네스와 견줄 만한 히폴리토 를 배출하였다. 사실 히폴리토는 오리제네스와 동시대인 으로서 오리제네스가 로마를 방문하였을 때 서로 친분을 나누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대립 교황 문제로 큰 혼란을 초래하였으며, 마지막에 로마 교회와 화해하고 순교의 영광을 얻었지만, 오점 때문에 그의 학설이 크게 빛을 발하지 못하였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노바시아노 도 뛰어난 신학자였지만, 역시 대립 교황 문제로 교회로 부터 단죄를 받았다. 한편 서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한 아프리카 교회는 처음부터 로마 교회의 자 교회(子敎會)처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는데, 로마 교회를 훨씬 능가하는 뛰어난 신학자들을 배출하였다. 테르툴리아노는 오리제네스와 동시대인으로 최초로 라 틴어로 저술함으로써 라틴어 신학 용어들을 개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양의 뛰어난 저서들을 남겼기 때문 에 가히 라틴 신학의 기초를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다. 그러나 그는 그의 엄격주의적 성격 때문에 불행히도 후에 몬타누스 이단에 빠짐으로써 교회로부터 단죄를 받 게 되었다. 그러나 치프리아노는 테르툴리아노로부터 신 학적인 깊은 영향을 받았지만, 정통 교리를 고수하는 모 범적인 주교로 일하면서 뛰어난 많은 저서들을 남겼다. 아프리카 교회는 그외에도 아르노비오와 락탄시오를 배 출하였다. 〔전성기〕 박해받던 교회에서 종교의 자유를 얻었고 나 아가 제국의 인정과 보호를 받는 교회로 변화된 이 시대 는 대중의 대량 입교를 통해 교회가 양적으로 팽창하였 을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수 많은 교부들을 배출하였다. 신학의 발전은 4대 공의회 즉 니체아 공의회(325),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 에페 소 공의회(431), 칼체돈 공의회(451)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여러 이단들(아리우스 이단, 도나투스 이 단, 마니케오 이단, 펠라지우스 이단, 아폴리나레 이단, 네스토 리우스 이단, 단성론 등)에 대한 논쟁을 통해 신학이 발전 되었으며, 공의회들을 통해 정통 교리가 확정, 공포되었 기 때문이다. 교부학에서 중요하게 거론되는 교부들이 대부분 이 시대에 속한다. 알렉산드리아 교부들과 가빠도기아 교부들 : 안티오키 아 학파에서 교육을 받았던 아리우스(Arius 250?~336)가 알렉산드리아의 한 본당 신부가 되어, 성자 예수 그리스 도는 천주 성부의 첫 피조물이며, 성부는 성자를 통해 성령을 창조하였다는 위계적인 성삼론을 가르치기 시작 하였다. 이것은 결국 성자와 성령의 천주성을 부인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교의 기본 교리인 성삼론과 구원론을 근본적으로 위협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총주교 알렉산 델은 지역 주교 회의들을 통해 이를 단죄하였지만, 아리 우스는 오히려 안티오키아 학파의 동조자들 특히 니코데 미아의 에우세비오의 지원을 받으면서 자기의 주장을 고 집하였다. 이로써 아리우스의 주장은 한 지역 교회의 문 제뿐만 아니라 전체 교회의 문제로 부각되었다. 이 때문 에 325년에 니체아 공의회가 개최되었으며, 아리우스의 주장은 전교회 차원에서 이단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아리우스 이단은 때로는 황제와 정치권의 비호를 받으 며, 때로는 자기들의 주장을 약화시키면서(세미 아리아니 즘) 수그러들지 않고 계속 교회를 괴롭혔다. 온갖 방해 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니체아 공의회의 결정 사항을 고수한 대표적인 인물은 알렉산드리아의 총주교 아타나 시오였다. 그외 트므이스의 세라피온, 소경 디디모, 알 렉산드리아의 총주교 테오필로와 치릴로를 들 수 있다. 아타나시오에 이어 성삼론의 정통 교리를 옹호하고 발전 시킨 이들은 가빠도기아의 3대 교부인 대(大) 바실리오 (+379), 나지안츠의 그레고리오(+390?), 니사의 그레고리 오(+394)이다. 이들은 서로 형제(바실리오와 니사의 그레고 리오) 또는 친구(바실리오와 나지안츠의 그레고리오)로서 콘 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준비하고 주도하였으며, 교회의 신 학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안티오키아 교부들과 시리아 교부들 : 안티오키아 학 파는 아리우스 이단 때문에 처음에는 교회로부터 단죄를 받았지만,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지나친 은유적, 신비적 성서 주석 방법이 지니고 있는 위험성에서 벗어나 성서 를 본문 그대로 이해하고 분석함으로써 점차 훌륭한 학 자들을 배출하였다. 예비 신자 교육의 대가인 예루살렘 의 치릴로(+387), 다르소의 디오도로(+394 이전), 몹수에 스타의 테오도로(+428), 금구(金口)라는 별명을 받은 위 대한 설교가 요한 그리소스토모(+407), 시로의 테오도레 토(+446), 시로의 에프렘(+373) 등이 있다. 이 시기에 안 티오키아 학파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경쟁 내지 대립 관계에 있으면서 교회의 신학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 였다. 라틴 교부들 : 서방 교회 신학의 중심지로는 로마 교 회와 카르타고 교회 그리고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방) 교회가 있었으며,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서로 큰 마찰 없이 공동 보조를 마추어 나갔다. 이에 비해 동방 교회 는 여러 중심 교회들(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콘스탄티노 플)로 나누어져 심각하게 대립하고 때로는 서로 단죄하 는 경우들이 있었는데, 초기 4대 공의회가 모두 동방 교 회의 지역 안에서 개최되었던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이 시기의 서방 교회는 동방 교회 안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성삼론과 그리스도론 문제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 고 있기는 하였지만, 서방 교회 안에서 크게 거론된 도 나투스 이단, 펠라지우스 이단, 마니케오 이단과 싸우면 서 교회론과 은총론과 성사론에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 룩하였다. 이 시기의 주요 교부들은, 포아티에의 힐라리 오, 마리오 빅토리노, 밀라노의 암브로시오, 루피누스, 예로니모, 아르스의 힐라리오, 레오 대(大)교황 그리고 가장 위대한 교부로 불리는 히포의 아우구스티노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서방 교회에서는 동방 교회의 수많은 그리스 문헌들을 라틴어로 번역하였으며, 그 대표적인 인물은 예로니모와 루피누스이다. 그들이 번역한 문헌들 중에는 후에 그리스 원문이 상실되어 라틴어 번역만 남 아 있는 경우들이 많아 귀중한 역사적 문헌들을 후대에 전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그들의 공로를 높이 평가해야 한다. 수도 교부들 : 이 시대를 뒷받침하는 영성은 수도 영 성이었는데, 교회의 타락과 세속화를 막아 주는 소금의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순교 영성을 대신하여 교회 를 강화시키고 쇄신하는 힘이 되었다. 수도 생활의 기원 을 정확히 따지기는 어렵지만, 이집트의 나일강변 사막 과 시나이 사막에서 시작되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었 고, 서방 교회로 전해졌다. 초기에는 사막이나 광야에 나가 혼자 생활하는 은세(隱世) 수도자 또는 독(獨)수도 자들이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이 '은수자들의 아버 지' 라 불리는 안토니오(+356)이며, 알렉산드리의 총주교 아타나시오가 직접 《안토니오 전기》를 저술하였기 때문 에 그의 성덕과 생활은 모든 수도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수도자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회(會)수도자들이 생겨났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은 파코 미오(+346)로서 '회수도자들의 아버지' 로 불린다. 그 외 알렉산드리아의 마카리오, 이집트의 마카리오(+390?), 에 바그리오 폰티코(+399), 팔라디오, 요한 가시아노, 루피 노, 예로니모 등이 있다. 수도 생활이 이 시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는, 이 시기의 많은 위대한 교부들이 초기에 수도자로 생활하다가 주교로 성성되었고 주교가 된 다음에도 가능한 한 수도자적 생활을 계속하려 하였 다는 점에서 엿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가빠도기아의 3 대 교부인 바실리오와 두 그레고리오, 아우구스티노, 요 한 그리소스토모 등을 들 수 있다. 〔쇠퇴기〕 칼체돈 공의회 이후부터 신학 발전에 있어 뚜렷한 쇠퇴기를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부분적 으로 교회 자체 내에 있었다. 이 시대의 교부들은 신학 이 이미 절정에 이르렀다고 보고, 신앙에 관한 중요한 현안 문제들을 이전의 공의회나 위대한 교부들의 가르침 에 근거하여 해결하려 하였다. 새로운 성서 주석과 사변 적인 노력을 게을리 하는 분위기 때문에 창조적인 독창 성이 필연적으로 결여되었으며, 그 대신 전통주의와 과 거의 문헌들에 대한 지적 탐구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 시대에 성행하였던 것은 "카테네"(catenae : 고리)와 "프로릴레지아"(forilegia : 꽃다발)인데, 카테네는 성서에 대한 독자적인 주석이 아니라 성서 구절에 대한 이전의 교부들의 주석들을 모아 나열한 것이며, 프로릴레지아는 어떤 신학 주제나 분야에 대해 이전의 교부들이나 공의 회의 가르침들을 마치 꽃다발처럼 모아 놓은 것이다. 이 러한 쇠퇴기의 이유를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찾을 수 도 있다. 야만족의 계속된 침입으로 서로마 제국이 멸망 하고 동로마 제국 역시 위협당하는 정치적 불안, 동방· 서방 교회 사이의 불화와 대 립, 이슬람 문화의 팽창으로 인한 그리스도교 문화의 쇠퇴 등이 작용하였다. 한편 아리스 토텔레스의 철학이 신학적 사 고에 이용되면서 중세의 스콜 라 신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는 데, 특히 보에시우스(480-524) 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들 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그렇 지만 이 시대에 꼽을 수 있는 중요한 교부들은, 그레고리오 1세 대교황, 세빌리아의 이시 도로, 위(僞)디오니시오 아레 오파지타, 증거자 막시모 그리 고 요한 다마쉐노 등이 있다. 이 시대에는 신학적인 발전이 빈약하였지만 영성과 경신 예 식에서는 괄목할 만한 발전이 있었다. (→ 교회 학자 ; 그리 스 · 라틴 · 동방 · 사도 · 호교 교부) ※ 참고문헌  E. Amann, Pères de I'Eglise, 《DTC》 12, pp. 1192~1215/ A. Benoit, L'actulaité des Pères de I'Eglise, Paris, 1961, pp. 10~52/ H. Hurter . Fr. Paugerl, Nomenclator lit. theol. cath., Innsbruck, 1926(4 ed.), vol. 5/ J. de Ghellinck, Patristique et Moyen Age, Ⅱ ~ Ⅲ , Bruxelles, 1947~ 1948/ E. Peterson, Patrologia, 《EC》 , Citta del Vaticano, 1949~ 1950, pp. 973~976/ A. Siegmund, Die Überlieferung der griech. christ, Literatur in der latein, Kirche bis zum 12 Jh., München, 1945/ Th. Gottlieb, Über die mittelalterlichen Bibliotheken, Graz, 1955/ Ch. Munier, Les sources patristiques du droit de I'Eglise du VIII au XIII s., Strasbourg, 1957/ A. Hamman, PatrologiaPatristica, 《DPAC》, pp. 2708~2718. 〔李瀅禹〕 ((Reference 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