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박해 때의 순교자. 세례명은 세례자 요한. 《일성록》(日省錄)에 보이는 이유진(李儒震)과 같은 사람으로 이해된다. 그의 본관은 함평(咸平)이다. 대대로 무관 벼슬을 지낸 양반 집안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충청도 덕산(德山) 높은뫼(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몽곡리)에서 살면서 24세 때인 1801년에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이후 그는 두 아우 및 누이 이시임과 더불어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으나 고향에서 외교인 친척들과 함께 살게 되면 위패(位牌)를 모시는 것과 여러가지 미신 때문에 천주를 공경하는 데 크나큰 지장이 있으리라는 것을 이내 깨달았다. 그래서 더욱 자유롭게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마을을 떠나 산중으로 들어가 살았다. 몇 해 안 가서 재산이 다 떨어지자 그의 가족들은 굶주림과 추위로 고생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외교인인 그의 아버지는 천주교를 원망하였으나 그의 끊임없는 개종 노력으로 죽기 2년 전에 신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며 살다가 전라도 고산 고을에 정착하였다. 그의 가장 중요한 일과는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것과 흉년이 들었을 때 길에 버려진 송장을 거두어 장사지내 주는 일이었다. 이러한 착한 일을 하는 가운데 정해박해가 일어나 1827년 3월 23일(음) 그가 먼저 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고, 얼마 안되어 그의 두 아우와 온 집안 식구 13명도 함께 잡혀 들어갔다. 그는 교우들의 이름을 실토하라는 관장의 명령을 거부하다 팔이 부러지고 의식을 잃게 되는 악형을 거듭받았다. 아마도 고문에 못 이겨 배교했다가 뒤에 취소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그는 9년 동안 옥살이를 한 끝에 병이 들어 8개월 동안 신음하다가 1835년 4월 11일(음) 57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이성삼 ; 이시임)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中, pp. 62~64, 114~117/ 《日省錄》 純祖 15년 6월 19일 ; 27년 閏 5월 2일. 〔孫淑景〕
이성지 李 ― (1778~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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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