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광 李睟光(1563~1628)

글자 크기
9
이수광의 <지봉유설>.

이수광의 <지봉유설>.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性理學者). 관료 겸 문장가. 시인.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峰). 아버지는 병조 판서를 지낸 희검(希儉)이고, 어머니는 문화 유씨(文化柳氏)이다. 서울 근교에서 성장하였으며, 부친과 외가 5대조 유관(柳寬)의 청백한 삶을 자랑 삼아 스스로 '성시(城市) 속의 은자' 로 자처하였다. 침류대학사(枕流臺學士)라는 시사(詩社)를 통해 차천로(車天輅, 1556~1615), 신흠(申欽, 1566~1628), 유몽인(柳夢寅, 1559~1623), 한백겸(韓百謙, 1552~1615), 한준겸(韓浚謙, 1557~1627) 등과 교유하였으며, 강직하고 온화한 입장을 견지하여 서인 · 남인 · 북인 등 어느 당에도 편중되지 않았다. 1585년(선조 18) 23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의 교리(校理) · 부제학(副提學) · 제학(提學)과 안변 부사(安邊府使) · 홍주 목사(洪州牧使) 등 외직(外職) 및 도승지(都承旨) · 대사헌(大司憲) · 예조 참판(禮曹參判) · 형조 참판(刑曹參判) · 이조 판서(吏曹判書)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사후에는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고, 수원의 청수서원(淸水書院)에 제향되었다.
그는 《주역》(周易)에 대한 조예가 깊어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을 때 《고경주역》(古經周易)과 《주역언해》(周易諺解)를 교정하기도 하였는데, 스스로 성리학자임을 자처하여 도(道) · 불(佛) · 양명학(陽明學) 등을 이단으로해석하면서도 그 장점을 절충하려는 입장이었고, 성리학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및 이기 논쟁(理氣論爭)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심성(心性)의 존양(存養)에 힘쓰면서 국가와 민생에 필요한 실용지학(實用之學)이면 무엇이든지 취사 · 절충하려는 학문적 개방성과 실용성을 추구하였기에 종종 '실학의 선구자' 라는 평가를 듣기도 한다. 따라서 그는 17세기 근경학인(近京學人)의 한 사람으로서, 성리학의 심학화(心學化) · 실학화(實學化) . 고학화(古學化)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또한 시문에도 능하여, 임진왜란 때는 선조(宣祖)를 호종하면서 교서(敎書)를 자주 썼으며 1590년(선조 23) 성절사(聖節使) 서장관, 1597년(선조 30) 진위사(進慰使), 1611년(광해군 3) 주청사(奏請使)로 모두 세차례나 중국에 파견되어 그곳에서 유구(琉球), 안남(安南), 섬라(暹羅) 등지의 사신과 필담을 나누며 동남아 각국의 해외 사정에도 문견(聞見)한 바가 많았다. 1603년에는 권희(權熺) · 이광정(李光庭)이 북경에서 가져온마테오 리치(M. Ricci, 利瑪竇, 1552~1610)의 〈구라파국여지도〉(歐羅巴國輿地圖)를 직접 목도하고 중국 중심의 전통적인 천하관(天下觀)을 탈피하게 되었다.
이수광은 1613년(광해 5) 폐모살제(廢母殺弟)로 표현되는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자 관직에서 은퇴하여 백과 전서인 《지봉유설》(芝峰類說)의 집필에 몰두, 이듬해인 1614년에 탈고하였다. 조선 후기 박학풍(博學風) 백과 전서류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지봉유설》은 총 3,435조에 달하는 기사를 25부문, 182항목으로 나누고 20권 10책으로 엮었는데, 육경(六經)에서부터 근세의 소설, 제반 문집에 이르기까지 모두 348명의 책을 모으고 2,265명의 성명을 인용하였다. 저자 사후인 1633년(인조 11)에 그의 두 아들 성구(聖求) · 민구(敏求)에 의하여 《지봉 선생집》(芝峰先生集)과 함께 출간되었다. 이외에도 그의 저서로 《찬록군서》(纂錄群書), 《채신잡록》 (採薪雜錄) 등이 있다.
《지봉유설》의 내용은 권1 천문 · 시령(時令) · 재이(災異), 권2 지리 · 제국(諸國), 권3 군도(君道) · 병정(兵政) , 권4 관직, 권5~7 유도(儒道) · 경서 · 문자, 권8~14 문장, 권15 인물 · 성행(性行) · 신형(身形), 권16 어언(語言), 권17 인사 · 잡사, 권18 기예(技藝) · 외도(外道), 권19 궁실 · 복용(服用) · 식물, 권20 훼목(卉木) · 금충(金蟲)으로 되어 있다. 이 중 제2권 지리부(地 理部)에는 40~50여 개 국에 이르는 세계의 국가가 소개되어 있다. 여기서 그는 "세상에서 사해(四海)라고 일컫는 것은 다만 중국을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일 뿐, 천지 사이의 사해는 아닌 것이다"(지리부)라고 하면서, 아울러 "중국에서 사이(四夷)에 도달한다는 것도 억지 주장이다. 왜냐하면 세계 모든 나라가 한꺼번에 모일 수 없기 때문이다" (제국부)라고 하여 중국 중심의 지리적 중화사상을 과감히 탈피하였다. 또한 불랑기국(佛浪機國,Portugal) · 남번국(南番國, Holland) · 영길리국(永吉利國, England) · 대서국(大西國, Italy) 등 유럽 여러 나라를 대서양국(大西洋國)으로 분류하고, 동남아~인도양 연안의 삼불재(三佛齊, Palembang) · 고리대국(古俚大國, Calicut) · 홀로모사(忽魯謨斯, Hormus) 등의 소서양(小西洋) 제국도 아울러 소개하였다. 이수광은 이들 여러 나라의 풍속 · 의식주 · 항해술 · 무기 및 정치 제도 · 종교 · 인종의 모습 등을 매우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때로는 중국 고대의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 등에 소개된 황당무계한 전설까지도 그대로 채록하면서, 유교적 예의 도덕의 기준에서 화(華) · 이(夷)를 구분하는 등 아직까지 전통적인 지리 인식과 세계관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측면도 보여 준다.
이수광은 대서국을 마테오 리치의 출신국으로 소개하면서 리치가 중국에 들어와 저술한 《천주실의》(天主實義) 2권의 내용을, ① 천주가 천지를 창조하고 안양(安養)의 도를 주재한다는 것, ② 인혼(人魂)이 불멸하니 동물과 크게 다르다는 것, ③ 윤회육도(輪回六道)의 그릇됨을 논박한 것, ④ 천당과 지옥, 선악의 응보(應報)를 논한 것, ⑤ 인성(人性)은 본래 착하므로 천주의 뜻을 경봉(敬奉)해야 한다는 것 등으로 정리하여 소개하였다. 아울러 그는 교황의 불혼(不婚)과 택현(擇賢) 및 우의(友誼)를 소중히 여기는 서양국의 풍습 등에 대해 특별한 비평을 하지 않고 담담하게 기록함으로써, 천주교와 서양에 대한 개방적인 사고를 보여 주었다. 특히 천주교에 대해 이수광이 보여 준 객관적 기술과 개방적 태도는 이 익 (李潔, 1681~1763)을 거쳐 권철신 (權 哲 身 ,1736~1801) · 이가환(李家煥, 1742~1801) ·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등 근기남인(近畿南人)의 보유론적(補儒論的) 서학(西學) 수용의 길로 계승된 측면이 인정된다. 그리하여 그 자신은 비록 천주교를 신앙하지 않았지만 그의 8대 후손인 이윤하(李潤夏) 때부터 그의 집안에 천주교 신자가 생겨났다.
※ 참고문헌  《宣祖實錄》/ 《仁祖實錄》/ 《芝峰集》/ 《芝峰類說》/ 柳洪烈, 〈實學의 開拓者 芝峰 李睟光〉, 《韓國學》 20, 1979/ 韓永愚, 〈李睟光의 學問과 思想〉, 《韓國文化》 13, 1992/ 元載淵, 〈17~19세기 실학자의 서양 인식 검토〉, 《韓國史論》 38,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97. 〔元載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