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공예가. 세례명은 바오로. 호는 하라(賀羅) 1905년 1월 7일 충청남도 아산군 인주면 공세리(貢稅里)에서 이병무(李秉武)와 안동 김씨의 9남매 중 막내로 출생. 그의 맏형이 고약으로 유명한 이명래(李鳴來)이다. 어려서 공예에 조예가 깊던 공세리 성당 드비즈(E.Devise, 成一論) 신부의 영향을 받았으며, 13세 때 서울에 올라와 남대문상업학교(현 동성중 · 고등학교)에 진학하였고, 고희동(高羲東) 등이 주도하던 조선 서화 협회(朝鮮書畫協會)에서 서양화를 배웠다. 남대문상업학교를 마치고 베네딕도회 에카르트(A. Eckardt, 玉樂安) 신부의 주선으로 독일 유학을 준비하며, 원산 해성(海星)보통학교 교사로 일하였으나, 독일 유학이 여의치 않게 되자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1931년 3월 도쿄 우에노 미술학교(東京上野美術學校, 현 도쿄예술대학) 도안과를 졸업하고, 6월 서울에서 공예 도안 개인전을 개최하였으며 화신 백화점 광고부 주임을 맡았다. 1933년 이후 생활과 미술을 위하여 '낙랑파라' 라는 찻집을 경영하였고, 동물 사육장을 운영하기도 하였으며 이명래 고약집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1939년 9월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 중앙위원회 간사에 선임되었다. 광복 직후 1946년 2월 군정청 문교부 교화국 예술과의 고문으로 위촉되어 서울대학교 예술대학의 설립에 관여하였으며, 그 해 10월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부교수로 임용된 이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 미술과 교수로 1970년 2월 정년까지 재직하였고, 이후 명예 교수로 있었다. 한국 전쟁 중에는 종군 화가 단장을 역임한 바 있다. 국전의 심사 위원과 초대 작가로 활동하였으며, 국전과 대한 민국 상공 미술전람회 등을 비롯한 많은 미술 공모전의 심사를 맡았다. 한국 디자인 센터 소장(1966)과 국제 기능 올림픽 대회한국위원회 공예 분과 위원장(1966), 한국 디자인 포장 센터 이사장(1969)을 역임하였으며, 1974년에 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서울시 문화 위원 · 한국 미술 협회 부이사장 · 서울 가톨릭 미술 협회장 등을 맡기도 하였다. 1983년 그의 호를 따서 하라 석미술원(石美術院)을 설립하였다. 서울시 문화상(1955)과 문화 훈장 대통령상(1962), , 대한 민국 문화 예술상 대통령상(1969) 예술원상(1975) 등을 수상한 바 있다. 교회 활동으로는 성모 성신 대회 중앙 위원(1954), 한국 가톨릭 연감 편집위원(1955), 평신도 사도직 서울교구 추진 위원(1956) 등을 역임하고 후암동 본당 총회장을 오래 맡았으며, 한강 본당과 청담동 본당의 고문으로도 활동하였다. 1986년 10월 7일 강남 성모병원에서 82세로 선종하여,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산북리 청량리 본당 천주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이순석은 도안 · 공예 · 상업 미술 · 응용 미술 · 종교 미술 등 여러 영역에 3천 점이 넘는 작품을 창작하였는데, 특히 1천여 점의 석조 예술품을 남겼다. 그 가운데에서도 종교적인 주제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성모자상〉 · 〈성가족상〉 · 〈성인상〉 · 〈수녀상〉 등의 인물상과 〈십자가〉 · 〈제대〉 · 〈성수반〉 · 〈성수대〉 등 교회 용품, 〈성모 승천〉 · 〈오소서 성심이여〉 · 〈보혈〉 · <십자가의 길〉 등의 종교적 주제의 조형물이 있다.
※ 참고문헌 李順石, "老教授와 캠퍼스와 學生", 〈京鄉新聞〉 1974년 3월 12회 연재/ 《韓國美術史一工藝》, 국립현대미술관, 1975 《賀羅 李順石 作品集》,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 미술학과 동문회, 1993. 〔崔起榮〕
이순석 李順石(1905~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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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