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성 李順成(1895~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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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신부. 세례명은 안드레아. 1895년 강원도 이천군 산내면 용포리 대곡동에서 전주에 본관을 둔 이명룡(李明龍)의 7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1923년 5월 20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를 졸업하여 사제 서품을 받은 뒤, 경기도 행주(현 수색) 본당 4대 주임으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6년 5월 황해도 해주 본당 2대 주임으로 임명되어 본당에서는 주일마다 특별 강론을, 공소에서는 춘추 판공 성사 순회 때 강론을 행하고 교리를 강의하는 등 신자들의 신앙심을 부흥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1928년 황해도 은율 본당 6대 주임으로 전임되어 이듬해 4월 가정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해성야학원을 개설하였고, 1931년 8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소속 수녀들이 파견되어 학교와 유치원이 크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순성 신부는 사재를 들여 성당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 1934년 안성(현 구포동)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여 냉담자 회두 · 외교인 입교 권면 · 상가 방문 등을 활발하게 전개하였고, 오늘날의 레지오 마리애나 연령회와 비슷한 '예수 성심 전교회' 를 창설하였다. 하지만 1935년 폐병으로 태을리에 있는 동생 이근성(李根成, 야고보) 집으로 요양을 갔다가 이듬해 황해도 정봉 본당 3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이순성 신부는 병약한 체질에도 정열적으로 유창하게 강론을 잘하여 신자들에게 많은 감화를 주었다. 광복 후 공산 정권의 반종교 정책이 점점 강화되면서 이순성 신부가 성당을 인민위원회에 양도하라는 공산주의자들의 요구를 거절하자, 공산주의자들은 사제관에서 나온 공기총 총알들과 일제 시대의 낡은 전투모를 테러 행위 및 일제의 식민지 잔재를 버리지 못한 반동분자의 물적 증거들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순성 신부는 1950년 7월 5일 오전 10시경 신계읍 정치 보위부원 2명에 의하여 트럭에 태워져 사라진 이후 행방 불명되었다. (→ 구포동 본당 ; 은율 본당 ; 정봉 본당 ; 해주 본당)
※ 참고문헌  《교회와 역사》 98호(1983. 8)/ 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편, 《황해도 천주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안성 천주교회사 편찬위원회 편, 《천주교 안성 교회 발전사 자료》 1집(타자본), 1979.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