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숭녕 李崇寧(1908~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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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학자. 세례명은 토마스. 호는 심악(心岳). 본관은 연안(延安). 1908년 6월 7일 서울에서 이병관(李炳觀)의 셋째 아들로 출생하여, 1921년 3월 경성공립고등보통학교 부속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제2 공립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등학교)에 진학하여 1926년 3월에 졸업하였다. 1933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어 문학과를 졸업하고 그 해 5월부터 평양사범학교 교유(敎諭)로 재직하다가, 해방 직후 상경하여 1945년 10월 경성대학 예과 교수에 취임하고, 이어 11월에 경성대학 법문학부 조교수를 겸임하였다. 1946년 9월 학제 개편으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 국문학과 교수가 되어 1973년 8월 정년으로 퇴직할 때까지 봉직하였고, 1974년부터 명예 교수로 추대되었다. 그간 문리과대학 예과부장(1947~1949)과 동아 문화 연구소장(1966~1970), 그리고 교양과정부장(1956~1957), 대학원 원장(1971~1973)을 역임한 바 있다. 1973년부터 한양대학교 교수로 문리과대학장과 국학 연구원 원장을 역임하였으며, 1980년 이후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부원장 겸 대학원 원장, 백제 문화 개발 연구원 원장, 문화재 위원장, 한국 산악회장 등을 지냈다. 또한 1954년부터 학술원 회원으로 재임하였으며 진단 학회(震檀學會)와 조선어문 연구회에서 활동하였고 국어학회 이사장과 회장을 역임하였다. 그 밖에 서울대학교 교수 협의회장, 방송 윤리위원회 위원장, 자연 보호 중앙 협의회장 등을 지냈고, 서울시 문화상(1956), 3 · 1 문화상(1962), 대한 민국 문화 포장(1962) , 국민 훈장 동백장(1970) · 모란장(1973), 5 · 16 민족 문화상(1984) 등을 수상하였다. 1994년 2월 2일 선종하여 경기도 파주군 조리면 뇌조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특히 그는 일찍부터 언어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국어를 연구한학자로 음운론 문법론 · 어휘의미론 · 국어학사 등 국어학 전 분야에 관한 130여 편의 논문과 연구 저술 20여권을 남겼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조선어 음운론 연구》 (朝鮮語音韻論研究, 1949), 《국어학 개설》(1954) , 《음운론 연구》(音韻論研究, 1955), 《국어학 논고》(國語學論致,1960), 《국어조어론 논고》(國語造語論玫, 1961), 《중세국어 문법》(1961) 《이숭녕 국어학 선집》(1988) 등이 있고, 《나의 인생관》(1971), 《산 좋아 산을 타니》(1974), 《한국의 전통적 자연관》(1985) 등의 저술도 있다.
교회 활동으로는 청량리 본당의 총회장을 오래 지냈다. 1955년 청량리 본당 창설 당시 그는 신자가 아니었으나 부인 이종희(李鍾姬, 글라라)가 신자였기 때문에 사제관이 마련될 때까지 6개월 동안 그의 집에서 이종순(李鍾淳, 라우렌시오) 신부가 거처한 적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1955년 12월 24일 이종순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고 총회장으로 본당 일에 앞장서게 되었다. 1968년에는 서울대교구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 부회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 참고문헌  李崇寧, 《大學街의 把守兵》, 民衆書館, 1969/ ―, 《나의 人生觀 : 山 길을 걷노라면》, 徽文出版社, 1971/ 《李崇寧博士頌壽紀念論叢》, 乙酉文化社, 1968/ 《李崇寧博士 頌壽 記念論叢》, 乙酉文化社, 1968/ 《清凉里聖堂四半世紀》, 天主清涼里敎會, 1982/ 〈朝鮮日報〉 1994. 2. 3. 〔崔起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