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의 동쪽 끝에 위치한 중동의 국가. 그리스도교의 발생지이고 최초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설립되었던 곳. 공식 명칭은 이스라엘국(State of Israel)이며 다당제 의회 제도를 갖춘 민주주의 공화국이다. 북쪽은 레바논, 북동쪽은 시리아, 동쪽과 남동쪽은 요르단, 남서쪽은 이집트, 서쪽은 지중해와 접해 있다. 국교는 없고, 공용어로 히브리어와 아랍어를 사용한다. 총 인구는 6,100,000명 (2000)으로 4/5 이상이 유대인이며, 이 중 1/3은 매우 엄격하게 율법을 지키는 신자들이다. 또 이스라엘 내에 거주하는 아랍인은 전체 인구의 1/6 정도이다. 면적은 20,700k㎡이며, 수도는 예루살렘이다.
I . 의 미
〔의 미〕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은 세 가지로 쓰인다. 첫째, 이스라엘은 성조 야곱의 다른 이름이다. 히브리어로 '이스라엘' (יִשְׂרָאֵל)은 "하느님께서 싸우신다" 또는 "하느님께서 싸워 주시기를!"이라는 뜻이다. 야곱이 야뽁 강가에서 하느님이 보낸 사람과 겨루어 이겼다고 해서(창세 32, 29)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둘째, 이스라엘은 야곱의 자손들이 가나안에 정착한 뒤 세겜에서 맺은 열두 지파의 동맹체와 그들이 살던 땅 전체를 가리킨다. 즉,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민족 전체와 그들이 차지한 영토를 의미한다. 셋째, 솔로몬(기원전 972~933) 통치 직후 이스라엘 왕국은 남과 북으로 갈라지는데, 이때 북쪽 왕국을 남쪽의 유대 왕국과 구별하여 이스라엘이라 불렀다.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과 관련하여 언급되는 또 다른 이름이 '히브리' (עִברִי)이다. 성서에서 이 이름은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다. 첫째, 히브리는 이스라엘과 함께 하느님 백성을 가르키는 또 다른 종족 이름이다. 그래서, 히브리인과 이스라엘인을 동일시하며(출애 5, 1-3),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히브리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창세 14, 13). 히브리는 유대인들에게 명예로운 이름으로써(유딧 10, 12 ; 4마카 5, 2), 오늘날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도 히브리어로 불린다. 신약성서에서 히브리인은 헬레니즘에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한 유대인들을 가리키기도 하고(사도 6, 1) 유대인들을 이방인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사용한다(2고린 11, 22 ; 필립 3, 5). 둘째, 히브리는 노예처럼 사회적으로 낮은 신분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출애 2, 11 ; 21, 2 ; 신명 15, 12 ; 예레 34, 9.14). 기원전 2000년경의 고대 근동 문헌에 '하비루'(Habirû) 또는 '하피루' 라는 용어가 많이 언급되어 있다. 하비루는 노예, 천민, 용병처럼 소외된 집단이나 심지어 범법자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그런데, 이 하비루인들을 이집트에서 빠져나와 가나안을 정복한 성서의 히브리인들과 동일시할 수 있는지는 아직 논란 중이다.
〔성서 이외의 언급) 이스라엘이 언급된 가장 오래된 문헌은 이집트 왕 메렌프타(Merenptah, 기원전 1213~1203)의 승전 기념비이다. 이 승전비는 그가 재위 5년째에 이집트 서쪽에 위치한 리비아를 무찌른 전승을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이 비문의 마지막 부분에 언급되어 있다. "가나안은 참혹하게 약탈당했다. 아슈켈론은 포로가 되었다. 게제르는 붙잡혔다. 야노암은 파괴되었다. 이스라엘은 폐허가 되었고 씨가 말라 버렸다. 호르는 이집트 때문에 과부가 되었다." 아슈켈론과 게제르는 이집트에서 가나안 지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했던 도성 국가이다. 이 기념비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도 이집트가 점령했던 다른 도성 국가처럼 지배층이 있던 국가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씨가 말라 버렸다' 는 것은 지배층의 집안을 모두 죽였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적어도 기원전 1210년경에 이스라엘은 도성 국가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언급은 모압 전승비에 있다. 이 비석에 모압의 왕 메사(기원전 830)는 이스라엘의 왕 오므리(기원전886~875)가 모압을 오랫동안 천하게 여겼다고 기록했다. 이후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시리아의 기록에 나온다.
II . 성서에 언급된 역사
〔민족의 형성〕 이스라엘 민족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부족들은 기원전 2000~1550년에 등장한다. 이 시기에는 유목 민족들이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비옥한 땅에 정착하여 농업 생활을 하고자 했다. 그들 중에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인 이사악, 에사오, 야곱과 그의 열두 아들들이 있었고, 그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팔레스티나로, 후에는 이집트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성서와 근거 자료들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한 민족을 이루는 것은 좀 더 시간이 경과한 후에 가능했을 것이다. 출애굽기에서 여호수아서까지에는, 야곱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오랫동안 살다가 모세의 인도를 받아 시나이 산으로 가서 독특한 민족을 이루며, 율법을 받은 경위와 한동안의 유랑 생활 끝에 팔레스티나를 점령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시기는 약 기원전 13세기 말 정도로 추정되며, 그 후에 이스라엘 민족이 그 땅에 정착하였고, 여러 세기가 지나면서 점차 그들의 땅이 되었다.
출애급과 팔레스티나 땅의 점령과 시대의 긴박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 여러 부족들이 서로 단결함으로써 나누어져 있었던 이스라엘이 한 민족을 이루게 된다.
〔초기 체제와 지파 동맹〕 이스라엘은 팔레스티나에서 정착한 이후 왕정 시대 이전까지 약 200년 동안 허술하게 조직화된 지파 체계를 유지했으며, 이 기간 동안 중앙 정부나 국가 체제 같은 것은 없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은 강인한 정신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것으로 주변의 시련과 압력에 대항할 수 있었고, 상당한 기간 동안 자신들의 지파 체제를 유지해 나갔다. 그리고 이 지파들은 서로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공동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방어하였다. 이때 야훼 하느님이 지목한 "판관"이 등장하여 어려움에서 이스라엘을 구했다. 나아가 이스라엘이 통일성을 지닐 수 있었던 요인들은 여러 부족들로 구성되었지만 통혼(通婚) 등으로 친족 관계를 유지하고, 공동의 운명 공동체이면서 동일한 야훼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 이스라엘은 오직 상벌 규정을 통하여 지파 간의평화가 유지되었고, 서로 단합된 행동을 취하였다. 지파사회는 족장을 중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계층의 구분 없이 평등하였다. 분쟁이 발생하면 각 씨족의 장로들이 전통적인 절차에 따라서 판결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12세기 말경 실로에 계약의 궤가 안치되자 그곳을 중심으로 각 지파 간의 분쟁과 상호 이해에 대한 문제들을 그곳에 모두 모여서 조정하였고, 또한 야훼 신앙을 확인하였다.
〔초기 왕정 시대〕 사울 왕국 : 기원전 11세기 후반 이스라엘은 호전적인 불레셋인들의 침략으로 지파 동맹 체제가 붕괴되었다. 아울러 대부분의 이스라엘 땅과 이스라엘 지파 동맹의 구심점으로 중대한 역할을 한 중앙 성소와 계약의 궤를 빼앗겼다. 이러한 혼란과 위기의 상황에서, 사무엘은 이스라엘 민족의 구심점이자 정신적 지주로써 불레셋인들과 싸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었다. 그들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더 이상 지파 동맹 체제로는 자신들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지도력과 강력한 힘을 지닌 중앙 권력을 세우게 되었다.
비교적 다른 지파들로부터 질시를 받고 있지 않았던 베냐민 지파 출신인 사울(기원전 1030~1010)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로써 이스라엘 왕정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과 그의 통치에 대해서는 성서(1사무 8-12장)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사울은 외형상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인물이었지만, 완전한 중앙 통솔권을 지니지 못했으며, 왕궁이나 통일 국가의 절대 군주로서의 어떠한 관료 체제도 가지지 못했다. 다만 그는 지파들의 군대를 실질적으로 통솔하는 전권을 소유한 '군대의 왕'이었다.
사울은 불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빼앗긴 영토를 다시 회복하였다(1사무 13-14장). 왕이 된 후 첫 번째 전투에서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훌륭한 지략과 용기로 게바에서 불레셋인들을 격퇴하고, 후에는 팔레스티나에서 그들을 쫓아냈다. 이로써 사울의 입지가 강화되었지만, 해안 지방으로 밀려난 불레셋인들의 계속된 침략과 동부의 암몬인들, 그리고 남쪽의 아말렉인들과의 전쟁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전 생애에 걸친 전쟁으로 사울은 정신적 · 육체적 권태감에 빠져들었고, 급기야 사무엘과 다툰다. 사무엘은 사울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독자적인 행동을 한다고 질타하면서, 하느님의 총애를 잃었다고 선언한다(1사무 13-15장). 사울이 독단과 다윗에 대한 열등감에 빠져 있을 때, 또 다시 불레셋인들이 침공해 왔다. 길보아에서의 전쟁으로 사울의 세아들은 전사하고, 사울은 중상을 입고 자살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티나 지역과 요르단 동편 지역까지 빼앗겼다.
다윗 왕국 : 사울이 죽자, 산악 지방 등에서 저항하던 이스라엘은 새로운 지도자를 필요로 했다. 이 때 사울의 아들 중 생존자인 이스보셋이 왕위 계승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호소하면서, 친척 아브넬과 몇몇 추종자들에 의해 마나하임에서 왕으로 등극하였다(2사무 2장). 이와 동시에 다윗은 같은 유다 지파 사람들의 지지와 불레셋인들의 동의로 헤브론에서 왕으로 등극하였다(2사무 2장). 다윗의 영향력은 유다 지파 외에도 여러 지파들을 포함한 지역에도 미쳤다(1사무 27, 10 ; 30, 14 : 판관 1, 1-21). 이스라엘의 통치권을 주장하던 이스보셋은 자신의 추종자이자 친척인 아브넬과의 갈등 등으로 대부분의 지지자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마침내는 부하에게 살해당하였다(2사무 3-4장). 이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다의 헤브론으로 다윗을 찾아와, 그를 자신들의 진정한 왕, 즉 '온이스라엘의 왕' 으로 인정하였다.
다윗(기원전 1010~970)은 이스라엘의 결속을 위해서 기원전 1000년경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았다. 예루살렘은 지리적으로 온 이스라엘의 생활 중심지로 적합한 곳이었다. 다윗은 하느님 현존의 상징이자 지파 연합의 오래된 상징인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와 안치함으로써 이스라엘의 결속력을 더 확고히 하였다. 다윗은 통치 기간 중에 결속력을 바탕으로 국력 강화에 힘을 기울임으로써 이스라엘을 주변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다. 다윗은 팔레스티나에 산재해 있던 여러 도시 국가들을 점령하여 팔레스티나 전체를 지배하게 하였으며, 그 지역에 살고 있었던 가나안 민족들도 이스라엘에 흡수시켰다. 다윗 시대의 이스라엘의 영토는 팔레스티나의 전 지역, 즉 동부와 서부, 사막에서 바다까지 포함하였고, 남부의 국경선은 시나이 사막을 가로질러 아카바 만으로부터 이집트 강 하구의 지중해까지 이르렀다. 다윗이 정복 사업을 통해 광대한 지역을 소유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개인적인 능력과 함께 당시 주변 세계에는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강대한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재위 말년에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예루살렘을 버리고 요르단 동쪽으로 피신하였다가, 충성스러운 부하인 요압이 압살롬을 죽이고 그의 군대를 격퇴시킨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2사무 13-19장). 이 와중에 또 다른 반란이 터졌는데, 이 반란의 원인은 지역적인 불평에서 야기된 것이었다.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과 연루된 문제를 해결하면서 압살롬의 추종자와 반란에 깊이 연루된 자들을 선처해 주었다. 이러한 다윗의 처사는 북부 지파 사람들에게 남부 지파에 대한 편애로 받아들여졌고, 이에 베냐민 지파 출신인 세바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반란은 그리 큰 규모가 아니었고, 곧 다윗의 군대에 의해서 진압되고 주동자는 암살당하였다(2사무 20장). 그런데 왕위 계승권을 두고 아도니야와 솔로몬이 대립하였다. 이 경쟁에서 승리한 솔로몬은 사독에 의해서 기름 부음을 받고 군중들의 환호에 속에서 왕으로 옹립되었다(1열왕 1장).
솔로몬 왕국 : 솔로몬은 왕이 된 후 즉시 후에 있을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아도니야와 요압을 죽이고 제사장 아비아달을 멀리 추방하였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내부 정치는 안정되었으며, 또한 외부에도 별로 대적할 만한 적국이 없었다. 이러한 내외부의 정치적인 안정 속에서 솔로몬은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다(1열왕 1-11장).
솔로몬(기원전 972~933)은 다윗이 이루어 놓은 대영토를 굳건히 지키기 위해서, 우선 도성과 외곽의 성들을 보수하고 공고히 했으며, 병거를 도입함으로써 군대를 강화시켰다(1열왕 4, 26 ; 9, 15-17). 그리고 솔로몬은 주변 국가들과 협정을 체결했으며, 이 협정은 그들과의 혼인 정책을 통해서 보다 더 확고해졌다(1열왕 11, 1-2). 솔로몬은 산업과 교역을 통한 경제적인 부를 얻는데 많은 관심을 두었으며,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물질적인 풍요와 경제적인 번영을 이루는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스라엘 국민들도 부유해졌으며, 도시들이 발달하였고, 국가 내부의 질서도 잘 유지되었다. 그리고 솔로몬은 건축 사업에 많은 힘을 기울였는데, 특히 주목할 것은 성전의 건축(기원전 959~953)과 봉헌이었다(1열왕 8장). 솔로몬 시대에는 문화적인 면도 큰 발전이 있었다. 문자가 널리 사용됨으로써 위대한 조상들을 찬양하는 서사시와 같은 문학 양식이 등장했고, 음악과 시편 영창(永唱)이 성행했다. 아울러 지혜 문학도 이 시대부터 성행하였다.
솔로몬은 대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 많은 재정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재정은 산업의 확충과 다른 나라와의 무역을 통해서 생긴 수익으로 충당했다. 하지만 많은 부분은 국민들에게서 거두어들인 세금으로 보충하였다. 그는 세금을 효율적으로 부과하고 국가의 수입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제국을 열두 개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고 각 구역에 지방 장관을 두었다. 이러한 행정 구역의 개편에는 국가의 수입 증대 외에도 가나안 주민들을 국가의 조직 안에 철저히 귀속시키려는 의도와 각 지파들 내부의 결속을 약화시켜서 중앙 권력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각 행정 구역은 일 년에 한 달씩 궁중의 식량을 책임져야 했는데(1열왕 9장), 이는 사람들에게 큰 경제적 부담과 심적인 불만을 갖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건설 사업에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강제로 동원해 노역을 시켰는데, 이 점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처지가 노예와 다를 바 없다는 불만을 갖게 하였다. 이러한 백성들의 불만과 북부 지파 사람들과 다윗 가문의 뿌리 깊은 갈등은 결국 솔로몬이 죽고 난 후 이스라엘을 분열시키는 결정적인 동기를 제공했다.
〔남북 분열 시대〕 솔로몬이 죽은 후 그의 아들 르호보암(기원전 933~916)이 예루살렘에서 왕으로 즉위하였다. 북쪽의 지파들은 그의 태도가 오만하고 자신들에게 부과된 세액과 강제 노역을 경감해 달라는 요구를 거절하자, 그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여로보암 1세 (기원전 933~911)를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이스라엘은 두 개의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분열은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약화를 가져왔고, 더 이상 이전의 다윗 제국과 같은 힘을 지니지도 그리고 그들의 조상이 이루어 놓은 영화와 영토를 유지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붕괴의 길로 가고 있을 때, 주변의 세력들은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결국 유대 왕국은 예전의 자기 지파 영지와 불레셋 평야의 변두리 지역(가드), 에시온게벨까지의 네게브 지방, 그리고 몇몇의 에돔 지방을 통치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은 예전의 자기 지파 영지와 북부 해안 평야에 산재해 있던 과거의 가나안족 도시들과 에스드라엘론 그리고 갈릴래아 호수의 동쪽에 있는 아람족 나라들의 몇몇 지방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전의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받았던 조공도 더 이상 받지 못하였고, 해안 지방과 요르단 동편의 교역 통로 확보가 어려워져 자유로운 통상이 힘들게 됨으로써 막대한 경제적인 손실을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두 나라는 서로의 국경을 확정하고, 그 사이에 있는 베냐민 지파의 영토를 얻고자 소규모의 전투를 계속하였다. 이러한 두 나라의 분쟁은 서로의 세력 약화만을 가져왔다.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은 국가 체제의 확립과 자신의 왕권을 확고히 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는 수도(首都)와 행정 기구 그리고 군사 체제 등을 구축하는 일이 시급했다. 따라서 그는 지파 체제와 관련이 없는 세겜을 수도로 정하여, 각 지파들의 불만을 줄이고 비이스라엘계 주민들을 포섭하고자 하였다(1열왕 12, 25). 그리고 베델에 야훼의 성소를 짓고 하느님을 상징하는 금송아지를 세웠다(1열왕 12, 12-33).
여로보암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생 왕국인 이스라엘의 왕권은 안정되지 못했다. 북이스라엘은 오므리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정치적인 불안정 속에 휘말렸다. 오므리 왕가에 의해 이스라엘은 마침내 내부적인 안정을 찾았고, 어느 정도 국력을 신장하고 번영을 이루었다. 오므리(기원전 886~875)는 수도를 사마리아로 옮기고, 다윗과 솔로몬의 정책을 답습하였다. 국내에서는 평화를 유지하고 유대 왕국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지만, 아람족에 대해서는 강경한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오므리가 죽고 그의 아들 아합(기원전 875~853)이 왕이 되자(1열왕 16, 28), 이세벨과의 혼인으로 생긴 종교적인 갈등이 커져 야훼 신앙을 지닌 이들과 갈등을 겪었다. 엘리야 예언자를 비롯한 야훼 신앙을 지닌 이들은 아합과 이세벨에게서 억압과 박해를 받았다(1열왕 18, 21). 아합이 아람족과 싸우다 죽자(1열왕 22, 1-40), 그의 아들 아하지야(기원전 853~852)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불의의 사고로 곧 죽었다(2열왕 1, 2). 그 후 아합의 다른 아들인 요람(기원전 852~841)이 왕이 되었지만, 그의 정책들은 거의 모두 실패하였다. 많은 부하들이 반감을 지니고 있던 상황에서 예언자 엘리사의 조종을 받은 예후(기원전 841~814)가 요람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 그는 왕이 된 후 이세벨을 죽이고, 아합의 가족과 왕실의 친인척을 모두 죽이는 대학살을 저질렀다. 뿐만 아니라 바알을 숭배하는 자들도 모조리 죽였고, 바알 신전과 그 부속물들을 모조리 파괴하였다. 예후에 의해서 자행된 이 극단적인 행위들과 요람을 죽일 때 유대 왕국의 아하지야(기원전 841)까지 죽임으로써 유대 왕국과의 평화 동맹이 깨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스라엘에서 오므리 왕가가 붕괴되는 혼란을 겪을 동안, 유대 왕국에서도 이스라엘과 비슷한 어려움에 직면하였다(2열왕 9, 27). 여호사밧(기원전 870~846)은 그의 아버지 아사(기원전 912~871)처럼 이교도의 풍습을 철저하게 금하고, 오직 야훼 신앙만을 지키고자 노력하였다(1열왕 22, 43). 그러나 그의 아들 여호람(기원전 848~841)이 왕이 되자 상황은 급변하였다. 그 아내인 아달리야(기원전 841~835)가 예루살렘에 바알 제의를 도입하였다. 여호람이 죽고 그의 아들 아하지야도 예후의 반란 때 같이 죽임을 당하자, 아달리야가 주변의 왕족들을 대부분 죽이고 왕권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제사장 여호야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아하지야의 아들이었던 요아스(기원전 835~796)가 왕으로 옹립되었다.
이스라엘의 예후는 바알 제의를 철폐하였지만, 그 외의 토착화된 이교 신앙은 그대로 성행하였다. 그러나 주변 국가와의 동맹이 깨어짐으로 막대한 경제적인 손실과 엄청난 군사적 부담을 안게 되었다. 이때, 다마스커스에서 하자엘(Hazael)이 왕권을 장악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이스라엘을 침공했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은 남쪽으로는 아르논 강의 모압 국경까지와 요르단 동편 전 지역을 상실했다. 예후의 아들인 여호아하즈(기원전 820~803) 시대에는 상황이 더 나빠져서, 아합과 아람족에 의해서 에스드라엘론과 해변의 모든 영토 그리고 갈릴래아의 영토까지 상실하고 시리아의 보호령이 되었다(2열왕 13, 3). 이 시기에 유대 왕국은 하자엘에게 공물을 바쳐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요아스가 제사장들의 지나친 관습에 반대하고, 이교에 대해서 어느 정도 관대한
태도를 취하자 반대자들에 의해서 암살당했고 그의 아들 아마지야(기원전811~782)가 왕이 되었다.
기원전 8세기에 이스라엘과 유대 왕국은 당시 주변 세력들의 약화와 유능한 통치자가 나타나 다시 한번 융성기를 맞았다. 이 당시 아시리아가 세력을 확장하였으나 곧 내분으로 약화되었다. 이때 이스라엘에서 왕이 된 여호아스(기원전 803~787)는 부왕이 상실한 모든 성과 읍을 수복하였고(2열왕 13, 25), 유대 왕국과의 전쟁을 통해 예루살렘을 정복하였으며, 아마지야를 생포하였다. 그는 곧 풀려났지만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인 우찌야(기원전 781~740)가 왕으로 옹립되었다.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기원전 787~747) 때에 보다 더 융성해졌고, 유대 왕국도 우찌야 이후 번영을 이루었다. 여로보암 2세는 이스라엘 역사상에서 가장 뛰어난 무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솔로몬 시대의 영토였던 하맛 어귀까지 장악함으로써(2열왕 14, 25 ; 1열왕 8, 65) 모압족과 압몬족을 철저하게 제압하였다. 그리고 우찌야도 예루살렘의 성벽을 보수하고, 군대를 재편하는 동시에 군장비를 개선하고 새로운 장비를 도입하였다(2역대 26, 9-15). 그는 에돔족을 지배했고, 서북 아라비아 부족들을 공격함으로써 교역 통로를 확보하여 남방과 교역을 하였다. 그리고 네게브 지방과 남부 사막 지대도 장악하여 대상(隊商) 통로들을 보호하였다. 뿐만 아니라 우찌야는 국경선을 해안 평야 깊숙이 확장하여 불레셋의 성들을 정복하였다. 이 시기의 이스라엘과 유대 왕국의 영토를 합치면 솔로몬의 통치 시기와 거의 같았다. 영토의 면적뿐만 아니라, 두 나라가 주요 교역 통로를 확보하고 있었기에 무역과 상업 그리고 교역상들로부터 받은 통행료 등으로 경제적으로 많은 부를 확보하였다.
〔위기와 멸망〕 북이스라엘 왕국 : 여로보암 2세 재임 초기에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기원전 747~727)가 아시리아의 왕이 되었다. 그는 아시리아의 세력을 확장하여 카스피 해 남쪽의 데마벤드 산악 지방까지 차지하였다. 기원전 738년경에는 팔레스티나의 대부분 국가들을 속국으로 만들면서 대제국을 이루었다. 이때 이스라엘은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여로보암 2세가 죽은 후 10년 동안 왕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으며, 그중에서 세 번은 폭력으로 왕위가 찬탈당했다. 므나헴(기원전 746~737)은 아시리아에 공물을 바쳐 왕위를 유지하였으나, 그의 아들 브가히야(기원전 736~735)는 왕이 된 지 얼마 뒤에 베가에 의해 암살당했다(2열왕 15, 8-28). 베가(기원전735~732)는 왕이 된 후 반아시리아 연합 세력의 중심이되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아람족과 연합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유지하던 유대 왕국과 전쟁을 하였고(2열왕 15, 37), 예루살렘을 공격하였다(2열왕 16, 5).
스스로 방어할 수가 없게 된 아하즈(기원전 735~716?)는 아시리아의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에게 원조를 청하였다.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는 이스라엘과 불레셋 대부분의 도시를 점령하고 주민들 상당수를 포로로 끌고갔으며(2열왕 15, 29), 수많은 도시들을 파괴하였다. 이때 호세아(기원전 732~724)가 베가를 죽이고 항복하여 공물을 바침으로써 이스라엘이 존속될 수 있었다. 그러나 호세아는 샬마네세르 5세(기원전 726~722)가 아시리아의 왕이 되자 이집트와 동맹을 맺고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이에 샬마네세르 5세는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도성인 사마리아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을 모두 점령하고 호세아를 붙잡았다. 사마리아 성은 그 후에도 2년 이상 버티다가 기원전 722년에 함락되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분열된 이후 약 200년 만에 완전히 멸망하였다.
유대 왕정 시대 : 유대 왕국의 아하즈는 반아시리아 세력에 동참하지 않았고, 조공을 바침으로써 공격을 면할 수 있었다. 아울러 예루살렘의 성전에 아시리아의 국가 신(神)을 위한 제단을 만듦으로써 외향적으로는 국가가 존속할 수 있었다. 이 당시 멸망한 이스라엘의 많은 유민들이 유대 왕국으로 들어오면서 그들의 전통도 들어왔다. 유다 지파와 이스라엘 유민들은 잘 융화하였고, 따라서 모두 같은 이스라엘 민족임을 자각하였다.
유대 왕국은 아하즈의 통치 기간과 그의 아들 히즈키야(기원전 716~687)의 통치 초기에 아시리아의 속국으로서 충성을 바쳤다. 그러나 아시리아의 사르곤 2세(기원전 721~705)가 죽고, 그의 아들 산헤립(기원전 704~681)의 왕위 계승 문제로 내부적인 갈등이 생기면서 세력이 약해지는 느낌이 들자, 히즈키야는 아시리아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는 조공을 더 이상 바치지 않았고, 이집트와 동맹을 맺었으며 팔레스티나와 시리아 지역의 부족들과 연합하였다. 그러자 산헤립은 이 반아시리아 세력을 분쇄하기 위해서 쳐들어왔고, 예루살렘을 제외한 모든 도시들이 파괴되었다(이사 1, 4-9). 히즈키야는 산헤립에게 항복하고, 엄청난 양의 조공과 선물, 그리고 몇몇 딸들도 바쳐야 했다. 히즈키야의 아들 므나쎄(기원전 687~642)가 왕이 된 후, 유대 왕국은 아시리아에 완전히 굴복하여 겨우 자신들의 운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므나쎄가 통치하는 시기에 아시리아는 최절정기였고, 산헤립의 아들인 에사르하돈(기원전 680~669)은 이집트를 여러 번 정복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고 아슈르바니팔(기원전 668~630)이 왕위를 계승하자, 그의 동생이 폭등을 일으키는 등 내부적인 혼란으로 급속하게 파멸의 길로 나아갔다. 이때 유대 왕국에서는 아몬(기원전 642~640)이 왕위에 오르나 반아시리아파에 의해 살해당하고, 요시야(기원전 640~609)가 왕으로 추대되었다(2열왕 21, 1). 요시야는 이스라엘에 잠시나마 다시 한 번 번영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아시리아와 이방인들의 종교적인 상징들을 철거시켰고(2열왕 23, 4), 이전 유대 왕국의 땅을 회복하고 북이스라엘의 이전 영토 대부분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이집트의 왕 느고(기원전 610~595)와 영토 분쟁으로 전쟁을 하였고, 이 전쟁 중에 그가 죽자 이집트는 유대 왕국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이후 여호아하즈(기원전 609) 가 왕이 되었으나, 이집트의 왕에 의해 요시아의 다른 아들인 여호야킴(기원전 609~598)이 왕이 되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주도권은 얼마 가지 못했고, 바빌론이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여호야킴은 바빌론에 충성하였으나 조공을 바치지 않자(2열왕 24, 1), 바빌론의 느부갓네살(기원전 604~562)이 예루살렘으로 쳐들어 왔다. 그러나 이때는 여호야킴이 죽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기원전 598~597)이 왕이 된 후였기에, 예루살렘은 무사할 수 있었다. 여호야긴은 항복하여 포로로 잡혀갔고, 대신 시드키야(기원전 597~587)가 왕으로 봉해졌다. 시드키야는 처음에는 봉신으로서의 의무를 다했으나, 후에는 다른 조공을 바치는 국가들과 동맹을 맺고, 이집트의 도움을 받아 바빌론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러나 결국 바빌론의 침공에 빌미를 제공했을 뿐이다. 바빌론의 침공에 대항하여 예루살렘은 1년 반이나 버티었으나, 결국 기원전 587년 여름에 함락되었다.
〔바빌론 유배와 페르시아 시대〕 바빌론 유배(기원전 587~539) : 바빌론 제국은 왕족과 귀족, 장인들, 그 밖의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끌고 갔다. 그러나 기원전 561년 바빌론의 임금 에윌므로닥은 유대 왕국의 왕이었던 여호야긴을 풀어 주고 "그와 함께 바빌론에 있는 다른 임금들의 자리보다 더 높은 곳에 그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2열왕 25, 28). 이는 인도주의적 관용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바빌론 유배동안 왕족 이외의 다른 유배자들은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않았다. 또 종교나 출신 때문에 다른 민족들과 비교해 불이익을 당하지도 않았으며, 시골만이 아니라 바빌론과 다른 행정 중심지에도 이주하였다. 유배자들은 자기 재산(예레 29, 5)은 물론 노예(에즈
2. 65)까지 두고 있었으며, 그들 중에는 부자들이나 유력자들도 있었다(에즈 1, 6 ; 2, 68-69).
이주민들은 유배의 땅에서 자신들의 종교를 계속 믿을 수 있었다. 물론 혼합주의 경향이 있었지만, 유대인들은 강력한 유일신 신앙을 유지하였다. 그들은 할례 · 정결 예식 · 안식일을 철저히 준수했으며, 제사를 지내지는 못했지만 일정한 장소에 모여 기도와 찬미를 드리고 율법을 낭독하고 해석하였다. 이 모임 장소가 유대 회당(συνα-γωγή)이다. 이 시기에 대표적인 예언자는 에제키엘과 제2 이사야였다.
페르시아 시대(기원전 539~331) : 페르시아 왕국의 왕고레스(기원전 551~529)는 기원전 539년 바빌론을 점령하였다. 그는 이듬해에 바빌론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모든 유대인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칙령을 반포하였다(2역대 36, 22-23 ; 에즈 1, 1-4).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은 제사 제도를 다시 부활시키고 성전 재건에 착수하였다. 마침내 기원전 515년 성전 건축은 마무리되고 예루살렘 성전의 예배가 재개되었다(에즈 5-6장). 그 뒤 에즈라는 종교 제도 · 전례 · 윤리와 관련된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기원전 445년경(느헤 1-2장) 유대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예루살렘에 온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도성의 성벽을 다시 쌓고 경제를 부흥시키며 전례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시대에 특기할 만한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히즈키야 시기에 유대인들에게 알려졌던 아람어가 이 시대에 공용어로 자리잡았다(2열왕 18, 26). 둘째, 정치적으로 페르시아의 속주였지만 유대인 공동체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민족의 명맥을 유지하는 일종의 작은 성전 국가였다. 셋째, 종교적으로는 성전 예배와 율법 전수를 강조하며, 민족주의적 전통과 신분을 확고히 다졌다. 넷째, 이 시대의 유대인 공동체는 북쪽의 사마리아인들과 앞으로 수세기 동안 지속될 긴장과 갈등 관계에 들어섰다. 다섯째, 미쉬나와 탈무드에서 '대회당' (Great Syna-gogue)이라고 불리는 정치 · 종교적 기구가 유대인 공동체를 통제하였다. 마지막으로 유대인 공동체는 외부의 종교와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헬레니즘 시대와 하스모네 왕국〕 헬레니즘 시대 : 그리스의 알렉산드로스 왕(기원전 356~323)은 기원전 332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기원전 336~323)의 군대를 대파하고 시리아로 진군하였다. 이어 이스라엘 땅으로쳐 내려왔고,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은 자진해서 알렉산드로스에게 충성을 다짐하였다. 그는 기원전 331년는 이집트를 점령하였으며, 이듬해에는 페르시아 제국 전체 를 차지하였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열병으로 요절하자, 그의 영토를 네 명의 장군들이 기원전 315년에 나누어 맡았다. 이스라엘 땅은 기원전 315~200년까지 프톨레메우스 왕조가 지배하였다. 프톨레메우스 2세(기원전 282~246)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대 원로들에게 그리스어역 성서, 즉 칠십인역 성서를 만들라고 명령하였다.
기원전 198년 안티오쿠스 3세 왕(기원전 223~187)은 파네아스에서 프톨레메우스 5세(기원전204~180)의 군대를 물리치고 팔레스티나의 주도권을 차지하였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호의적인 정책을 폈다. 그는 토라를 유대인들의 국법으로 인정하고, 내정에 관한 것은 유대인에게 자치권을 주었다.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완전 면세의 혜택을 주었으며, 예루살렘 도성과 성전의 재건을 위한 재정적 후원도 넉넉하게 해 주었다. 하지만, 안티오쿠스 4세(기원전 175~164)는 왕국 전체에 그리스 문화와 종교 · 제도를 강압적으로 이식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가장 큰 장애물로 유대교를 지목한 안티오쿠스 4세는 기원전 167년 아폴로니우스를 보내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그는 도성의 성벽을 허물었고, '아크라' 라는 성채에 새 요새를 짓고 대규모 병사들을 주둔시켰다. 그는 유대인들이 "파멸의 우상"(1마카 1, 54)이라고 부른 제우스상을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 위에 세우고, 부정한 짐승인 돼지를 제물로 바치게 하였다. 이를 거부한 이들은 매맞아 죽거나(2마카 6장), 고문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2마카 7장). 또한, 히브리어 성서의 수사본이 불태워졌으며, 할
례와 안식일 준수, 축제 거행이 금지되었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은 격분하였고, 독립 전쟁을 일으켰다.
독립 전쟁과 하스모네 왕조 시대 : 헬레니즘의 강요로 일어난 반발은 마따디아와 그의 다섯 아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기원전 166년 마따디아가 죽고 그의 아들 유다(기원전 166~160)가 군대의 지휘관이 되어 시리아군과 대적하였다. 유다는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아크라 요새를 제외한 도성 전체를 장악하였다. 기원전 164년 기슬레우월(음력 11월) 25일에 예루살렘을 되찾고 성전을 정화하였다. 그는 제우스에게 바친 제단을 비롯한 모든 이교적인 시설과 기물들을 성전에서 치웠다. 그리고 새 제단을 바치고 복구된 성전을 봉헌하였다. 뒤를 이은 요나단(기원전 160~143)은 본래 유대인들이 차지했던 땅을 되찾고 정치적인 독립을 쟁취하는 데 주력하였다. 시리아의 알렉산더 발라스 왕(기원전 150~145)은 요나단에게 대사제직을 부여하고 코엘레-시리아의 영주와 지방 장관으로 임명하였다. 한편 요나단은 스파르타인들뿐 아니라 로마인들과도 두터운 친분 관계를 유지하여 자신의 팔레스티나 통치를 국제적으로 확약받았다. 그가 살해된 후 뒤를 이은 시몬(기원전 143~134)은 디메트리오스 2세(기원전 145~138, 129~125)를 지지하였다. 이에 디메트리오스 2세는 유대인들의 공동체에 완전 면세의 특혜를 베풀었으며, 이는 곧 유대인들의 정치적 독립을 의미하였다 (1마카 13, 41).
시몬에게서 비롯된 하스모네 왕조는 이후 약 100년간 통치하였다. 유대의 정치 · 종교 지도자였던 시몬이 사위에 의해 살해된 후 뒤를 이은 요한 히르카누스 1세(기원전 134~104)는 스스로 임금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영토의 확장과 나라의 안정에 힘쓴 결과, 그의 집권 시기에 유대인들은 남북이 분단된 이래 가장 넓은 지역과 큰 국력을 회복하였다. 그의 아들 아리스토불루스 1세(기원전 104~103)는 대사제 중심의 통치 구조를 왕국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두래아인들의 영토를 차지하여, 그들에게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도록 하였다. 뒤를 이은 알렉산데르 얀나이우스(기원전 103~76)는 종교적인 문제로 바리사이파를 비롯한 여러 파당과 반목하였다. 하지만, 영토의 확장에 주력하여 팔레스티나 전체, 즉 유대와 갈릴래아, 사마리아와 요르단 동쪽 지역을 통치하였다. 살로메 알렉산드리아(기원전 76~67)는 바리사이파들과의 반목을 청산하고 그를 후원해 주었다.
Ⅲ . 로마 제국의 지배와 교회
〔로마 제국 시대〕 기원전 64년 로마 제국의 폼페이우스는 시리아를 로마 제국의 속주로 만들었다. 그리고 팔레스티나를 시리아 속주에 편입시켰다. 이듬해 폼페이우스는 예루살렘을 점령하였고, 이후 팔레스티나는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식민지가 되었다. 히르카누스 2세(기원전 63~40)는 예루살렘에서 대사제로 제한된 권한을 행사할뿐이었다. 기원전 47년 로마의 카이사르(Julius Caesar, 기원전 100~44)가 안티파테르를 유다의 행정관(Procurator)으로 임명하자, 그는 자신의 아들 헤로데를 갈릴래아의 영주로 내세웠다. 하스모네 왕조의 마지막 왕인 안티고누스(기원전 40~37)가 유대인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으나, 기원전 37년 헤로데(기원전 37~4)가 로마인의 후광을 업고 유다와 사마리아의 임금이 되었다.
이두메아인인 헤로데는 황폐한 사마리아를 세바스테로 이름을 바꾸어 재건하고, 항구 도시 가이사리아를 건설하여 로마 황제에게 바쳤다. 그리고 기원전 20년 또는 19년부터 성전 재건 건축을 시작되었는데, 그 후속 작업은 서기 70년까지 계속되었다. 그가 죽은 기원전 4년에 왕국은 세 명의 아들에게 나누어졌다. 큰아들 아르켈라오(기원전 4~서기 6)는 유다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는 민족 영주(Ethnarchon)란 칭호와 임무가 주어졌고, 안티파스(기원전 4~서기 39)는 갈릴래아와 베레아를 다스리게되었고, 필립보(기원전 4~서기 34)는 골란, 바타네, 트라코니티스, 아우라니티스, 이두메아를 다스렸다. 서기 6년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기원전 14~서기 37)는 아르켈라오를 폐위하고 유다와 사마리아를 총독이 다스리는 속주로 만들었다. 서기 27년경 세례자 요한이 활동을 시작하였고, 30년에 복음을 선포하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되었다.
서기 37년 로마 황제 칼리굴라(37~41)는 헤로데 왕의 손자인 아그리빠 1세(37~44)를 유다의 왕으로 선언하고 필립보의 옛 영토를 다스리는 권한을 부여하였고, 40년에는 안티파스의 영지까지 다스리게 하였다. 44년 그가 죽은 뒤 갈릴래아를 포함한 이스라엘 전역은 로마의 직속령이 되었으며, 49년 클라우디우스 황제(41~54)는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였다. 이 당시 팔레스티나에서는 조세 부담이 높고 심한 가뭄과 기근이 겹쳐 생활이 힘겨워졌다. 45년경 튜다의 반란이 일어났고(사도 5, 36) 갈릴래아인의 피살 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의 전투(52), 이집트계 유대인 민중 지도자가 이끈 폭동이 터진다(55). 이런 분위기를 틈타 로마에 협력하는 지도층을 단도로 공격하는 암살단의 활동이 활발해진다. 마지막 유다 총독인 플로루스(Plorus, 64~66)가 더욱더 유대인들을 억압하자, 대다수 유대인들은 로마에 깊은 증오심을 갖게 되었고 좌절에 빠졌다. 66년 봄 성전 금고에서 거액을 꺼내 줄 것을 로마 제국이 요구하자, 사제들은 황제를 위한 제물 봉헌을 중지하고 본격적인 봉기에 들어갔다. 또한 유다와 사마리아의 행정관인 알
비누스(Albinus, 62~64)와 플로루스의 부패와 불의와 잔인함이 겹쳐 제1차 유대 독립 전쟁(66~70)이 일어났다. 66년 예루살렘에 유대인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진압에 나선 로마의 정규군은 67년부터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하였다. 결국 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점령되었고, 성전이 불태워졌다. 이 전쟁으로 전사자만 11만 명이나 되었고, 유다는 로마 황제의 직속 속주가 되면서 모든 특권을 박탈당했다. 성전이 사라지면서 유배 시기 이후 유대인들을 이끌었던 대사제들과 사두가이파, 에세네파와 젤롯당 등이 사라졌다. 다만 일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 학자들이 로마에 투항하여 로마의 황실 소유지인 야브네(Jabneh, Jamnia)에서 새로운 유대인 사회의 기틀을 닦았다. 또한, 바리사이란 명칭 대신 랍비' 란 이름의 새로운 지도층이 점차 권위를 갖게 되면서 유대교는 "랍비 유대교"의 모습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팔레스티나에 남아 있는 유대인의 삶은 계속 악화되었다. 제1차 유대 독립 전쟁의 실패로 대부분의 토지를 빼앗겨 피폐해진 유대인들은, 132년 할례 금지법과 성전터에 건설되는 주피터 신전의 건설을 반대하며 제2차 유대 독립 전쟁(132~135)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 전쟁 역시 실패하였으며, 그 여파로 유대인 85만 명이 죽었다. 또한, 예루살렘에 유대인 거주 금지 조치가 내려졌고, 유대인들은 팔레스티나를 떠나야 했다.
〔새 이스라엘인 교회〕 예수 승천 후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예수 죽음의 의미를 밝히고, 예수를 주님이자 구세주로 고백하는 공동체를 만든다. 그들이 복음을 선포하자 유대교와 미묘한 갈등과 충돌이 발생하였다. 또한, 목숨까지 잃는 박해를 받았다. 하지만, 70년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교회에 한 분기점이 되었다. 사도들은 이 사건이 예수가 한 예언의 성취로 보았고, 이후 유대교로부터 갈라져 로마 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자기 정체성을 분명하게 확립해야 할 필요성이 높아졌고,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 대한 성찰도 이루어졌다. 그 내용은 복음서와 사도들의 편지에서 드러난다.
복음서와 이스라엘 : 구원 사건은 이스라엘에서 시작되었으며, 계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제일 먼저 구원의 선포를 들었다. 예수와 제자들의 활동은 이스라엘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마태 10, 6. 23 ; 5, 24). 예수 부활이후에도 복음은 이스라엘에게 선포된다(사도 2, 36 ; 4,10). 이스라엘만이 아닌 이방인들도 예수의 수난 사건에 참여하며(사도 4, 27), 다 같이 신앙에 초대받았지만(사도 9, 15),구원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다. 즉, 나면서부터 "이스라엘 사람"인 유대인(로마 9, 4)이 먼저 초대되고, 그후에 다른 모든 백성들이 초대를 받는다(로마 1, 16 ; 2, 9-10 ; 사도 13, 46). 복음이 주는 구원은 먼저 이스라엘을 위로하고(루가 2, 25), 이스라엘을 구원하며(루가24, 21), 이스라엘 왕국의 부흥(사도 1, 6)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소망을 채울 것이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도우시며(루가 1, 54) 불쌍히 여기시어(루가 1, 68) 회개시키고 죄 사함을 베푸신다(사도 5, 31). 그로 인해 예수는 이스라엘의 영광(루가 2, 32), 이스라엘의 왕(마태 27, 42 ; 마르 15, 32 ; 요한 1, 49 ; 12,13), 이스라엘의 구세주(사도 13, 23-24)라 불린다. 그의 부활로 생긴 새로운 희망도 이스라엘의 희망(사도 28, 2)이다. 이스라엘은 구원의 실현을 전 인류 역사에 연결시키는 유기적인 연계점이다.
새로운 이스라엘 : 구약 시대에 예언자들이 약속했던 새 이스라엘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실제로 나타났다. 예수는 새로운 이스라엘을 실제적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열두 사도" 를 선택하여 열두 지파로 구성되었던 옛 이스라엘의 뒤를 잇는 교회를 세우셨다. 또한 열두 사도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 말하였다(마태 19, 28). 교회는 종말론적 이스라엘을 의미하며, 하 느님은 교회와 새로운 계약을 맺으신다(히브 8, 8-10). 교회에는 열두 지파에서 뽑힌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다(묵시 7, 4). 열두 제자 위에 세워진 거룩한 도읍, 천상 예루살렘에는 열두 개의 문이 있으며, 각기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묵시 21, 12 ; 에제 48, 31-34). 옛 이스라엘과 새 이스라엘 : 새 이스라엘인 교회는 옛 이스라엘을 완성한다. 옛 이스라엘에 속한 자는 태생이 이스라엘인 사람이며(필립 3, 5), 이방인은 그 시민권에서 제외된다(에페 2, 12). 그러나 이제 "육적인 이스라엘" (1고린 10, 18)에 속한 것만으로는 "하느님의 이스라엘" (갈라 6, 16)에 속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태생이라고 해서 모두 이스라엘은 아니기" 때문이다(로마 9,
6).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결단해야 한다. 하나는 믿음에 의해 의화됨이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에 의해 의화된다고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자들이며, 이러한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로마 9, 31 ; 11, 7). 다른 하나는, 구약성서에 예언되어 있는 "살아남은 자"(로마 9. 27-29)를 이루고 있는 "참 이스라엘인"(요한 1, 48)이며, 이 새 이스라엘 중에는 개종한 이방인도 들어 있다.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 왕다운 제관들, 거룩한 겨레, 그분이 차지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여러분이) 백성 아닌 백성이었지만 이제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고 (전에는)자비를 받지 못한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자비를 받은 자
들이 되었습니다"(1베드 2, 9-10). 옛 이스라엘이 결정적으로 버려지지는 않겠지만, 그들이 복음을 이해하지 못 할 때 하느님은 그들에게 질투심을 보이실 것이다(로마 10, 19). 이방인들이 모두 회개하게 되면 이스라엘의 부분적 완고성은 사라지고, "온 이스라엘도 구원받을 것"이다(로마 11, 26). 그때에는 옛 이스라엘이 그들 덕분으로 구원의 길에 들어선 새로운 영적 이스라엘과 하나가 될 것이다.
Ⅳ. 국가 건립과 교회와의 관계
〔국가의 형성〕 136년 이후 예루살렘을 비롯한 팔레스티나의 도시들이 일부 재건되었다. 그러나, 더 이상 발전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로마 제국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허용되고 후에 국교로 선포되면서 기념 성당의 신축과 성지 보호를 통해 새로운 건축물이 지어졌고 팔레스티나를 찾아 순례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그로 인해 어느 정도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7세기에 무슬림이 이곳을 점령하였고, 691년 예루살렘에 바위의 돔을 세웠다. 그 결과 예루살렘은 3대 주요 종교의 성지가 되었다.
이 지역은 제1차 십자군 전쟁(1096~1099) 때 점령되었다. 십자군들은 1099년 7월 15일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그곳에 살던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을 학살하였다. 그 후 팔레스티나 해안을 따라 인근 지역을 점령하고 에데사백작령(1098~1144) · 안티오키아 후작령(1098~1268) · 트리폴리 백작령(1109~1187) 등의 봉건령을 포함한 예루살렘 왕국(1099~1187)을 세웠다. 하지만, 이슬람의 지도자살라딘(1169~1193)이 대규모의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이전에 분열되어 있던 이슬람 세계를 통일하는 데 성공하였고, 1187년에는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이후 살라딘의 후계자들인 아읍 왕조가 이 지역을 통치하였으며, 1260년 이후에는 맘루크(Mamluk)의 통치를 받았다. 1516년 이후 팔레스티나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일시적으로 나폴레옹(Napoléon Bonaparte, 1769~1821) 군대의 침략을 받았지만, 이집트의 부왕(副王)인 무하마드 알리(1805~1849)의 통치를 받았다. 그를 통해 서유럽의 영향을 받던 팔레스티나는 1840년 다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런데, 1881년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 황제(1855~1881)가 암살된 후 유대인에 대한 학살이 시작되자, 팔레스티나로의 이주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터키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출신 유대인들의 정착촌이 1882년에 최초로 세워졌으며, 1914년까지 260만 명의 러시아계 유대인들이 이주하였다.
1918년 이후 팔레스티나는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히틀러(A. Hitler, 1889~1945)의 박해로 유대인의 팔레스티나 이주가 늘어나면서 유대인과 아랍인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다. 이에 팔레스티나를 유대인 지역과 아랍인 지역으로 분할하자는 제안도 있었으나 거부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시온주의 국가를 배후에서 지원하는 가운데 1947년 국제 연합(UN)은 팔레스티나 분할을 결 의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건국이 선포되었고, 이스라엘과 이집트 · 트란스요르단(지금의 요르단) · 시리아 레바논 · 이라크의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으로 본래 양도받았던 지역보다 50% 이상을 더 확보하게되었다. 이스라엘은 1967년 6월과 1973년 10월의 전쟁에서도 승리했지만, 그 결과 중동 지역을 위기에 빠뜨렸고 지금까지 계속 불안정한 상태로 남아 있다. 이스라엘은 1979년 이집트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지만 1967년 6월 전쟁을 전후로 팔레스티나인 국가와 그 영토 내의 이스라엘 점령지인 유대인 정착촌 건립 문제로 여러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가 어려워졌다.
1982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에 속한 게릴라를 몰아내기 위해 레바논을 침공했으며, 1987년 말 이후 팔레스티나 지역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의 소요와 폭동이 끊이지 않고 있다. 1967년 6월 전쟁에서 승리한 후 이스라엘이 점령해 온 요르단 강 서쪽의 웨스트뱅크(West Bank)와 가자 지구(Gaza Strip)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은 이때 이후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이스라엘 정부는 1993년 9월 이들 지역에 팔레스타인의 자치권을 허용하는 내용의 평화 협정을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와 체결하였다. 1996년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수립되었고, 아라파트(Y. Arafat, 1929~ )가 초대 수반을 맡았으며 정부 청사는 요르단 강 서안의 예리고에 들어셨다. 1997년 1월 15일 웨스트뱅크의 주요 7개 도시를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에 이양한다는 오슬로 평화 협정을 지키는 듯 보였으나, 일종의 정치적 행동에 불과했다. 이 후 계속적으로 발생한 팔레스타인들의 자살 테러와 이스라엘의 보복 공격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측의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교회와의 관계〕 유대인의 팔레스티나 복귀와 이스라엘의 건국은 가톨릭 교회는 물론 특히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예기치 못한 문제점을 던졌다. 오랜 역사 동안 그리스도교는 국가나 공식적인 기구를 갖지 못한 유대인들에게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새 계약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 교회는 옛 이스라엘을 대체했다"(교회 9항)거나 "유대인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어야한다" 는 기존의 교리에 의문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새 계약으로 옛 계약이 폐기된 것이 아니었는가? 만약 옛 계약이 아직 유효하다면, 유대인이 약속의 땅으로 복귀한 것과 국가를 창설한 것에 대한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발표한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Nostra Aetate)에서는 조심스러운 문장으로 계약의 연속성과 유한성에 대한 입장을 공식화하였다(4항). 그러나 여기에는 이스라엘 국가와 영토의 문제에 대한 언급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계속되는 종교간의 대화와 공식 문헌은 아직도 교회와 유대교의 신학적 · 종교적 문제와 이스라엘의 영토 및 국가 문제를 계속 구별하
고 있다. 이러한 구분은 사회적 · 정치적 현실로 비춰지고 있다.
1984년에 미국 장로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중요한 공식 문서를 발표하였다. 이 문서는 "땅에 대한 약속을 담고 있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을 확언한 후, 이 약속은 모든 민족에 대한 하느님의 보편적 목적이라 언급하였다. "우리는 그 땅이 어느 누구라도 억압과 착취를 피해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이 지상의 지리적 · 정치적 장소여야 한다고 이해한다. 이 땅은 한 가정, 생계 수단, 부의 근원, 그리고 개개인이 한 민족을 이룰 수 있는 어떤 장소를 의미한다." 땅에 대한 이러한 신학을 간단히 밝힌 후, "유대 백성과 맺은 특정한 땅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이 갖고 있는 불변의 성격"을 언급하였다. 반면 "약속된 땅은 지역적으로 제한할 수 없음"과 "땅과 정치적 통치권이 결코 동일시될 수 없음" 도 분명히 밝혔다. 또 그것의 구체적인 실행이 어렵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서, 이스라엘 국가 문제에 대한 논의를 계속하였다. 즉, "하느님의 방법을 국가 정책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1994년 교황청과 이스라엘의 외교 관계가 수립되었고, 1997년 교회는 법적인 지위를 얻었다. 그러나 팔레스티나에 있는 교회들은 반복되는 폐쇄와 박해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교황청은 그리스도교 신자, 무슬림, 유대교 신자 모두에게 신성한 의미를 갖는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해 국제적으로 승인된 법을 제정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에 대한 논의는 단순히 성지로서의 의미보다는 이스라엘이 내포하고 있는 정치적 · 종교적인 관계에 중점을 둔 것이다. 대희년을 맞아 2000년 3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이스라엘 성지 순례라는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이 방문 기간 동안 교황은 법 제정에 관한 문제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팔레스티나인들의 권리를 옹호하면서 협상을 통해서만 이스라엘인의 국가에 대한 권리가 성취될 수 있다고 천명하였다.
이스라엘에는 총 인구의 1.9%에 해당되는 117,000명의 신자들이 있다. 2001년 현재 총주교좌 2(라틴 가톨릭 총주교좌와 그리스 정교회와 멜키트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총주교 대리), 대교구 2, 동방 대목구 5, 본당 80개가 있다. 총주교 1, 대주교 4, 주교 4, 신부 392(교구 소속 79, 수도회 소속 313), 종신 부제 5, 수사 173, 수녀 1,031, 신학생 145명이 있다. (⇦ 하스모네 ; → 다윗 ; 마카베오가 독립 전쟁 ; 마카베오서 ; 모세 ; 바르 코크바 ; 바빌론유배 ; 불레셋 민족 ; 사울 ; 산헤드린 ; 성전 ; 솔로몬 ;시나이 반도 ; 시나이 산 ; 시온주의 ; 아시리아 ; 엘리사; 엘리야 ; 열두 지파 ; 예루살렘 ; 요세푸스 ;요시아 ;요하난 벤 자카이 ; 유대교 ; 유대 왕국 ; 유대인 ; 율법; 율법 학자 ; 이집트 ; 출애굽기 ; 판관기 ; 팔레스티나; 페르시아 ; 헤로데 ; 헤로데 아그리빠 1세 ; 헤로데 안티파스 ; 회당 ; 히브리인)
※ 참고문헌 정태현, 《성서 입문―상권 : 성서의 배경과 이스라엘의 역사》, 일과 놀이, 2000/ P. Grelot, Vocabulaire de ThéologieBiblique, X. Léon-Dufour ed., Cerf, 1977/ A.H.J. 군네벡, 문희석 역, 《이스라엘 歷史》, 한국신학연구소, 1991/ 존 브라이트, 김윤주 역, 《이스라엘의 역사》 상 · 하, 분도출판사, 1978~1979/ F. 힌슨 데이비드, 이후정 역, 《이스라엘의 역사》, 컨콜디아사, 1983/ 지크프리트 헤르만,방석종 역,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역사》, 나단출판사, 1989/ 이용결역, 《성서 연대표》, 성서와함께, 2001/ B. Vawter, religion of ancientIsrael, 《NCE》 7, pp. 695~700/ J.E. Fallon · L.F. Hertman, history of Israel,《NCE》 7, pp. 700~712/ F. Schmidke, 《LThK》 5, pp. 803~809/ A. Alt · E.Kutsch, 《RGG》 3, pp. 936~944/ R. Albertz, Religionsgeschichte Israels in alttestamentlicher Zeit, Göttingen, 1992/ M. Clauss, Geschichte Israels,München, 1986/ G. Fohrer, Geschichte Israels, Heidelberg, 1985/ H.Shanks, Ancient Israel, Englewood Cliffs, 1988/ J.A. Soggin, Einfuehung in die Geschichte Israels und Judas, Darmstadt, 1991/ T.L. Thompson, Early history of the Israelite people, Leiden, 1992/ J.M. Bonino, Land and the State of Israel, Dictionary of the Ecumenical Movement, WCC Pub., 1991, pp. 1136~1139. 〔金善美〕
이스라엘 〔영〕Israel
I . 의 미 · II . 성서에 언급된 역사 · Ⅲ . 로마 제국의 지배와 교회 · Ⅳ. 국가 건립과 교회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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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게 평화를" 이라고 새겨진 예리고의 모자이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