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 초 아라비아 반도에서 무함마드(Muhammad,571~632)에 의해 창시된 종교. 현재 160여 개 국에 약 12억명의 신자가 있으며, 한국 내에도 3만 5천여 명의 신자들이 있다. "회교"(回敎)라고 부르기도 한다.
I . 종교학에서의 이슬람
이슬람은 유대교, 그리스도교와 같이 계시 종교이다. 계시의 주체는 아랍어로 "하느님"이란 의미를 지닌 '알라' (Allāh)라는 지(至高)한 존재인 유일신이다. 이 '알라' 로부터 내려온 계시를 인간과 세상에 전한 사람이 무함마드이고, 그를 '하느님의 사자(使者)' 로 따르는 사람은 '무슬림' 이라 부른다.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에는 아담 · 아브라함 · 모세 · 예수 · 무함마드를 포함하여 25명의 이름이 하느님의 사자로 명시되어 있다. 무슬림들에게 무함마드는 하느님의 사자들 중에서 각별한 존재이다. 그 이유는, 시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 출현하였지만 이슬람의 창시자라는 이유 외에도 '예언자의 봉인' (코란 33, 40)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흔히 '최후의 예 언자' 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는 무함마드와 함께 계시의 역사가 사실상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 사〕 이슬람의 역사는 한마디로 팽창의 역사였다. 아랍 민족의 힘을 빌려 성장한 이슬람은 창시된 지 1세기가 되기도 전에 서쪽으로는 대서양, 동쪽으로는 인도양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강대국이었던 고대 이란의 사산 왕조(Sāsānian dynasty)가 그들에게 멸망하였고(651), 같은 시기에 동로마 제국도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그리스도교의 요람이었던 근동 지방을 모두 내주었다. 13세기의 이슬람 세계는 몽골의 침략으로 위축되는 듯하였지만, 이 위협은 곧 사라졌다. 정복민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였기 때문이다. 몽골의 침략에 따른 혼란과 충격에서 차츰 벗어난 이슬람 세계는, 14세기 오스만 제국을 통해 다시 한번 세계사의 주역으로 그 위용을 과시했다.
그러나 이슬람의 역사가 승리와 영광으로만 가득 찬 것은 아니었다. 영광의 이면에는 권력을 둘러싼 암투와 음모, 종교적 광신과 독선이 있어, 이슬람 사회는 수시로 '홍역' 을 겪어야 했다. 문제의 원인은 신학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었다. 권력의 계승에 있어서 이슬람 사회는 '이슬람적(的)' 이라고 할 수 있는 원칙을 확립하지 못했었다. 이는 632년 무함마드의 사후 그의 정치적 대권을 이어받은 칼리프(Caliph) 역사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움마(Ummah) 즉, 무슬림 공동체의 구심점인 칼리프의 역사는 크게 4개의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 시기는 아부 바크르(Abū Bakr, 632~634) · 우마르 1세(Umar I, 634~644) · 우스만 이븐 아판(Uthmān ibn Affān, 644~656) 그리고 알리(AI, 656~661)로 이어지는 이른바 정통 칼리프 시대이다. 제2 시기는 시리아 지방을 중심으로 집권한 우마이야(Umayyad) 칼리프 왕조 시대(661~750)이고, 제3 시기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중심인 바그다드를 수도로 삼았던 아바스(Abbāsid) 칼리프 왕조 시대(749~1258)이다. 그리고 마지막 제4 시기는 몽골에 의해 실질적인 칼리프 제도가 무너진 1258년 이후 1924년 터키국민 의회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유명무실한 상태로 명맥을 이어간 시대이다.
정통 칼리프 시대에 무함마드의 정치적 후계자는 나름대로 원만한 방식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실정(失政)을 항의하기 위해 지방 곳곳에서 상경한 무슬림들의 손에 피살된 제3대 칼리프 우스만 이븐 아판에 이어 알리가집권하자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 1세(Muāwiyah I, 602?~680)가 반란을 일으켰다. 알리는 무함마드가 가장 총애하던 사촌이자 사위였으며, 무아위야는 우스만 이븐 아
판처럼 메카 시절 무함마드를 박해하는 데 앞장섰던 호족(豪族) 우마이야 가문 출신이었다. 내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알리는 독선적인 하와리즈(Khāwarij)파(派)에 의해 암살되었다. 결국 무아위야가 집권하였고, 정통 칼리프 시대는 막을 내렸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칼리프 위(位)가 우마이야 가문에게 세습화되는 과정에서 알리의 아들이자 무함마드의 외손인 후사인 이븐 알리(626~680)가 680년 카르발라 전투에서 무참히 살해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멍에를 지고 출발한 우마이야 왕조는 1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알리 가문에 동조적인 무슬림들과 정치적 · 사회적 평등을 추구한 이란인들이 주축이 된 혁명 세력에 의해 멸망하였다. 우마이야 왕조에 이어 권좌에 오른 것은 무함마드의 백부 아바스 가문의 후예였다. 아바스 칼리프 왕조는 《천일야화》(千一夜話, Alf laylah wa laylah, The Ara-bian Nights' Entertainment)의 무대인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한때 눈부신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영광도 잠시, 그들을 둘러싼 군부 실력자들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태도 얼마 가지 않았다. 1258년 바그다드를 점령한 몽골군에 의해 아바스 가문이 몰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권은 이미 자주적인 각 지역 군주들의 손에 넘어가 있었고, 이슬람 사회의 근간으로 이슬람의 법률인 '샤리아' (Shariah)가 이슬람 학문과 실천에 정통한 이들이었던 '울라마' (Ulamā) 계층을 중심으로 이미 완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바스 왕조의 몰락이 이슬람 사회에 미친 실질적인 영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이 후 움마는 이슬람 세계를 분할 통치한 이들 왕조의 흥망 성쇠와 운명을 함께 했다.
이슬람 세계의 군사적 팽창은 두 차례에 걸친 오스만 제국의 오스트리아 빈(Wien) 공격(1529, 1683)이 실패하면서 그 막을 내렸다. 이후 형세는 역전되어 오히려 세계사의 새로운 패자로 등장한 서구 열강에 의해 이슬람 세계가 침식을 당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터키 · 이란 · 아라비아 반도 등 몇몇 지역을 제외한 지역이 그들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1 · 2차 세계대전 중 각 지역 무슬림들은 서구 열강의 각축 속에서 각자 자신의 '살 길' 을 찾아 투쟁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이슬람 세계가 오늘날 안고 있는 과제는 세속주의적인 서구화의 거센 물결, 격변하는 현대 사회의 조류 속에서 어떻게 이슬람의 본질을 계승 ·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샤리아' 의 법적 구속력이 적지 않은 '이슬람' 국가에서 그 영향력이 부분적, 또는 전면적으로 폐지되었다는 사실이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종 파〕 이러한 정치적 시련 속에서 무슬림 공동체는분열을 면할 수 없었다.
하와리즈파 : 이슬람 역사상 가장 먼저 공동체에서 뛰쳐나간 집단은 하와리즈파(派)였다. 이들은 알리와 무아위야가 일전을 겨룬 시핀 전투(657) 직후, 알리 진영을 빠져나가 형성되었다. 다분히 청교도적이며 동시에 광신적이었던 이들은 알리와 무아위야를 모두 불신자로 간주하고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알리만 이들의 손에 암살됨으로써 정통 칼리프 시대는 맥이 끊기고, 신생 무슬림 공 동체는 불치의 상처를 입었다.
시아파 : 지도자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갖추기만 했다면 비록 '아비시니아 출신 노예' 일지라도 칼리프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 하와리즈파와는 달리, 무함마드가 알리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이 '쉬아트 알리' (Shī't 'Ali) 즉, 알리의 당(黨)이란 뜻으로 줄여서 시아(Shia)파이다. 이들의 믿음에 따르면, 알리와 그 가문의 후계자들은 무함마드로부터 정치적 권위인 칼리프 직위만이 아니라 종교적 지도자인 이맘(Imām)의 권위도 부여받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알리와 후사인 이븐 알리의 비운에서 보았듯이 역사적 현실은 이들의 이상에서 점점 멀어져 갔고, 알리 가문의 후예들은 정치적 견제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후계자의 정 통성 문제와 관련된 혼선과 분열은 시아파에서 극복되지않았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군소 분파가 갈라져 나갔다. 오늘날 시아파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이맘이야(Imam-iyya)파는 1501년 사파위 왕조 이래 이란에서 국교로 자리잡았다. 이맘이야파는 874년에 종적을 감춘 가이바(Ghaybah) 즉, 마지막 이맘인 12대 이맘 무함마드 알-마 흐디가 말세가 되면 세상에 다시 나타나 악을 무찌를 것이라고 믿고 있다.
수니파 : 알리 가문의 비운에 대한 심리적 자책과 동정심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무슬림은 "누구든 자신이 살던 시대의 진정한 이맘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 채 죽는다면, 그는 불신자로서 죽는 것"이라는 시아파의 교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경우 우마이야, 아바스 칼리프 왕조는 물론, 알리를 제외한 정통 칼리프를 모두 불신자로 단죄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주어진 현실에 '충실' 했던 무슬림들은 공동체의 융합과 이슬람 역사의 연속성을 중요하게 여긴 울라마들과 함께 이슬람 사회의 주류를 이루었다. 4대 법학파를 중심으로 형성된 이들은 스스로를 수나(Sunna) 즉, '예언자 무함마드가 남긴 규범적인 언행' 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수니' (Sunni)라고 불렀다. 수니파 교리에 따르면, 칼리프가 될 수 있는 자격은 쿠라이시 부족 무슬림들에게 있다. 이는 정통 칼리프 시대로부터 아바스 칼리프 왕조에 이르기까지 이 부족 출신의 무슬림들이 이 직위에 올랐다는 역사적 사실을 교리적으로 명문화한 것이다.
수피 : 보다 독실한 무슬림들은 단순히 율법을 지킨다 거나 윤리적으로 결백한 삶을 사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대외적으로는 정복전의 성공에 따른 물질적 풍요, 그리고 대내적으로는 정치적 · 종파적 분열로 인한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이들은 내면 세계로 눈길을 돌렸다. 이들은 끊임없이 "악을 부추기는"(12, 53) 자신의 영혼과 투쟁하며 절대적인 존재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다. 이슬람이 시작된 지 1세기가 될 무렵 흔히 '수프' (Ṣūf, 즉 양모(羊毛)로 만든 암청색 옷을 걸친 금욕주의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의 의상에서 무슬림 신비주의자들을 일컫는 수피(Ṣūfī)라는 명칭이 유래했다. 양모로 만든 거친 외투는 근동 지방에 거주하던 초 기 그리스도교 수도승들이 즐겨 입던 옷이기도 하다. 수피들은 규정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 동안 예배와 명상을 하였다. 이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삶 자체를 일종의 예배 행위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세속적인 부귀 영화를 꿈꾼 일반인들과는 달리 이들이 추구한 이상은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그분과의 영적 교류, 그분에 대한 지극한 사랑, 그분 이외의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 등이었다. 이들은 일반 대중의 눈을 의식하지 않았고 때로는 기행(奇行)도 서슴지 않았다. "아날 하크" , "나는 진리이다"라는 말로 절대자와의 영적(靈的) 합일(合一)의 경지에서 체험한 '파나' (Fana) 곧, 자신의 절멸(絶滅)을 노래한 알 할라즈(al-Hallāj) 858?~922)는 극단적인 수피의 모범이었다.
그 외에도 금욕주의자인 알 하산 알 바스리(al-Hasan alBasri, 642~728), 사랑의 신비주의를 펼친 라비아(+801) ,바그다드의 심리학자 무하시비(+857) 하느님의 업적인 자연을 찬미한 둔-눈(+859) , 고독한 기인의 대명사인 바예지드 비스타미(+874) , '빈자(貧者)의 공작새' 로 알려진 주나이드(+910) 등은 자칫 교리적일 수 있는 율법이나 현학적인 신학에 질식할 수 있던 이슬람에 새로운 활
력소를 불어넣었다. 그러나 울라마들은 이러한 운동이 지닌 사회적 위험을 경계했다. 울라마들과 수피들 사이의 갈등은 정치적 여건과 맞물려 증폭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수피 전통(Sufism)을 체계화하여 신비주의자들과 정통주의자들 사이에 싹트던 갈등을 잠재운 사람은 알-가잘리(+1111)였다.
수피 전통은 종교적 천재들이나 소수 추종자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12세기 중엽부터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맺어진 각별한 관계를 중심으로 일종의 교단이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대중 속으로 보급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시작한 것은 아브드 알 카디르 알-질라니(Abd al-Qadir al-Jilani, 1078~1166)를 중심으로 형성된 카디리야(Qadiriyah) 형제단이었다. 이후 리파이야. 벡타시야 · 메블레비야
등 수많은 수피 형제단이 만들어졌다.
회전무(回轉舞)로 잘 알려진 메블레비야 수피 형제단은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활약한 잘랄 앗 딘 알 루미(Jalālad-Dīn ar-Rūmī, 1207?~1273)로부터 유래한다. 그는 황홀경 속에서 수많은 운문(韻文)을 쏟아 냈으며, 특히 그가 남긴 《마트나위》는 '페르시아판(版) 코란' 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수피 전통은 그 외에도 사나이(Sanai,?~1131), 아타르(Attar, 1142?~1220) 등 탁월한 시인을 배 출하여, 이슬람 세계의 문학 발전과 이슬람의 대중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한편 수피 형제단 중에는 벡타시야 · 낙슈반디야 · 사누시야처럼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교단도 적지 않았다.
이슬람 사회 전반에 걸쳐 폭 넓은 영향을 미쳤던 수피 전통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변질되었고, 이는 이슬람 사회의 쇠퇴를 가속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영적 수련 과정을 통해 얻게 된 약간의 비의적(秘儀的)인 능력을 이용하여 무지몽매한 제자들 위에 절대적인 존재로 군림한 '스승' 들, 세속적인 이익을 위해 지배 계층과 결탁하거나 영향력 있는 지주로 변한 수피 대가(大家)의 후손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성인 숭배의 풍습이 그 원인이었다.
〔문 명〕 정치적 시련으로 움마의 융합이 깨졌으나, 이슬람을 받아들인 다양한 민족이 일구어 낸 문명은 독특하고도 위대한 것이었다. 중세 그리스도교가 금기시하던 헬레니즘을 수용하여, 이를 이슬람 세계 각지의 학문적 유산과 접목하여 발전시킨 수학 · 철학 · 의학 · 기하학 ·화학 · 물리학 · 천문학 등은 인류 문명의 진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외에도 페르시아어를 중심으로 꽃핀 시 문학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상상과 상징의 지평을 넓혀 주었고, 상거래와 민 · 형사상의 판결은 공정하게 이루어졌다. 이슬람 영토의 팽창이 무슬림들의 강한 정신력과 군사적 우수성 덕분이었다면, 피정복지 주민의 이슬람화, 그리고 무슬림 상인이나 수피들을 통해 이루어진 이슬람의 평화적인 전파는 이러한 새로운 문명의 우월성에 힘입은 것이었다.
코란 : 이슬람 문명의 기저에는 창시자 무함마드의 예언자적 능력 외에도 그가 남긴 《코란》이 자리잡고 있다. 이슬람은 지상에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이념과 함께 출발한 종교이다. "너희들은 사람들 사이에 생겨난 공동체 중에서 가장 훌륭한 공동체이니라. 너희들은 선행을 도모하고 악행을 금하며 하느님을 믿느니라" (3,110). 《코란》에 명시된 이러한 유(類)의 가르침들은 일종의 정언 명령으로써 이슬람 사회의 나침반 역할을 했다.
순나 : 무슬림들에게 《코란》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순나' (Sunna)이다. 무함마드가 남긴 언행이 중요한 이유는 코란에 명시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사표(師表)이며(33, 21), 하느님의 사자를 따르는 것이 곧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다(4, 80). '순나' 에는 코란 구절에 대한 무함마드의 해석, 추종자들의 행실이나 질의에 대한 그의 언급, 각종 정치적 · 사회적 · 법률적 사안에 한 그의 지시나 판결이 포함되어 있어 무슬림들의 개인적인 삶이나 공동체 운용에 대한 절대적인 규범이 되었다. '순나' 의 구체적인 내용 곧, 무함마드가 남긴 말과 그가 보여 준 규범적인 행위에 대한 기록은 하디스(Ḥadīth, 일화 또는 이야기)라고 불린다.
하디스 : '순나' 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하디스 수집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무함마드 사후 약 2세기가 지난 뒤였다. 이때 무함마드에 관한 이야기 가 부분적으로 과장되거나 왜곡되기 시작했다. 상당한 분량의 신빙성 없는 이야기가 여기에 들어왔다. 심지어 정략적인 목적으로 만든 위작(僞作)이 유포되기까지 했다. 이러한 현상의 위험을 알아챈 학자들은 하디스의 체계적인 분석과 수집을 하였다. 이에 평생을 바친 학자들중 대표적인 인물은 부하리(810~870) · 무슬림(817~875) · 이븐 마자(+ 886) · 아부 다우드(+888) · 티르미디(+892) · 나사이(+915)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샤리아 : 하느님의 유일성과 무함마드의 예언자적 지위 이외에 이슬람에서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은 일상적인 생활에서의 올바른 행위, 올바른 실천이다. 이슬람 특유의 법 규범, 즉 '샤리아' 는 이슬람에서 강조하는 올바른 행위가 어떤 것인지를 제시하고 있다. '샤리아' 는 무슬림 공동체와 함께 성장했다. 초기 무슬림들은 《코란》이나 '순나' 에 명시된 규범에 따라 문제를 해결했다. 그것이 미치지 않는 사안에 대해서는 이슬람의 근본 정신에 위배되지 않는 한 기존의 관행을 따랐다. 그러나 통치 지역이 넓어지고 다양한 민족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유입되면서 '샤리아' 의 체계화, 특히 보다 포괄적인 법원(法源)이 절실하게 필요해졌다. 8세기 중엽 아바스 칼리프 왕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추진된 '샤리아' 의 체계화 작업을 통해 이즈마(ijma, 공동체의 합의)를 비롯해 키야스(qiyas, 유추), 라이(ray, 법학자의 독자적인 판단) 등이 새로운 법원으로 자리잡았다.
법학파 : 《코란》과 '순나' 이외에 이들 법원을 얼마나 폭 넓게 인정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학파들이 나타났다. 그 결과 수니파에서 4개의 법학파가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즉, 각각 창시자의 이름을 딴 하나피야 · 말리키야 · 샤피이 · 한발리 법학파였다. 이 외에도 시아파에 속한 무슬림들는 종파별로 독자적인 법 전통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이들 법학파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수니파에 속한 4대 법학파는 모든 지역에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며 공존하고 있다.
'샤리아' 는 이슬람 사회의 보루로써 무슬림 공동체를 이슬람적으로 각인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실 중세 이슬람 사회가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샤리아' 덕분이었다. 여성에게도 일정한 몫이 돌아가는 상속법, 상대가 술탄(Sultan)이라도 신부(新婦) 본인의 동의가 있어야만 결혼이 성립된다는 혼인법, 증인의 증언이나 명확한 증거가 없이는 어떠한 범죄도 처벌하지 못한다는 원칙 등은 인류사의 법 체계 발전에 있어서 획기적인 것이었다. 더욱이 '샤리아' 는 대중적인 지지를 받아 정치 권력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발전했다. 그러므로 위정자들은 싫으나 좋으나 '샤리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울라마들은 '샤리아' 의 신 성한 권위를 내세워 통치자들의 전횡을 견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샤리아' 에 대한 울라마들의 지나친 믿음은 11세기에 이르러 "이즈티하드(Ijtihad)의 문(門)" 즉, 법원에 대한 개인적인 탐구의 문이 "닫혔다"는 결정을 만들어 냈다. 이는 《코란》, '순나' · '이즈마' 의 권위에 입각해 선배 울라마들이 한 번 내린 결정은 영원히 유효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이슬람 사회는 점차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는 결국 이슬람 세계의 쇠퇴로 이어졌다.
〔윤 리〕 비록 공적 분야에서는 크게 위축되었지만 무슬림들의 일상 생활을 인도하는 윤리 규범으로써 '샤리아' 는 아직도 그 힘을 상실하지 않고 있다. 무슬림은 부모에게 순종하고, 그들을 잘 모셔야 한다(17, 23-24). 또한 물질적으로 궁지에 처한 친척과 고아, 걸인 등 사회적 약자를 도와야 한다(2, 177). 그러나 이슬람의 윤리는 유일신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한다. 참된 무슬림이라면 가족이나 친지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이나 그분이 보낸 사자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클 수는 없다. 사회적인 차원에서 볼 때, 무슬림들은 악을 금하고 선을 추구하며 정의와 평화를 지향하는 최선의 공동체를 수립해야 한다는 소명을 받았다(3, 104). 이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몫이 공정하게 분배되도록 해야 하며(4, 58), 상부상조의 정신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모두가 서로 친구(9, 71)이고, 더 나아가 형제(49, 10)이기 때문이다.
종교적으로 일반적인 금기 사항, 예를 들어 거짓말(22, 30) · 위증(25, 72) · 위선(2, 264) · 불성실(3,188) · 험담(24, 19) · 모함(4, 112)은 이슬람에서도 금지되어 있다. 이 외에도 음주와 도박을 금하고 있으며(5,90-91) 돼지고기, 개고기 등도 먹어서는 안된다. 비록 허용이 된 가축의 고기이더라도 정해진 도축 의례를 거치지 않고 죽은 경우, 원칙적으로 먹지 말아야 한다(5, 3).살인 · 간음(6, 151) · 매춘(24, 33) · 동성애(4, 16)도 금지 사항이다. 금욕주의나 독신 생활은 권장 사항이 아니다. 오히려 원만하고 정상적인 성생활을 위해서라도 결혼할 것을 권하고 있다(24, 32). 《코란》은 일부 다처제를 허용하고 있으나, 아내의 수는 최대 4명으로 제한하고있다(4, 3) . 그러나 복혼(復婚)은 배우자들을 동등하게 대우할 수 있는 경우에 한정된다는 단서 조항이 있다.
〔이슬람과 현대 사회〕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국제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이슬람 세계에도 40여 개의 국가가 태어났다. 대부분 민족주의 · 민주주의 · 사회주의와 같은 서구 사상을 건국 이념으로 태어난 이들 '이슬람 국가 사이에서 리비아 · 수단 · 이란과 같이 이슬람을 국시(國是)로 내세운 혁명 정부가 들어선 것은 비교적 근래의 일이다. 이들은 사우디아라비아 등 기존의 이슬람 국가와 함께 국제적인 선교 분야에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른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활동은 서구 중심 언론 매체의 선동적 경향으로 인해 과장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국제 정치 · 경제 질서가 사회 정의에 대한 일반 대중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경우, 언제든지 그에 상응하는 세력으로 성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뉴에이지 운동의 조류에 편승, 최근 수피 전통이 개방적인 서구 사회의 젊은층에게 친화력을 보이고 있는 현상도 서유럽 국가로 이주한 무슬림 인구의 급격한 증가 추세와 함께 주목할 만한 변화라 하겠다.
II . 가톨릭 입장에서의 이슬람
비그리스도교 중 이슬람은 다른 어느 종교보다도 많은 믿음을 그리스도교와 공유하고 있다. 더욱이 이슬람은 유대교와는 달리, 그리스도교를 하느님을 믿는 종교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슬람 출현 초기부터 20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두 종교 공동체 사이의 관계는 적대적인 반목과 갈등의 역사로 점철되었다.
〔신학적 견해 차이점〕 적대 관계의 원인은 우선 신학적인 이견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인 삼위 일체설을 코란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4, 171). 무슬림들은 또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 이라는 교리를 부정한다(19, 35). 예수 그리스도가 동정녀에게서 잉태(3, 47) 되었고 치유의 능력 등 갖가지 기적의 주인공(5, 110)이긴 하지만, 그의 지위는 아브라함이나 모세, 무함마드와 같은 '하느님의 사자' 일 뿐(5, 75)이라고 여긴다. 그리스 도교의 또 다른 핵심 교리인 예수의 십자가 처형, 그리고 그에 따른 대속(代贖)의 교리도 이슬람에서는 부정한다(35, 18). 아담이 죄를 지은 것은 사실이나 그는 회개를 통해 이미 용서를 받았고(20, 122), 십자가형으로 처형된 인물이 있긴 했으나, 그는 단지 예수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 이었을 뿐(4, 157)이라는 것이다. 이를 비롯해 여러 가지 신학적 이견이 생긴 것은, 코란의 설명에 따르면 예수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과 역사(役事)를 그리스도인들이 오해 또는 곡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잘못된 교리를 하느님의 가르침으로 믿는 것은 하느님의 사자나 천사를 신격화하고(5, 17) 교회의 성직자나 신학자들의 견해를 절대화하는 일종의 우상 숭배 행위라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이슬람을 인정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설혹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신학적 과오를 범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교는 이슬람의 출현으로―유대교가 그리스도교의 출현으로 그랬듯이―그 빛을 잃었으며(2, 134),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 이제 그 주역은 이슬람에게 주어졌다(2, 38-41)는 이슬람의 핵심 교리 때문이다.
〔동방 교회의 이슬람관) 이슬람을 기치로 내세운 아랍 세력의 팽창은 위력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완벽하고도 최종적인 진리의 소유자임을 자부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신흥 종교 는 진지한 신학적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자연히 이슬람에 대한 연구는 부진했다. 그나마 얼마 되지 않는 연구도 상대방의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판의 구실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교회의 이슬람에 대한 이해는 사실과 거리가 멀었고, 많은 부분이 왜곡된 것이었다. 이슬람 연구에 있어 선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다마스커스의 요한(Joannes Dama-scenus, 650?~754)이었다. 《인식의 원천》이란 저서의 제2 부인 《유설》(De Haeresibus)에서 그는, 이슬람은 아리우스주의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무함마드가 만든 "이스마엘족속의 신앙"이며, "최근에 발생한 이단(異端)"이라고 소개했다. 그의 견해는 이후 오랫동안 이슬람을 보는 교회의 시각이었다.
〔서방 교회의 이슬람 연구〕 지정학적 여건으로 초기 서방 교회의 이슬람에 대한 이해는 동방 교회 신학자들의 저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1세기에 상황이 다소 바뀌기 시작했다. 예루살렘을 비롯한 동방 지역의 성지 순례가 유행하고, 십자군 운동(1095~1270)이 시작되면서 이슬람 세계에 관한 각종 정보가 유럽으로 직접 흘러 들어오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이슬람과의 신학적 논쟁도 서방 교회로 옮아갔다. 교두보 역할을 한 사람은 클뤼니 수도원장인 베드로(Petrus Venerabilis 1094~1156)였다. 그는 1143년에 최초로 완성된 《라틴어 코란 번역본》의 산파 역할을 했으며, 무함마드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해 당시 서방 교회에 알려지지 않았던 여러 가지'사실' 을 소개했다.
이러한 노력은 비판으로 일관하던 논쟁을 보다 보편적인 이성에 바탕을 둔 호교론 쪽으로 옮아가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대표적인 예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s,1225~1274)의 글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 《반이교도 대전》(Summa Contra Gentiles)을, 그리고 무슬림들을 겨냥해《호교 대전》(Summa Apologetica)이라고도 불리는 《신앙지식론》(De rationibus fidei)을 집필한 그는, 이슬람을 그리스도교의 이단으로 보던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이교(異敎)로 규정했다.
비엔 공의회(1311~1312)는 아랍어를 포함하여 셈 어학의 육성을 위해 파리, 옥스퍼드, 아비뇽 등 5개 대학에 각각 2명의 교수를 둔다는 결정을 하였다. 이러한 결정이 있기까지는 스페인 출신의 평신도 선교사로서 이슬람 세계에 대한 선교에 가장 적극적이고 활동적이었던 륄(Raymond Lulle, 1232~1316)의 공헌이 컸다. 같은 시기에 이슬람 세계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인물 중에는 리콜(Ricoldus de Monte Crucis, +1320)가 있었다. 그는 바그다드에서 아랍어를 배워 륄처럼 무슬림들과 자유롭게 신학적 논쟁을 할 수 있었다. 리콜도는 자신의 저서인 《사라센법 반론》(Contra legem Sarracenorum)에서 무함마드의 생애와 가르침을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이슬람에 대한 반박보다 그리스도교를 옹호하고 그 정당성을 논증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정치적 · 군사적 대치〕 동방 교회로부터 유입된 부정적인 이슬람관은 중세 유럽에서도 거의 수정되지 않은채, 오히려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어 유포되었다. 중세 시대는 물론 근세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가 이슬람을 인정하지 않은 데는 정치적 · 군사적 대치 상황이 보다 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아랍군에게 다마스커스(635) · 예루살렘(638)을 포함하여 시리아와 이집트 전역을 빼앗긴 후 이슬람 세계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군사적 열세는 폐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슬람 세계의 거침없는 팽창을 바라보는 동 · 서방 교회의 심정은 무력감과 굴욕감이 뒤섞인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세 교회의 이슬람 연구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일단 '적' 의 종교를 비판하고 폄하하고자 하는 정서가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군사적 열세는 1099년 십자군의 예루살렘 함락과 예루살렘 왕국의 수립으로 다소 만회되는 듯했다. 그러나 십자군 운동은 결국 실패하였고, 이어 더 큰 충격이 기다리고 있었다. 1453년 5월 오스만 제국의 군대가 동방교회의 보루였던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켰던 것이다. 이로 인해 동 · 서방 교회가 받은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교황 비오 2세(1458~1464)는 십자군을 다시 일으켜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하려 했으나 제후들의 호응을 얻을 수 없었다. 이러한 혼란과 충격 속에서 쿠사의 니콜라오(Nikolaus Cusanus, 1401~1464)는 《신앙 평화론》(De pace fidei, 1453)을 집필하였다. 이 글에서 그는 여러 종교관을 대표하는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켜 종교간의 평화에 대해 논의함으로써 종교 다원주의의 씨를 뿌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492년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무슬림들의 마지막 보루였던 그라나다 왕국이 멸망하고 이른바 "스페인 탈환" "(Reconquista)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이후 발생한 종교 박해로 십자군으로 악화된 두 종교 공동체 사이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양 공동체 사이의 관계는 16세기 오스만 제국이 유럽 대륙에 가한 압박으로 한층 더 악화되었다. 1529년 유럽의 심장부였던 빈(Wien)이 오스만 제국의 군대에 의해 포위되자 루터(M. Luther, 1483~1546)는 '터키족' 과 '터키족의 종교' 를 노골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1541년 한 선제후(選帝侯)의 부탁으로 집필한 〈터키족 타도를 위한 기도에 관한 경고〉에서 "가증스러운 무함마드" · "악마의 배설물"(Teuffelsdreck) 등 직설적인 표현을 동원하여 중세 유럽사회의 반이슬람 정서를 더욱 부채질했다. 교황청과 맞섰던 루터는 가톨릭 교회를 그리스도교 내부의 적으로, 그리고 이슬람을 외부의 적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슬람의 출현을 신학적으로 해석하여 교회의 타락을 응징하기 위해 하느님이 보낸 악마적인 세력 곧, '반그리스도'라고 했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의 변화〕 그리스도 교회가 이슬람을 인류 역사의 동반자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상황이나 사상적 풍토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였다. 그러한 변화의 계기는 교회 외부에서 마련되었다. 18세기 중엽,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 위에 합리성과 진보를 구가한 계몽주의의 출현이 그것이다. 서유럽을 중심으로 싹튼 이 새로운 사조는 교회의 핵심 가르침까지도 보편적인 이성에게 설명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예를 들어, 교회의 분열된 현실이 개별 종파의 역사적 실체를 초월하는 하나의 형이상학적 실체로써 '그리스도교' 를 필요로 하듯, 이성은―그 신학적 근원이 어디에 있든-개별적인 역사 종교를 초월하는 형이상학적 실체 혹은 개념으로써 '하나' 의 '종교' 를 요구했다. 이러한 변화는 한편으로는 종교 무용론이,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종교 전통에 대한 이해와 관용의 정신이 싹트는 계기를 만들었다. 쿠사의 니콜라오로 거슬러 올라가는 타종교에 대한 그리스도적 관용의 정신은 이슬람을 제외시킬 수 없었다.
이어 과학 기술을 앞세운 유럽의 세속주의, 민족주의의 발달로 유럽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수세에 몰렸다. 또한, 이슬람 세계에서는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이 몰락하고, 여러 지역이 서구 열강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다. 세계사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변화로 교회의 해외 선교 활동이 촉진되었다. 북아프리카, 인도 등 이슬람 세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와 함께 이슬람에 대한 연구도 다양한 목적으로 촉진되었다. 어떤 목적으로 행해졌든 연구 성과는 기존의 오해와 편견을 제거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이슬람에 대한 교회의 입장에는 오랫동안 특별한 변화가 없었다.
〔변화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서구 문명의 우월성과 윤리적 정당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1 · 2차 세계대전, 그리고 이어 전개된 동서 양 진영의 군비 경쟁으로 인류 공멸이라는 위기 의식이 팽배해지면서 종교적 냉전 분위기에도 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교회 내부의 자성(自省)과 종교간 화해와 협력을 위한 각종 노력이 이어졌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는 이러한 변화를 돌이킬 수 없는 대세로 굳히는 데 기여했다. 〈교회 헌장〉(Lumen gentium)은 무슬림들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였다. "구원 계획은 창조주를 알아 모시는 사람들을 다 포함하며, 그 가운데에는 특히 무슬림도 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간직하고 있다고 고백하며, 마지막 날에 사람들을 심판하실 자비로우시고 유일하신 하느님을 우리와 함께 흠숭하고 있다"(16항) 이를 통해 이슬람이 믿고 있는 "알라"와 교회가 믿는 "하느님"이 동일한 분임을 인정하고 있다.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Nostraaetate)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교회는 또한 무슬림도 존중하고 있다. 그들은 살아 계시고 영원하시며 자비로우시고 전능하신 하느님, 하늘과 땅의 창조주,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유일신을 흠숭하며,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순종하였듯이 그들 신의 감추어진 뜻에 충심으로 순종하며, 아브라함에게서 이슬람 신앙을 이어받았다고 즐겨 주장한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예언자로 받들며, 또 그분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를 공경하여 때로는 그분의 도움을 정성되이 간청하기도 한다. 또한,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부활시키시어 공정하게 갚아 주실 심판의 날을 기다린다. 따라서 그들은 도덕 생활을 존중하며 특히 기도와 자선과 단식으로 하느님을 섬긴다. 여러 세기에 걸쳐 그리스도인과 무슬림 사이에 적지 않은 불목과 적대가 있었지만, 거룩한 공의회는 과거를 잊어버리고 서로 이해하도록 진심으로 노력하며 온 인류를 위하여 사회 정의와 도덕 가치, 평화와 자유를 공동으로 수호하고 증진하기를 모든 사람에게 권고한다"(3항). 이 항에서는 그동안 무시했거나 인정하려하지 않았던 사실, 즉 두 종교가 공유하고 있는 믿음을 확인하였다. 즉 인류의 역사 속에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 아브라함과 예수의 신성함, 부활과 심판에 대한 기대, 윤리적이고 경건한 삶의 추구 등이다. 더 나아가 교회는 무슬림들에게 과거의 적대감을 청산하고 "사회 정의와 도덕 가치, 평화와 자유"를 옹호하고 촉진시키는데 있어서 함께 노력하자고 제안하였다.
이슬람에 대한 접근 노력은 1964년 설립된 교황청의 '비그리스도교 사무국' (현 종교 간 대화 평의회)이 여러 가지 대화 프로그램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교황청 직속 아랍 문제 연구소' (Pontificio Instituto de Studi Arabi)가 1964년 확장 · 개편되어 아랍 문제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1962년에는 작은 형제회에서 '종교 및 사회 문제 연구소' (The Institute for Religious and Social Studies)가 개설되었고, 이보다 앞서 도미니코회에서는 이집트 카이로에 '동방 문제 연구소' (L'Institut Dominicain d'Etudes Orien-tales du Cairo)를 개설하였다. 이를 통해 무슬림 문제를 연구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한편, 대화의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와 요한 바오로 2세가 무슬림들에게 보낸 각종 축하 메시지와 1979년 터키, 1980년 케냐, 1981년 파키스탄, 2001년 시리아 등 이슬람 세계를 순방한 자리에서 행한 각종 연설을 통해서도 대화 원칙을 세우고 있다. 1998년 무슬림 단식 축제(라마단)를 맞아 교황청에서 발표한 메시지에는 그동안의 노력과 대화 원칙이 언급되어 있다.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이 모두 인류의 한 가족인데 서로 모르는 체하고 인사도 나누지 않고 더욱 실망스럽게는 서로 말다툼이나 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습니까?··종교인들이 대화를 나누는데, 특히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의 대화는 오늘과 내일을 위한 '희망의 상징' 이 됩니다. ···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은 인류에게 희망을 북돋아 주기 위하여 다같이 힘을 모아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점을 인식하고 있지만, 서로 상대방을 존경하며 하느님이 가르쳐 주신 진정한 형제애를 실천하는 '평화의 제휴' 를 이룩해야 마땅합니다."
〔전 망〕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대화 노력이 순조롭게 추진되지만은 않을 전망이다. 양 공동체 내에 축적된 반목과 갈등의 앙금, 그리고 '전의' (戰意)를 가다듬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근본주의적 저항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이 세계적으로 규모가 가장 큰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 두 종교가 사회 정의와 평화를 이상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 때문만이라도, 가톨릭 교회를 비롯한 그리스도 교회와 무슬림 사이의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은 역사적으로는 물론 신학적으로도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 교회와 타종교 ; 근본주의, 이슬람교의 ; 메카 ; 모스크 ; 무슬림 ; 무함마드 ;종교 간 대화 ; 코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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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영〕Islam
I . 종교학에서의 이슬람 · II . 가톨릭 입장에서의 이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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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창시자인 무함마드와 예언자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