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한국인 세례자요,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의 한 사람. 세례명은 베드로. 본관은 평창(平昌)이고,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蔓川)이다. 그는 일찍부터 서양의 수학에 관심을 가져 왔으며, 1784년 봄 북경에서 선교사들로부터 세례를 받은 뒤에 귀국하여 같은 해 겨울에 동료들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였다. 이후 그는 오랫동안 교회의 주역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반대파들로부터는 천주교 사건이 있을 때마다 그 원흉으로 지목되어 어려움을 겪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체포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참수되었다.
〔가문과 천주교 수용〕 이승훈은 1756년(영조 32) 9월 한양 반석방(盤石坊) 중림동(中林洞)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제물포에서 거주하다가 조부 이광직(李光櫻, 1692~1769)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부친 이동욱(李東郁, 1738~1794)이 이용휴(李用休)의 딸인 여흥(驪興) 이씨와 혼인하면서 뒷날 기호 남인의 중심 인물이 되는 이가환(李家煥,1742~1801)이 이승훈의 외숙이 되었다. 그 결과 이승훈은 외가쪽인 성호(星湖) 이익(李潔)의 학문을 잇게 되고, 이익의 제자인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이나 이가환의 학문을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또 그 자신은 양근 마재〔馬峴〕에 살던 정재원(丁載遠)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정약전(丁若銓) · 약용(若鏞, 요한)형제와 처남 · 매부 사이가 되었다.
이승훈은 한때 이헌경(李獻慶)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다가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이때부터 이벽(李檗, 요한) · 이기경(李基慶) 등 당시에 유명했던 기호 남인의 젊은 재사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이벽은 "평소 학문과 궁리를 좋아하는 이승훈을 상당히 의지하였다" 고 한다. 한편 이승훈은 1795년에 천주교와 관련하여 예산으로 유배되었다가 돌아온 뒤에는 안정복(安鼎福)의 고제로서 척사에 앞장섰던 황덕길(黃德吉)에 아들을 보내 수학토록 하고, 유학의 길을 고수하고 있던 심유(沈淑)와 혼인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는 주변 사람들에게 효사지계(梟徙之計)로 인식되었다.
일찍부터 이승훈은 외숙 이가환의 영향을 받아 서학서들을 접하였으며, 그중에서도 서양의 천문 · 역상, 특히 수학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기하학에 정통하였던 이가환은 이미 1778년에 정조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利瑪竇)의 역법에 대해 질문하자, 리치와 아담 샬(AdamSchall, 湯若望)의 역법을 들어 이에 답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승훈의 학문 성향이 주자학 일변도에서 이미 벗어나고 있었다는 점을 잘 설명해 주고 있는데, 이는 스승 권철신이나 녹암계 인물들의 학문 성향과 유사하였다. 바로 이러한 환경 안에서 그는 북경에 있는 서양 선교사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1783년 말에는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입연(入燕)하는 부친 이동욱을 따라 북경에 갈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 무렵 천주교 교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지우 이벽이 이승훈을 찾아왔고, 북경에 가게 되면 선교사들로 부터 영세를 받고 서양 서적을 얻어오도록 부탁하였다. 이때 이승훈은 그의 제의를 기꺼이 수락하였다. 그런 다음 채제공(蔡濟恭)에게 부연서(赴燕序)를 받고, 이기경에게 서적 구입에 필요한 자금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12월 21일 북경에 도착한 이승훈은 즉시 북당(北堂)을 방문하여 선교사들을 만났으며, 특히 궁정의 수학자로 활동하였던 예수회 선교사 그랑몽(J.J. de Gram-mont, 梁棟材 신부와 가까워지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필담을 통해 그에게 서양 수학을 설명해 주면서 동시에 교리도 가르쳐 주었으며, 이러한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이승훈은 점차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당시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직접 들어갈 수 없었던 조선의 젊은 학자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랑몽 신부는 '시기적으로 이르다' 는 일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1784년 2월경 이승훈으로부터 부친의 동의를 확인한 뒤, 그의 세례명을 '베드로' 로 정하고 세례를 주었다. 이로써 그는 한국인 최초의 세례자가 되었다.
〔교회 창설과 가성직제〕 이승훈은 3월 말에 귀국하면서 북경에서 얻은 서양 기기와 교회 서적을 함께 가지고 들어왔다. 그중에서 교회 서적들은 초기의 신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반면에 한편으로는 이승훈의 죄목이 되기도 하였다. 이후 이승훈은 자신이 가져온 서적들을 이벽에게 빌려 주었고, 이벽은 이를 오랫동안 연구한 뒤 스승 권철신과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형제를 비롯하여 이가환, 정약전 · 약용 형제들을 만나 천주교 교리에 대해 토론하거나 그들에게 천주 신앙을 일깨워 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이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이겠다는 동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에 이승훈 과 이벽은 세례식에 대해 협의한 뒤, 1784년 겨울에는 마침내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의 주도로 첫 번째 세례식을 거행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이다.
당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이벽과 권일신 · 정약용이었다. 동시에 그들은 친지들에게 교리를 전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결과 홍낙민(洪樂敏, 루가), 최창현(崔昌顯, 요한), , 김범우(金範禹, 토마스) 등이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권철신을 비롯하여 충청도의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 전라도의 유항검(柳恒儉,아우구스티노)도 영세를 하였다. 이제 천주교의 종교 운동은 이승훈과 이벽의 주도 아래 빠르게 정착되어 갔고, 김범우가 명례방에 있던 자신의 집을 집회 장소로 제공해 줌으로써 초기의 신앙 공동체는 수표교에서 명례방으로 이전되었다.
이후 이승훈은 자주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첫 번째 시련은 1785년 봄 명례방에 있던 집회가 형조의 금리들에게 발각되면서 이승훈을 비롯하여 권일신 ·이벽 · 정약종 · 이윤하(李潤夏, 마태오) 등이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고, 김범우가 단양으로 유배된 추조 적발 사건(秋曹摘發事件, 즉 明禮坊事件)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부친이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고 분서(焚書)의 시를 짓자, 이승훈은 〈벽이문〉(闢異文)과 〈벽이시〉(闢異詩)를 지어 천주교를 배척한다는 뜻을 주변에 보여 주어야만 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 직후 이승훈은 다시 신앙 생활을 회복하였고, 1786년 봄에는 동료들과 함께 가성직자단(假聖職者團)을 조직하였다. 이때 가장 먼저 이승훈이, 그리고 홍낙민 · 권일신과 정약전 등이 신부로 임명되었으며, 최창현은 교회의 총회장이 되었다. 또 이존창 · 유항검도 신부로 임명되었던 것 같다. 이후 가성직자단은 1787년에 정약전이 그 오류를 지적함으로써 해체되었고, 이승훈과 지도층 신자들은 교회를 위해 성직자 영입 운동(聖職者迎入運動 추진하게 되었다. 그에 앞서 이승훈은 1787년 반촌(泮村)에서 정약용과 교리를 연구하다가 이기경에게 적발되었는데, 이 사실이 이듬해 봄 홍낙안(洪
樂安)의 폭로에 의해 밝혀지면서 다시 한 차례 어려움을 겪어야만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반회 사건(泮會事件)이다.
〔교회 이탈과 시련〕 이승훈은 25세 때인 1780년(정조4)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리고 10년 후인 1790년에서야 음서로 의금부 도사가 되었으며, 다음해 서부도사(西部都事)를 거쳐 6월 24일 평택 현감(平澤縣監)을 제수받았다. 그러나 이 해에 진산 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면서 이승훈은 평택에서 소환되어 문초를 받아야 하였고, 그의 서양 서적 구입(購書事)과 반회 사건을 탄핵하는 상소가 연이어 나오게 되자 조정에서는 1791년 11월 8일 그의 관직을 삭탈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훈은 1792년 초 불배성묘(不拜聖廟) 문제로 다시 한 차례 곤욕을 치러야만 하였다. 이 사건은 그가 평 택에 부임한 뒤 향교의 문묘에 배례하지 않았다는 통문이 나돌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실제로 당시 교회 안에서는 북경 주교의 지시에 따라 공자 숭배와 조상 제사가 금지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들로 인해 이승훈은 점차 교회 활동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1794년 말에 이루어진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의 입국 때에도 그는 참여하지 않았다. 주 신부의 입국 소식을 들은 이승훈은 이 사실을 고변하려고도 하였으며, 회두하고 교회 활동에 참여할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다음해 여름 을묘박해(乙卯迫害)가 일어나 주 신부가 피신하고 윤유일 등이 순교하자 다시 움츠러들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를 배척하는 이들은 이승훈과 함께 이가환 · 정약용을 '사학(邪學)의 3흉' 으로 지목하였고, 서적 구입과 반회 사건, 서적 간행 등을 이승훈의 3대 죄안으로 거론하면서 공격 하였다. 결국 정조는 이를 받아들여 7월 25일에 이가환을 충주 목사로, 정약용을 금정 찰장으로 좌천시키고, 다 1795년 예산의 배소에 도착한 이승훈은 천주교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유혹문〉(煽惑文)을 지어 널리 배포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봄에는 유배에서 풀려 나게 되자 〈주자백녹동연의〉(朱子白鹿洞行義)를 지어 유학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애써 밝히려고 하였다.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황덕길이나 심유와 관계를 맺고자 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이승훈은 다시 사학의 원흉으로 지목되었으며, 2월 10일에 체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된 후 18일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국문을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특히 예산 유배 이후의 일을 거론하면서 발명하려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2월 26일(양력 4월 8일)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을 받았다.
이승훈의 시신은 제물포의 반주골(현 인천 남동구 만수동)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180년 뒤인 1981년에 현지에서 그의 유해가 발굴되어 천진암으로 이장되었으며, 반주골의 무덤 자리 앞에는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한편 그의 셋째 아들 신규(身逵, 마티아, 일명 基元)는 1816년경 정하상(丁夏祥, 바오로)의 인도로 천주교에 입교하였으나, 여러 차례 시련을 겪다가 1868년에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동시에 그의 아들 아들 재겸(在謙)도 유배 도중에 사망하였다. 또 이승훈의 손자인 이재의(李在誼,토마스, 일명 在容)는 1837년 정하상의 인도로 세례를 받은 뒤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의 복사로 활동하면서
한때는 신학 교육을 받았으며, 기해박해 후에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는 1868년에 체포되어 신앙을 거부하였지만 처형되었다.
〔유저와 순교 여부〕 현존하는 《만천유고》(숭실대학교 기독교 박물관 소장)는 비록 이승훈의 호인 '만천' 이 제목 안에 들어 있지만 실제로는 여러 사람의 저술을 모은 편찬물이며, 그 내용에 이승훈의 저술이 들어 있는지도 밝히기 어렵다. 또 그 저술들의 주인공이나 편찬자, 편찬 연도도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만천유고》를 토대로 이승훈의 학문과 사상을 가늠해 볼 수는 없다.
현재 이승훈의 저술 중에서 그 내용 일부라도 확인 가능한 것으로는 공술기에 나타나는 〈벽이문〉과 〈벽이시〉,〈유혹문〉과 〈주자백녹동연의〉뿐이다. 그러나 이들 내용은 그가 '천주교를 배척했다' 는 발명의 증거로 내세운 글들이므로 그의 신앙을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다만, 뒷날 이만채(李晩采)가 지적한 것과 같이 1785년에 지은 〈벽이시〉 중의 일부는 그가 여전히 천주교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내용으로 볼 수도 있다. 반면에 천당 지옥설을 비판하고 위천주횡행설(僞天主橫行說)을 거론한 1785년의 〈벽이문〉, 천주교의 주요 교리를 비판한 1795년의 〈유혹문〉은 척사론에 해당한다.
이승훈은 1801년의 문초 과정에서 천주교의 지도층을 밀고하도록 강요받았지만, 결코 누구의 이름도 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신앙을 분명하게 증거한 적도 없다. 한편 주문모 신부는 문초 과정에서 1794~1795년 당시의 이승훈에 대해 '반교' (叛敎)라는 말을 사용하였으나, 이는 신앙을 버렸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교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은 이와 관련하여 "이승훈은 1791년 이후 신앙에 전심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은 이승훈의 순교 여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였다. 따라서 그의 순교 여부는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하여 앞으로 더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 《만천유고》 ; 명례방 공동체 : 신유박해 ;이벽 ; 한국)
※ 참고문헌 《蔓川遺稿》/ 丁若鏞, 《與猶堂全書》/ 《邪學徵義》/ 이기경 편, 《闢衛編》/ 이만채 편, 《闢衛編》/ 《推案及鞫案》/ A. Daveluy,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1859년 필사본), M.E.P. 소장/―, Notes pour I'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1860년 필사본), M.E.P.소장/ 《한국 천주교회사》 상/ 柳洪烈, 〈李承薰과 그 後孫들의 殉教〉,《史學研究》 18, 1964/ 朱在用, 《韓國 가톨릭 史의 擁衛》,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0/ 崔奭祐 · 卞基榮, 〈한국 천주교회의 起源 문제〉,《司牧》 144, 1991/ 李元淳, 〈李承薰 後孫의 天主信仰一 迫害期의 後孫들〉, 《교회사연구》 8집, 1992/ 趙珖, 〈辛酉敎難과 李承薰〉, 《교회사연구》 8집, 1992/ 崔奭祐, 〈한국 교회의 창설과 초창기 李承薰의 교회 활동〉, 《교회사 연구》 8집, 1992/ 천주교 수원 교구, 《한국 순교자시복 시성을 위한 세미나 :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과 천주 신앙》,2002/ 車基真, 《조선 후기의 西學과 斥邪論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車基真〕
이승훈 李承薰(1756~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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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이승훈의 세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