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농촌 산업 개발과 사회 복지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천주교 제주교구의 법인 기관. 주보는 세계 농민의 주보인 '성 이시돌' 이고, 설립자와 현재의 법인 이사장은 아일랜드 출신인 맥그린치(P.J. McGlinchey, 파트리치오, 임피제) 신부. 사업 소재지는 제주도 북제주군 한림읍 금악리 · 대림리 · 한림리. 한국 전쟁 후인 1957년에 설립한 4-H 클럽과 가축 은행, 1959년에 설립한 직조강습소, 1961년에 조성한 한림 목장 등을 모체로 하고 있으며, 1962년 10월 15일 현재의 협회가 설립되어 26일에 재단 법인 인가를 받았다. 현재 산하 기관으로는 한림 수직사, 성 이시돌 중앙 실습 목장, 성 이시돌 사료 공장, 성 이시돌 의원, 성 이시돌 양로원, 금악 성 이시돌 어린이 집, 성 이시돌 노인 복지 회관(경로당 및 노인 대학), 성 이시돌 사회 교육 연수원(피정 센터 및 젊음의 집)등이 있으며, 그 동안 폐쇄 및 이전된 기관으로는 성 이시돌 농업 기술 연수원, 양돈 목장, 치즈 공장과 한림 성이시돌 유치원, 신창 성 이시돌 유치원 등이 있다.
〔협회 설립 과정〕 1954년 4월 17일 제주의 신설 한림 본당에 부임한 맥그린치 신부는 제주의 농촌 사회 현실을 체험해 나가는 동안 장기적인 빈농 구호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미국 농림성에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세계 각처를 돌아다니며 의연금을 모금하였다. 그런 다음 1957년 3월부터 영농 개선을 목적으로 청소년들의 4-H 클럽을 조직하였으며, 그들과 함께 닭 · 칠면조 · 토끼 등을 사육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맥그린치 신부는 개량 돼지를 들여와 '가축 은행' 을 만들고, 1959년 3월에는 한림읍 금악리에 2층의 '성 이시돌 센터' 를, 대림리에 '직조 강습소' (한림 수직사의 전신)를 개설한 뒤 일본에서 면양을 들여와 사육하는 한편 주부와 소녀들에게 직조 기술을 가르쳤다. 맥그린치 신부는 이후에도 제주의 농촌 부활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다. 1960년 5월부터 다음해 8월까지 서양 각국을 순방하는 동안 독일의 미씨오(Missio)와 미국 가톨릭 구제회(C.S.R.)로부터 후원과 원조를 약속받고 돌아와 1961년 11월 금악리에 '한림 목장' (성 이시돌 중앙 실습 목장의 전신)을 개설하고, 그 안에 '농업 훈련 센터' (1970년 성 이시돌 농업 기술 연수
원으로 개칭되어 1980년까지 운영됨)를 설립하였다. 이때부터 목장을 중심으로 목야지 개량 사업, 양돈 및 비육우 ·면양 사육 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훈련 센터에서는 개량 농기계 사용 및 정비 기술 교육이 실시되었다. 이들 사업 중에서 직조 강습소의 운영 책임은 1962년 성 골롬반 외방 선교 수녀회에 위임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농촌 산업 개발 사업이 정착되어 가고 도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게 되자, 맥그린치 신부는 그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1962년 10월 15일에 '성 이시돌 농촌 산업 개발 협회' 를 설립하였고, 26일에는 그 재단 법인 인가를 받았다(농수산부 허가 11호). 이어 다음해 3월에는 미정부로부터 P-480 제2관 사료용 옥수수 도입 승인을 취득하였으며, 금악리 중산간 지역을 중심으로 '개척 농가 조성 사업' 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목장과 훈련 센터에서 교육을 받은 세대들이 새로 조성한 농촌 주택 단지로 입주한 뒤 양농 · 낙농 · 양계 사업을 통해 자립 터전을 닦아 나가게 되었다. 또 같은 해 5월 7일 사료용 옥수수 1차 분이 부산항에 하역된 것을 비롯하여 옥수수와 개량 농기계가 추가로 도입되었고, 1964년 4월에는 한림읍
한림리에 건립된 '배합 사료 공장' (이시돌 사료 공장의 전신)을 통해 염가 사료를 농가에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협회의 성장과 현재〕 이시돌 농촌 산업 개발 협회에서는 1969년 4월 뉴질랜드에서 면양과 종돈을 도입하는 한편 9월에는 제주도 축정 당국과 제휴하여 개척 단지 조성 사업에 따른 자금 및 기술 교육을 지원하였다(주축 단지 40세대, 양잠 단지 90세대). 아울러 오스트레일리아 · 뉴질랜드 · 아일랜드 등지에서 축산 기술 요원을 초빙하여 제주 · 전라 · 강원도 지역의 축산 농가들에게 꾸준히 기술 지도를 실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1970년 4월 15일에는 대림리에 '성 이시돌 의원' 을 개원하고 극빈자들에게 무료 진료 혜택의 기회를 제공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진료 사업은 시작부터 지방 사회 주민들에게서 아주 좋은 호응을 얻었다. 이후로도 개발 협회에서는 농가 종축 개량용으로 소와 종돈을 꾸준히 도입해 나가는 한편 양돈 사업에 뜻을 가진 사람들을 모집하여 기술 · 시설 · 사료를 지원하고 별도로 '양돈 협업 농가 (200세대)를 조성하였다. 그리고 1976년 12월에는 마침내 개척 농가 조성 사업을 완료하였는데, 이때 이 지역에 입주한 총 세대 수은 7개 지구에 98세대였다. 맥그린치 신부는 이러한 공로를 높이 인정받아 1966년 5월 16일 5 · 16 민족상 장려상(산업 부문)을 수상한 것을 비롯하여 1972년 6월 5일 대한민국 석탑 산업 훈장을, 1975년 8월 31일 막사 이사이상(국제 이해 부문)을 수상하게 되었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에 들어와 농촌 산업 개발 협회의 사업들은 많은 변모를 보이게 되었다. 우선 1970년대 말에 시작된 양돈 사업 파동 때는 목장의 양돈 사업과 연수원 운영이 어려움에 직면하자, 연수원을 폐쇄하는 대신 1981년에 기존의 건물을 이용하여 '성 이시돌 피정의 집' (성 이시돌 사회 교육 연수원의 전신)을 개원하였다. 그리고 농촌 복지 활동에 관심을 두고 같은 해 11월 5일에는 이시돌 목장 내에 '성 이시돌 양로원' 을 개설하여 1984년 2월에 인가를 받았으며, 1982년에는 대림리에 경로당과 노인 학교를 열었다. 이를 위해 협회에서는 1985년 5월 17일 '성 이시돌 노인 복지 회관' 을 개관함과 동시에 노인 학교를 '성 이시돌 노인대학' 으로 개칭하였다 (1988년에 인가됨). 그 동안에도 협회에서는 1981년부터 1983년까지 소와 면양을 들여와 제주도에서 추천한 무축 농가 200세대에게 분양하였다.
1985년 협회에서는 유아 교육 사업도 시작하였다. 이때 먼저 '금악 성 이시돌 유아원' (2학급 80명, 현 금악 어린이 집의 전신)이 문을 열었고, 이어 '한림 성 이시돌 유치원' (2학급 80명)과 '신창 성 이시돌 유치원' (1학급 40명)도 개원하였다. 또 협회에서는 1986년 2월에 치즈 가공 공장을 개장하여 운영하다가 1991년 10월에 제주 낙농 협동 조합으로 이관하였다. 한편 1980년부터 시작된 피정의 집은 전국의 신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꾸준히 성장하게 되었다. 이에 협회에서는 1993년 10월 14일 북제주군 교육청으로부터 청소년들을 위한 '성 이시돌 사회 교육 연수원' (일반 명칭은 '젊음의 집') 인가를 받은 뒤 살레시오 수녀회에 그 운영 책임을 위임하였으며, 1994년 10월 15일 교구장 김창렬(바오로) 주교의 집전으로 제1관 축복식 및 개원식을 가졌다. 이 연수원의 제2관은 1999년 5월 19일에 완공, 축복되었다.
이처럼 이시돌 개발 협회는 산하에 여러 기관을 두고 1962년 이래 오랫동안 성장과 변모를 거듭해 오면서 제주 천주교회는 물론 지역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특히 농촌 산업 육성 활동과 사회 복지 사업은 제주 도민들로부터 언제나 큰 호응을 받았으며, 지역 사회의 복음화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설립자 맥그린치 신부는 1982년 11월 30일 내무장관상, 1990년 10월 27일 적십자 봉사상 등 여러 차례에 걸쳐 공익 부분 봉사상을 수상하였다. 한편 개발 협회에서 1991년 이시돌 목장 안에 조성한 '삼뫼소 은총의 동산' 과 2001년에 완공한 그 이웃의 '삼위 일체 대성당' 은 신자들의 기도와 순례 장소로 자주 이용되고 있다. (→ 제주교구) 〔車基真〕
이시돌 농촌 산업 개발 협회 ― 農村産業開發協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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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