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세례명은 마티아. 본관은 평창(平昌). 한국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인 이승훈(李承薰, 베드로)의 셋째 아들이며, 정약용(丁若鏞, 요한)의 생질. 아버지 이승훈의 비참한 죽음으로 친척의 대다수가 천주교에 반대하는 뜻을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이택규(李宅逵, 이승훈의아들)와 더불어 열심히 수계(守誡)하며 신앙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는 문재(文才)와 의술(醫術)에 뛰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1839년(헌종 5)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일어나자 얼마 동안 신부들의 일을 보살핀 후 용인, 진천 등지로 피신하였다(달레의 책에서는 강원도 춘천 고을의 말고개로 피신했다고 함). 그곳에서 김순성(金順性, 요한, 일명 여상.배교자요 밀고자)의 밀고와 김진서의 배신으로 그 해 9월에 체포되었다. 이때 그의 학문과 의술이 사회에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유로 목숨을 구했으나 그 대신 1년이상을 포졸들과 더불어 다니면서 천주교 신자들을 수색하는 일을 담당해야 했다.
석방된 후 인천 앞바다의 영종도에 있는 옛 제자들에게 가서 1846년(헌종 12)까지 살았다. 여기서는 외교인들과만 교류하며 지냈다. 1846년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가 체포되었을 때 관련되어 다시 체포되었다. 당시 체포는 조카 이재의(李在誼, 토마스)와의 혈연 관계 때문으로 처음에는 용감히 신앙을 고백하였으나 김대건 신부, 현석문(玄錫文, 가롤로) 등의 다른 8명의 천주교 신자들과는 달리 결국 배교하고서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그는 천주교를 계속 믿으며 신앙 생활을 하다가 1868년 이재의 · 권복(權福) 등과 함께 체포되어 '모반부도죄' (謀叛不道罪)라는 죄목으로 그 해 5월 28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하였다. (→ 서소문 밖; 이재의 ; 이택규)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上 · 下/ 李晚采 편, 《闢衛編》/ 《日 省錄》/ 《치명일긔》. 〔孫淑景〕
이신규 李身逵(1794~1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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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