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순교한 한국인. 일본 교회 205위 복자 중의 한 사람. 12세의 어린 나이 때부터 구령(救靈)의 진리를 찾기 시작한 가이오는 속세를 떠나 산속의 한 동굴에서 은수자처럼 생활하면서 필요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취하지 않는 철저한 극기와 고행으로 7년을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던 중 20세가 되던 해 어떤 발현(發顯) 속에서 그가 다음해에 바다를 건너가 많은 시련을 겪은 후 소원을 성취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실제로 그는 다음해 일본군에게 붙잡혀 일본으로 끌려가게 되었고, 도중에 쓰시마(對馬)에서 난파를 당했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교토(京都)에 이를 수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여주인의 친척인 어떤 기리시탄의 도움으로 건강을 되찾게 되어 영혼의 구원을 얻고자 그 곳의 한 절에 들어갔지만, 승려들의 큰 존경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 이 무렵 어떤 기리시탄이 그를 예수회 성당으로 인도하여 천주교 교리를 배우게 하였다. 영세한 후 그는 소원이 성취되었음을 깨닫고 완전한 행복을 느끼며 예수회 신부들의 하인이 되기를 자청하였다. 그의 이 소원은 1600년경에야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그는 일본인과 한국인의 전도사로, 특히 예수회의 모레혼(Morejon) 신부를 도와 오사카(大阪) , 사카이(堺) 등지에서 열심히 전교하였으며, 그중에서도 나환자를 돌보는 것을 제일 좋아했다.
1614년 한때 가이오는 필리핀으로 추방되기도 했었으나 2년 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고, 이래 7~8년 간 이전처럼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전교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전교열 때문에 그는 신자들 사이에서 '소사도' (小使徒)로 불렸다. 그러던 중 그는 감옥에 있는 신자들을 위문하러 갔다가 체포되었다. 이때 관리들이 가이오에 대한 존경심에서 만일 이후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지 않고 전교를 중단한다면 그를 석방하겠다고 말하였지만, 그는 죽는 한이 있어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그는 거의 죽게 될 정도로 옥고와 궁핍을 겪어야 하였다. 마침내 사형이 선고되자 그는 시 한 수를 지어 영혼의 기쁨을 표현하였다. 시를 쓸 만큼 그는 일본어와 한문에 능통했던 것이다.
1624년 11월 5일 가이오는 형장으로 끌려갔다. 관리들은 그것이 개선자처럼 보일까 두려워 가이오에게 침묵을 지키고 화려한 옷을 입지 못하게 하였다. 또 될 수 있는 한, 그를 오래 괴롭히기 위해 왼손만을 약간 묶은 채 장작더미에서 멀리 있게 하였다. 그러나 가이오는 불굴의 용기를 보이며 불속에서 그의 순교를 완수하였으니, 이때 그의 나이 53세였다. 순교 후 그의 시체는 바다에 던져졌다. 그리고 1867년 205명의 일본 순교자 안에 포함되어 시복되었다. (→ 일본의 한국인 순교자)
※ 참고문헌 Pagés 1, pp. 599~601/ 宗門史, 中, pp. 339~341, 352~353/Profillet 1, pp. 77~80/ Anesaki, n. 178. 〔崔奭祐〕
가이오 Caio(1572?~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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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1967년 오이타에서 발굴된 일본 순교자들의 유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