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종의 계몽주의 신론으로써 종교와 이성의 자율성을 통일하려는 노력. 하느님의 존재와 그가 세계의 창조자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자신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합법칙적인 이성을 통해 규정된 세계의 창조주로서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조.
[개념과 정의] 기본 관점 : 이신론에서 하느님은 세계에 대해 진정한 관계를 갖지 못하고, 창조 행위 이후 더 이상 역사 안에 개입하지 않는다. 즉 하느님은 세계 밖에 있는 창조주이고, 더 이상 세계에 자신을 계시하지 않을 뿐더러, 역사의 어떠한 사건들이나 발전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기적의 가능성 또는 그 어떠한 초자연적인 계시도 거부된다. 따라서 계시 종교로써의 그리스도교 대신에 이성 종교 또는 자연 종교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종교의 본질은 이성 질서에 따른 도덕적 행위가 중요한 것이 된다. 이러한 입장의 이신론 신봉자들의 대부분은 소위 '자유 사상가 (Frei-denker, freetinker)들이라 불리기도 한다.
어원과 배경 : 이신론은 어원적으로는 하느님이란 뜻의 라틴어 '데우스' (Deus)에서 유래한다. 이 용어는 그리스어 '테오스' (860g)로부터 유래하는 유신론(Theis-mus)과 마찬가지로 16세기에 형성되었다. 이 두 관점들은 18세기까지 무신론(Atheismus)과 반대 개념으로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이신론은 15세기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종교 개혁 이념에 새로운 활력을 주었다. 특히 이신론은 16세기 중반에 종교 개혁 신학(특히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은 지역에서 발생하였다. 즉 인문주의적 르네상스 전통이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형태로 이신론적 현상에 전승되었다는 의미에서, 르네상스는 '이신론의 어머니' 인 셈이다. 또한 근대의 계몽주의 정신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신론을 '계몽주의 종교 철학' (E. Troeltsch)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신론은 그 복잡성 때문에 정의를 내리는 데 어려움이 있다. 일반적으로 이신론은 이성적인 수단들을 동원해서 계시된 종교의 최상의 존재에 도달하려 시도하는 것으로써, 종교 개혁 이후 각각 다른 신조들로 갈라진 신앙의 형태들에 대해 근원적이고 비판적으로 접근하려 시도하였다.
범신론과 유신론과의 관계 : 17세기에 오늘날 말하는 이신론이 범신론(Panthesimms)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즉 이신론과 범신론은 17세기 중반까지는 구분 없이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스피노자(Banuch de Spinoza, 1632~1677)는 범신론적 신관 때문에 이신론자로 간주되었고, 영국의 전형적인 이신론자인 톨런드(J. Toland, 1670~1722) 또한 범신론자라 불렸다. 17세기 후반에 들어서서 이신론 혹은 이신론자(Deist는 유신론 혹은 유신론자 (Theist)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당시 그 차이란 단지 언어학적 어원의 차이뿐이었다. 그 후 18세기 중반부터 이신론과 유신론은 개념적으로 구분되기 시작하였다. 우선 이신론은 창조된 세계를 자연법에 양도하고, 그 세계의 발전 즉 역사 발전에는 더 이상 개입하지 않으면서 세계 밖에 존재하는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을 강조하였다. 반면, 유신론은 인격적이고 자기 원인인 세계의 창조주와 조정자로서의 하느님을 강조하였다.
예를 들어 디드로(D. Diderot, 1713~1784)에게 있어서, 이신론자는 계시를 거부하고 유신론자는 이를 인정한다. 칸트(I. Kant, 1704~1804)는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이신론자는 '초월적' (transzendental) 신학을 알고 있으며, 유신론자는 '자연적' (natiirlich) 신학을 알고 있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그의 유명한 명제가 나왔는데, 즉 "이신론자는 하나의 하느님을 믿으나, 유신론자는 하나의 살아있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의 관계 를 엄격히 구분하였던 합리주의(Rationaisimus) 사고 안에서 보편적인 철학 개념으로써의 이신론은 일반적으로 '철학적 신학' 을 지칭하였다. 이신론자들에 따르면 하느님은 종종 시계를 만드는 장인(Uhnmacher)과 비교되기도 하는데, 장인은 '세계 시계' (Weltuhr)를 만들고 움직이게 한 이후에는, 스스로 움직여 가는 시계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국의 이신론] 복합적인 정신사적 운동으로써의 이신론은 영국의 계몽주의 초기부터 18세기 후반까지 많이 언급되었다. 그 황금기는 대략 1650~1750년대까지 이다. 이신론의 발생은 영국의 정치적 · 역사적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17세기 영국의 이신론은 우선 종교적 관용(Toleranz)과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중심으로 발생했고, 18세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성서 비판과 신앙의 합리적 · 도덕적 정화에 대한 문제가 주요한 관심사였다.
허버트 : 종교 철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 체버리(Cherbury)의 허버트(E. Herbert, 1583~1648)를 영국 이신론의 창시자로 여긴다. 그의 관심사는 특별한 신앙 형태와 는 상관이 없는 모든 인간의 구원이었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는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처럼 모든 학문을 기초 지우는 최초의 앎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생래적으로 지니는 공동의 인식(notitiae commu-nes)이 중요한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각 종교 의 변하지 않는 이성적 핵심, 즉 '보편적인' 종교적 진리의 근본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첫째, 최상의 존재(numen), 즉 신은 실재한다. 둘째, 이 최상의 신성은 승배되어야 한다. 셋째, 경건함과 결부된 덕목은 이 신적 예배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넷째, 죄인들은 참회와 개심을 통해 다시 선해져야 한다. 다섯째, 신의 선과 정의로부터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 즉 상과 벌이 도출된다.
허버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에서는 신앙의 사회적 유용성에 대한 물음이 그리스도교의 진리의 문제보다 우선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렸다. 이로써 이신론은 문화 발전의 잣대로써 진정한 종교를 파악하는 인문주의적인 특성을 계속 확장할 수 있었다. 허버트에게 있어서도 일반적인 이신론자들과 마찬가지로 종교와 윤리의 근거와 적법성을 위해서는 계시의 권위가 아니라, 이성적 범주들만이 용납된다. 즉 그는 이성의 종교를 대변하였고,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전통 중에서 초자연적 또는 비이성적인 요소들에 대해 반발하였다.
샤프츠버리 : 샤프츠버리(A.A.C, Shaftesbury, 1621~1683)는 "이신론이 그리스도교와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당대의 이신론 형태를 구분하면서, 이신론이 하나의 철학으로 존재할 것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그는 최상의 자연, 무한한 존재자 그리고 신성에 대해 언급하였지만, 섭리, 정신(Geist)을 통한 세계의 질서, 그리고 그 조정과 간섭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다신론(Polytheisus)과 무신론를 구별하였다. 즉 무신론자는 단지 고삐 풀리고 상처 입은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자이고, 다신론자는 마법이나 악마(demon)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에 따르면, 인간은 선한 기질(goodtemper)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는 신에 대한 "진정한 공경과 숭배를 위한 근본적인" 덕목을 필요로 한다고 하였다. 이로써 불확실한 선함, 자기 추구 대신에 덕목을 근거 지우는 모든 것, 즉 행복 또는 자기 향유(sel-enjiiyment)의 관점들이 들어섰다. 그리고 샤프츠버리의 업적은 다음과 같은 명제에 있다. 즉 인간의 도덕적으로 선한 행동은 이승 세계에서의 상벌이라는 종교적 관점 때문에 요청되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선한 행위는 그 자체로 상을 받을 만하고, 그리고 미래의 벌 또는 보복에 대한 믿음이 실제로 진정한 덕목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이신론] 인문주의의 전통 아래에서, 계몽주의 정신으로 종교간의 일치와 화해를 위한 입장을 정리하려던 일종의 철학적 신론인 영국의 이신론은, 1740년대를 경과하면서 그 활력을 잃어갔다. 그리고 당시 감리교의 등장과 함께 영국 교회사는 새로운 시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신론적 사고는 볼테르(Voltaire,1694~1778)를 통하여 프랑스로 넘어갔고, 백과 전서파의 디드로는 달랑베르(F. le. R. d'Alembert, 1717~1783)와 함께 이신론적 종교 비판의 근거에 관한 항목을 작성하였다. 프랑스의 백과 전서파는 그리스도교에 관한 항목을 작성하는 데 있어서 기본적으로 이신론적 종교 이해를 전제하였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이신론이 무신론과 유물론적 경향에로 이행되는 것이 특징적이었다. 사실 세계의 내적 또는 내재적인 합법칙성이 강조되면 될수록, 초월적 하느님의 수용은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이신론은 결국 무신론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이 우려되었다.
독일어 문화권에서 이신론은 합리주의 철학 사조 안에서 일반적으로 두 단계를 거치면서 전개되었다. 첫 번째는 17세기 고 프로테스탄트의 정통(alpprotestanische Ortho-doxie)의 시대이다. 이 시기 이신론자들의 이성적인 신론은 그리스도교의 신관에 대한 철학적 접근 또는 '자연신학' (Theologia naturalis)으로 인정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종종 비판적으로 자연주의자들이라 불렸다. 두 번째의 단계인 18세기는, 신학과 철학적 합리론의 역사가 밀접하게 맞물려 있었다. 이 시기에 영국의 이신론은 로크(J.Locke, 1632~1704)의 감각주의(Sensualsimm)에 관련된 형이상학에,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유물론적 관점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독일에서는 교회의 교리와 관심과 관련된 지식 체계가 고려되었다.
18세기의 독일에서 위대한 이신론자로 여겨진 사람은 라이마루스(H.S. Reimarus, 1694~1768)였다. 그는 기존 교회가 지닌 신앙의 오류를 논증하였고, 지속적으로 박해의 위협을 받는 이성적인 하느님 숭배에 대한 주장을 펴기 위해서, 영국 이신론자들의 비판적 성서 주석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리고 더 정밀하게 자연 신학을 발전시켰고, 보다 날카롭게 그리스도교의 계시 종교를 비판하였다. 영국의 이신론자들이 자연 종교를 계시 종교보다 시간적으로 앞선 것으로 이해한 데에 비해, 라이마루스는 자연 종교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우선적인 것이라 보았다. 즉, 자연 종교는 시간적으로 뒤늦게 나타난 계시 종교와 그 가르침의 역사적 원천이 아니라, 그리스도교라는 계시 종교 안에서도 끌어낼 수 있는 시간을 초월해 유효한 규범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라이마루스는 사도들이 그들의 저술에서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예수가 자신의 삶에서 실제로 말하고 가르쳤던 것에서 전적으로 구분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라이마루스의 입장을 받아들인 레싱(G.E. Le-ssing, 1729~1781)은 계시를 하느님의 교육 수단으로 보았다. 즉 계시 종교는 인류에게 역사적으로 필요한 교육적 기능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칸트는 흡(D.Hume, 1711~1776)에 반대하여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신앙의 실천적 합리성을 옹호하였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유신론자라 불리기를 원하였다. 비록 독일에서는 칸트의 인식론을 통해 이신론의 철학적 요소들이 문제시되기는 했어도 그의 종교론, 레싱과 헤르더(J.G. Herder, 1744~1803)의 역사 철학, 피히테(J.G. Fichte, 1762~1814) , 헤겔(G.W.F. Hegel, 1770~1831) 그리고 셀링(F.W.J von Schelling,1775~1854)의 종교 철학에서 이신론의 본질적인 내용들은 남아 있었다.
〔의미와 평가] 이신론은 종교 개혁 이후 다양한 교파와 종파가 난무하던 당시의 유럽의 상황에서 등장하였다. 따라서 이신론자들은 종교, 신조(信條) 또는 신앙 고백의 절대성 주장을 거부하였고, 종교적 관용과 양심의 자유 그리고 특히 각 종교의 진정한 신심에 대한 동일한 가치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도덕적 · 윤리적 영역에서 모든 종교의 본질적인 내용을 발견하였다. 즉 이신론의 신봉자들은 타종교에 대해 관용을 베풀지 못하던 당시 계시 종교의 허점을 간파하였고, 그리고 각 교파의 신조에 의해서 갈려진 교회의 상황 속에서, 철학적인 의미에서도 긍정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 진리의 회복을 목표로 두고 이상적인 그리스도교를 추구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비판으로 확대되었으며, 구체적으로는 양심과 종교의 자유 그리고 종교적 관용을 요청하였다.
또한 이신론은 17~18세기 서유럽에서 유행했던 철학 사조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완전히 통합된 이론이나 학파를 이루어 내지 못했고,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정의도 없었다. 그래서 종교적 입장에 대한 이신론자들의 공통적 사고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종합해서 말하자면, 계몽주의의 이신론은 그 핵심이 종교적 합리주의에서 출발해서 자연 종교의 이름으로 그리스도교, 특히 그 계시에 대해 의혹을 품고 비판하는 것이다. 자연 종교는 자연의 완전하고 도덕적인 질서의 실제성과 연결되어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의지는 이러한 자연적이고 도덕적인 질서에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한 시대를 풍미하던 이러한 이신론은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낡은 세계관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신론은 오늘날에도 계속적으로 '철학적인 하느님 물음' 이라는 주제로써 열려 있다. 즉 이신론자들이 제기했던 종교적 관용, 사상 · 양심 · 종교의 자유, 자연법에 근거한 인권에 대한 관심사와 더불어 합리적인 종교, 설득력 있는 그리스도교 이론 구성을 위한 노력은 시대를 뛰어넘어 여전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의미를 지닌다. 하느님은 신학의 영역과 교회의 공간을 넘어서 세속화된 인간 사회 안에서도 바로 이해되고 흠숭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16세기의 인문주의 전통을 근간으로 발생한 계몽주의 철학적 신론으로써의 이신론이 인간의 윤리와 도덕 안에서 그리스도교를 재구성하려 했던 시도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가 된다. (V 자연 신학 ; → 신론 ; 자연 종교 ; 자연주의 ; 자연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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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론 理神論 [라]deismus [영]de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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