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여삼 李 ―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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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세례명은 바오로. 충청도 홍주(洪州)의 양인출신이다.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1839년에 순교한 이태권(李太權, 베드로)의 숙부(叔父)이다. 그의 집안은 맏형 이무명을 비롯하여 여러 형제가 함께 교리를 실천하면서 성가정을 이루었다. 그는 신유박해 때 맏형 이무명과 함께 전라도로 피신하였다가 그곳에서 체포되어 홍주로 압송된 뒤 다시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때 맏형만 전라도로 유배되고 그는 다른 가족들과 함께 풀려 났다. 즉시 그는 자신의 심약한 마음을 뉘우치고 형 한 명과 함께 공주에 있는 산으로 피신하여 신앙 생활을 하였다. 이듬해 2월에 다시 체포되어 공주로 압송되었으나 그는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유배형을 받았다. 10년후 귀양에서 풀려 난 그는 전라도 금산의 개지기(지금의 충남 금산군 남이면 건천리)로 이주하여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때까지 예비 신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의 신앙은 점차 굳세어져 순교할 마음까지 갖게 되었다.
1811~1812년 사이에 내포 지방에서 박해가 일어나자 1812년 6월에 그는 또다시 체포되어 홍주로 압송되었다. 5개월 동안 감옥 생활을 하면서 여러 차례 혹독한 형벌을 받았지만 그는 끗끗하게 신앙을 지키면서 모든 물음에 당당히 답변하였다. 그러자 관장은 끝내 배교시킬 수 없음을 알고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사형이 집행되던 11월 말 오랫동안 매질을 당해도 죽지 않던 그는 갑자기 물을 갖다 달라고 요구한 뒤 크게 십자 성호를 긋고 자신에게 "세례를 주노라"라고 하면서 머리에 물을 부었다. 그리고 자기를 죽이려면 옆구리 한 부분을 치라고 형리에게 가리켜 주었다. 형리가 그곳을 두 번 치자 그는 숨을 거두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약 43세였다. 그가 순교하던 순간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을 지나가던 젊은이 세 명이 찬란한 광채가 하늘까지 뻗쳐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또한 매를 맞아 갈기갈기 찢기었던 그의 시신에는 상처의 흔적조차 없었고, 오히려 환한 광채가 발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때부터 그의 이름은 홍주 관원과 포졸들의 입에 오랫동안 오르내렸다. (→ 이태권)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中,pp. 39~42. 〔孫淑景〕